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날 때를 알아야

주일아침, 유교(儒敎)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역경(易經)에 있는 가르침을 우습게 아는 이들이 차고 넘쳐나는 세상 뉴스를 보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주역(周易)이라고도 부르는 역경을 보면 태극, 음양, 사상, 팔괘 등등의 용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64괘가 있고 그 64괘 중 제일 윗자리에 건위천(乾爲天)이라는 괘가 있습니다.

이 건위천이라는 괘에 해당하는 사람의들 운세는 이렇게 설명되곤 합니다.

“용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형상이다. 사업에 비하면 盛業(성업), 完全操業(완전조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긴장한 상황 속에 있으며 또한 책임도 무겁다. 그래서 이 괘는 가장 좋은 괘이다. 너무나 좋기 때문에 모든 것은 차면 기운다는 것으로 도리어 불길한 것으로 역전할 우려가 있다.”

“현재 귀한 위치에 있는 이거나 또는 평소에 부지런하고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좋은 괘이지만, 평소에 근면하지 아니한 사람, 거짓말이 많은 사람,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악운으로 역전되기가 십상이다. “

“보통 사람들에게 운이 꼭대기에 다다른 것이서 오만심을 불러일으키기 쉬우니 조심하라.”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의 형국이다. 용은 떨어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주역(周易) 건위천(乾爲天)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 존함은 알되 망함은 알지 못하며<知存而不知亡(지존이불지망)>, 얻음은 알되 잃음은 알지 못하니<知得而不知喪(지득이불지상)> “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라는 말은 얼핏 승승장구하는 군대나 연전연승하는 스포츠팀이나 선수들에게는 아주 듣기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capture-20150607-091559-vert조선시대 양반과 관료사회에서는 이 역경의 가르침을 벼슬아치들이 반드시 곱씹어야 할 교훈으로 삼았었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자리 곧 권력을 부리는 자리에 앉다보면 계속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제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갖은 권모술수와 부정하고 부패한 방법으로 제 목적을 달성했지만 끝내 패가망신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그런 개인이나 집안의 패가망신 뿐만 아니라 자칫 나라가 절단나는 사단이 될 수도 있겠기에 벼슬아치들에게 곱씹기를 강조했던 말 “나아감은 알되 물러남은 알지 못하며<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라는 교훈이 뼈저리게 들려야만하는 오늘입니다.

제 자리 아닌 것은 탐하지 말 일이며, 설혹 그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제 자리가 아닌 줄 알면 물러나야 개인이나 나라에 득이 될 일입니다.

자기가 오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도 모르고 공주놀음에 빠져있는 대통령을 비롯해 부정부패의 교본으로 기록될 만한 이들이 연이어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출사표를 던지는 인간들, 입으로는 독감정도의 감기라면서 그 조차 수습못해 전 국민을 유언비어의 도가니속에 빠뜨려 놓고 허둥지둥 거리는 장차관 이하 실무 담당 공무원들, “경제가 세월호에 발목잡혀…”운운히며 한(恨)조차 풀지 못하고 죽은 귀신 불러내어 제 면피에 급급한 국무총리 대행이라는 인간들이 오늘 절실히 곱씹어 마땅한 “知進而不知退(지진이불지퇴)”입니다.

참 씁쓸한 사진들

미국내 언론들이 한반도에 대한 뉴스를 전하는 빈도수에 있어 남쪽은 북쪽을 따를수가 없답니다. 그만큼 북한에 대한 뉴스를 많이 다룬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북의 김정은에 대한 뉴스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 류의 기사들 대부분이 김정은을 희화화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내용들입니다. 특히 기사에 달린 사진들이나 동영상들은 정상적인 미국인들에게 웃음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젊잖은 사진 두 장을 골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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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visits Mangyongdae Revolutionary School

저런류의 사진들이 미국인들의 눈에는 우수꽝스럽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겠지만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通)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제가 본 남쪽의 사진 한장이 어찌 그리 우스꽝스럽고 안스럽던지요. 아마 사진에 달린 설명과 사진에 대한 정황설명을 미국인들이 보거나 듣는다면 그 반응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진이 통(通)하는 남쪽 사회를 생각해 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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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리 남북이 닮아가는지요. 그나마 닮아가기라도 하니 좋다고 할까요?

답답함으로.

(혹시 제 느낌을 모르시겠나요? 그럼 어쩔까요? 정말 답답함으로.)

우리동네 뉴스

오늘 제가 사는 동네 사람들의 최고 관심 뉴스는Beau Biden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올해 46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Beau는 현 미국 부통령 Joe Biden의 장남이자 델라웨어주Attorney General(주 법무장관)이었으며, 내년도 선거에서 유력한 주지사 후보였습니다.

어제 오늘 지역 방송이나 신문에는 Biden 일가에 대한 뉴스가 넘쳐났답니다.biden

장례 행사를 치룬 Saint Anthony of Padua Church는 Wilmington시 downtown내 Little Italy라고 불리우는 이태리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곳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오늘 제 가게 손님 한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랍니다.

이 양반은 은퇴한 대학교수랍니다.

