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현해탄을 건너서 광부가 되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어느 봄날, 부산항 부두.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부둣가 한쪽에 몰려 있다. 그들은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오르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일행에 섞여 인솔자들(일본인)과 함께 배에 올랐다. 부산을 떠난 배는 다음 날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일본 땅에 배가 닿자 그 동안 싹싹하고 부드럽던 인솔자들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지고, 그들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돌변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대로 탄광까지 따라 갔다. 일행이 닿은 곳은 후쿠오까(福岡) 지방에 있는 한 탄광촌이었다. 그곳까지 간 조선사람들은 숙소 겸 식당인 <함바(飯場)>라는 허름한 목조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광산측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나는 작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은 다음 탄광 광부가 되어 막장에서 석탄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광부생활이 나로서는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갱(坑) 안에 있는 동안 석탄가루가 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감시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날 밤에 어둠이 짙은 야음을 틈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오사카
탄광에서 빠져나온 나는 오사카(大阪)로 갔다.
그 당시 일본은 군대의 인원보충뿐만 아니라, 전쟁하는데 드는 군수 물자 생산과 군사기지건설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조선사람들을 많이 데려갔다.
한데, 같은 일본 땅 안에서도 내가 지내던 그 탄광처럼 특정한 지역 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제한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오사카가 그런 곳이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오사카까지 갔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큐슈(九州)와 혼슈(本州)를 연결하는 해저(海底)터널을 통과해야 되고,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인 구레(吳) 요새지(要塞地)를 지나가야 되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구레(吳)를 지나갈 때는 승객(乘客)들이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차창(車窓)을 가리고 지나갔다.
하여간 나는 오사카에 도달했다. 앞에 설명했듯이 오사카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숙소와 일자리를 쉽게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시우쇠를 불려 강철을 만드는 제강소에서 일했다. 용광로에서 나온 쇠 찌꺼기가 식은 다음, 그것을 떼어 밖으로 운반해 내는 그런 일이었다. 힘드는 일이긴 했지만 탄광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중 어느날 나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피할 길이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그들의 심문을 받았다.
이유는 내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했는데, 본적지 확인과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 등에 관한 조사를 받으면서 한 주일가량을 그렇게 갇혀 지냈다.
내가 갇혀 있던 방엔 일본인도 몇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식량을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노동력만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경찰서 유치장 생활도 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조사실로 불려갔다. 탄광에서 사람이 와있었다.
탄광에 있을 때, 내가 지내던 함바(飯場)집 주인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나는 그 사람에게 넘겨졌고, 그와 함께 후쿠오카 탄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