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어(敵性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적성어(敵性語)

오늘날은 ‘영어 전성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없다.  태평양전쟁 당시와 종전(終戰) 후에 있었던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먼저 약 50여년 전인 1966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영어에 관한 한 기사(칼럼/논단)의 일부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글의 제목은 영어훈장(英語訓長)이다.


日帝末 太平洋戰爭(일제하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英文科(영문과)학생들은 콧대를 세우지 못하고 기를 펼 겨를이 없었다.

英語(영어)는 敵性語(적성어)라는 刻印(각인)이 찍혀 이것을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반요시찰인적)인 대우를 甘受(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英語(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는 핀잔을 받기가 일쑤였고 무엇을 專攻(전공)하느냐는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중간 생략 –

해방을 맞이하여 事態(사태)는 일변하였다. 英語萬能時代(영어만능시대)가 당도한 것이다.

男女幼少(남녀유소)를 막론하고 英語(영어)를 한두마디 지껄이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많은 시간과 精力(정력)을 英語(영어)공부에 소비하게 되어 英語先生(영어선생)도 제법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이렇게 威力(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英語(영어)를 공부하는데 바치는 勞力(노력)의 代價(대가)를 우리들은 정당히 받고 있는 것인지?

혹자는 말하기를 解放前(해방전) 학생들에 비해 요즘 젊은 학생들의 英語(영어)실력 은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단지 英語(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出衆(출중)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度數(도수)가 늘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語學(어학)공부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있어서 는 안되는 것이고 반면에 선생들이 할일도 대단히 많아서 훌륭한 訓長(훈장)이 되려면 여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 이하 생략 –

*그 당시 신문은 대개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앞에 적었듯이 ‘太平洋戰爭이 한창일’ 때 ‘英語는 敵性語’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 뿐만 아니고,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인 대우를 甘受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했던 때가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영어가 판치는 세상 으로 변했다.

내가 가노야 비행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영어를 알기 때문이 었다. 그 당시 내가 영어를 알 수 있게 되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english

나는 오사카 에서 지낼 때 그곳에서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조선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도 내가 있던 집에서 숙식(宿食)을 했고 같은 직장에서 일를 했다. 한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영어가 필요하게 될 것이니, 영어를 배우라 고 나에게 권했다.

<영어는 적국(敵國) 말이다.>, 또는 <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 는 말이 있을 정도였던 때에,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어 자습(自習)에 필요한 책도 마련해 주었고, 영어 학습에 관한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독학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지냈는데, 내가 불시(不時)에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는 바람에 인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 전후였고 늘 안경을 쓰고 지냈는데, 그도 나처럼 일본식으로 된 성명(姓名)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된 그에 관한 의문도 있다.

첫째는 그러한 학식이 있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막노동자들 속에 섞여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느냐?라는 것이다. 아마 목적하고 있는 무슨 때를 기다리며 지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어찌 되었건,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변했다. 영어도 그렇다.

전날까지‘英語는 敵性語’라고 하던 곳에‘영어 바람’이 불기 시작 하더니, 지금은‘英語萬能時代’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만한 세상 으로 변했다.  불과 70년 사이인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어와는 상관 없는 것이지만, 오카모토 선생 이야기가 나온김에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나라(奈良)에 다녀온 이야기다.

그 당시, 오사카 에서 나라(奈良)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쯤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꺼낸 이야기다.

동대사한 가지는 어슬렁거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많은 꽃사슴들과 그런 것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는 사슴공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지역에 있는 도다이지 (東大寺)라는 절이다.

한데, 절터가 워낙 넓어서 정당(正堂)과 부속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그 절의 대불전(大佛殿) 안에는 청동불상(靑銅佛像)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그 불당(佛堂) 건물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불당 안에 있는 청동불상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한다. 그 불상의 크기에 대한 예를 든다면, 불상 손바닥 위에 보통 어른들 열댓명이 설 수 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과 같은 특이(特異)한 점이 있는 나라(奈良)가 먼 옛날엔 일본의 수도였었는데, 그곳엔 지금도 백제(百濟)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귀국선

나는 귀국선(歸國船)을 타려고 가노야 (鹿屋)를 떠나 하카타 (博多)로 갔다. 한데, 하카타 부둣가엘 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때까지도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다음 어렵게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으로 갈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로 갈 때는 생활환경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미지(未知)의 땅을 동경(憧憬)하며 밤 시간에 현해탄을 건넜는데, 귀국할 때는 밝은 낮 시간에 귀국하는 기쁨을 가지고 검푸른 바닷물결 등 바다 풍경을 보면서 그리던 고국 땅에 닿았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  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감개무량(感慨無量)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 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돌이켜 보니, 1945년은 한국 민족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는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끝난 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행했던 짓들을 길게 늘어놓지 아니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미국의 원폭투하(原爆投下)라는 엄청난 충격파(衝擊波)를 받은 다음에 야 일본이 연합국에 무릎을 꿇었고, 한국에서 물러나게도 되었다. 나라 없는 설음을 안고 각가지 모욕(侮辱)을 당하며 전쟁 틈에서 살아 남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을 떠나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했을 때에, 그 땅엔 귀국선(歸國船)이라는 해방가요(解放歌謠)가 생겼다.

1.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은 크다

2.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번을 울었던가 타국 살이에/ 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3.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해방을/ 얼마나 찾았던가 우리 독립을 / 흰구름아 날려라 바람은 불어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 날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

그렇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또는 멀리 남방(南方) 어디에선가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귀국동포들의 감격이 담긴 이런 노래가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