Saint Anthony of Padua Church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랍니다. 그 교회는 이번 주일(6월 7일)부터 일주간 동안 치루어지는Italian Festival 준비로 보통 분주한 게 아니었답니다. 교회 부속건물과 뜰에는 행사 준비로 각종 좌판들과 전시 및 판매용품들로 그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위해서 그 모든 준비물들을 치워야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한쪽 구석으로 다 미뤄 놓았는데 바로 전날 보안요원들이 현장 답사 및 준비를 하며 보안에 문제가 있다고 모든 물품들을 장례시장에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신나서 제게 전해준 손님은 걸음걸이도 시원치않은 노인이시랍니다. 그렇게 다 치운 물건들을 내일 오후에는 또 다시 다 정리해서 페스티벌 준비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내내 싫지 않은 표정이었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마지막 말입니다.

“아까운 젊은 친구 먼저 간 길 배웅하는데 이 정도야….”

옛사람의 위로

뉴스 보기가 겁납니다. 뻔뻔스러움이 도를 넘었습니다. 빤한 거짓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제 자랑으로 늘어 놓습니다.

백주 대낮에 거짓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습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이미 거짓을 진실로 바꿀 수 있는, 아니 거짓임을 밝혀낸 이들을 사회를 어지롭히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기까지 할 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실제로 발휘되곤 합니다.

답답함으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이나 넘겨봅니다.

노자

도덕경 제 3장 위무위(爲無爲)편 마지막 문장입니다.

“위무위 즉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 – “무위로써 (정치를)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위(無爲)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억지로 하거나 꾸며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꾸미지 말고(속이지 말고, 거짓으로 하지 않고 정치를 하면) 다스리는 일(정치)가 잘못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위’ – 곧 (백성을) 속이거나, (백성을 향해) 꾸미거나 거짓말 하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란 그렇게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정치란 사람이 하는 일임으로 100% 그렇게 할 수는 없을 터이니, 위무위(爲無爲)라는 말 속에는 설혹 ‘속이거나, 꾸미거나, 거짓말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최소한 무위한 것처럼 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이되 속이지 않은 것처럼은 하라는 말입니다. 바로 최악의 경우에라도 부끄러움을 잃어서는 아니된다는 경고입니다.

노자가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제반 분야의 이른바 지도층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부끄러움을 잃고 뻔뻔함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결국 혼란을 맞게되고 망하거나 쇠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때론 옛사람들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삼보일배(三步一拜)

오체투지(五體投地)나 삼보일배(三步一拜)라는 말들은 제게 좀 낯선 말들이랍니다. 제가 그런 행위들을 해본적도 없거니와 귀에 익은 말들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비롯된 이 말들은 제 일상과는 거리가 좀 있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같은 경전들의 번역본들이나 벽암록 같은 선문답집 등을 곁에 두고 읽는 까닭은 그저 제 지적 유희일 뿐이지 불교의 심오한 바닥을 느끼고자하는 지경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오체투지(五體投地)나 삼보일배(三步一拜)같은 수행방법들은 저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랍니다.

사실 108배니 천배니 삼천배니 하는 말들은 소설속 또는 야사 등에서 들어보았지만 오체투지니 삼보일배니 하는 말들을 들은 것은 근자에 이르러서입니다.

세월호 희생자인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양이 팽목항에서 광화문을 향해 삼보일배 걸음을 내디딘지 백일을 맞는답니다.

삼보일배

세걸음 걷고 큰 절 한번하면서 520km의 거리를 온몸으로 걷고 있는 것이지요. 지난 2월 23일에 시작한 이 고행의 걸음은 오는 이달 중순경 광화문에서 끝을 맺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릇 모든 종교 수행 방법에는 고행이라는 수단이 있습니다. 세 걸음 걷고 한번 큰절을 하는 삼보일배만 하더라도 자신이 지은 모든 나쁜 업을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생명을 돕겠다는 서원하는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삼보일배는 문자 그대로 세걸음 걷고 절 한번 하고라는 뜻 위에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의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부처님께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고, 수행자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호진씨 부녀의 삼보일배 고행이 비단 그런 종교적 수행만은 아닐 것입니다. 두 부녀의 고행길은 자신들이나 가족들의 구원이나 깨달음을 위한 수행만은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난해 4.16일 이전의 이호진씨 부녀에게 이런 고행길이란 차마 꿈속에서라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들 부녀가 이런 고행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예수쟁이인 저는 이런 고통의 의미를 성서에게 묻게 된답니다.

성서 욥기는 바로 이호진씨 부녀와 같은 처지에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학작품입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죄없는 자들이 당해야만 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정당화하는 체제(신학, 신앙)에 대한 그리고 그런 종류의 신(고통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반항이자 도전입니다.

그러나 욥기 저자는 끝내 욥이 당하고 감내해야했던 고통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 또는 설득력있는 설명이나 해석을 내리지 않습니다. 욥기는 죄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란 가장 비인간적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그것을 이겨내야만 하는 몫은 바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신이 함께 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호진씨 부녀가 사개월여에 걸친 520km 삼보일보의 고행을 광화문에서 마친 후에도 아마 두 부녀의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지난 일여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바램들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삼보일배의 고행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이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