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루살렘인가?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열번 째

지난해 문창극에 이어 이번에는 황교안이 오늘날 한국기독교 또는 한국교회의 편협하고 천박한 신앙관을 세상에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교계나 교회가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청 높혀 그를 두둔하기 바쁜 모양새입니다.

심지어 <황 후보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에 다니엘과 같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에겐 천군만마와 같습니다. 아울러 여러분이 지인들 20명에게 이글을 전달하여 우리가 함께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라는 SNS의 글들이 퍼지고 있다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몰염치의 당당함에 뻔뻔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일부(그 일부가 큰 세력이긴 하더라도) 한국교계나 한국교회가 천박한 모습을 더하면 더해 갈수록 옳게 믿으려하는 이들은 성서에 귀를 기울일 일입니다.

 

유월에

매 주일 아침, 제 가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저와 같은 업(세탁업)을 하시는 이들의 손님들에게 짧은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답니다. 내일이면  400번 째이니 거의 8년 가까이 잇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단 한사람만”이라도 주일 아침에 “사는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왔답니다.

400번 째 편지,  비록 제 손님은 아니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과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유월에!


 

bs-06-13-DW-Kultur-Gaienhofen오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입니다.

여름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찾아 나섭니다. 바닷가나 강가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산과 공원을 찾기도 합니다.

자연과 함께 살았던 유명한 미국인을 꼽으라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강변 숲속에서 지내며 쓴 책인 Walden은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진리들 –단순, 조화, 아름다움 등- 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소로우와는 반대로 자연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인 유명한 독일인이 있습니다. 데미안 황야의 늑대, 싯달타 등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입니다.

그는 처음 자신의 집을 갖은 이래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정원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에게 정원은 바로 자연이었답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가꾼 정원 속에서 얻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이렇게 적고 있답니다.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 그 능력은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고개를 높이 들어라. 한 조각의 하늘, 초록빛 나뭇가지들로 덮인 정원의 담장, 멋진 개 한 마리, 떼를 지어가는 어린아이들,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 모양.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말자.>

<하루 중 한 한 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거나 활기에 찬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책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Hours in the Garden and Other Poems>에 있는 말들이랍니다.

작은 기쁨으로 활기차고 아름다운 유월을 맞이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행복이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행복은 한 마리 나비와 같다. 나비를 잡으려 할수록 이리저리 빠져 달아나버린다. 그러나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보면, 어느새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800px-WaldenPondSpringIt is the last day of May. It will be June tomorrow in which the real summer begins.

In summer, many people go out to nature. They go to the beach, riversides, mountains, or parks.

Henry David Thoreau is one of the most prominent Americans who lived a life with nature. His best-known book, Walden, which he wrote while he was living in the forest around the shores of Walden Pond in Concord, Massachusetts, is still telling us that the true meaning of life, such as simplicity, harmony, and beauty, can be found in nature.

There is one famous German author who brought nature into his house instead of going out to nature, in contrast to Thoreau. It is Hermann Hesse, the author of many widely-read books, including Demian, Steppenwolf, and Siddhartha.

It is said that he had never neglected gardening since he had gotten the first house of his own, though he had to move many times. For him, his garden was nature itself.

He wrote life lessons which he had learned from his own garden in this way:

<The ability to enjoy ‘small happiness.’ That is like some pleasure, love and the delineation of feeling. Those don’t attract attention, don’t get praise, and don’t cost money. Raise you head high. A pick of sky, the garden wall covered with green leaves, a beautiful dog, a group of cheerful children, beautiful hairdos of women – never miss all these things.>

<There are none more pitiful than those who don’t look at the sky, nor come up with a spirited and good thought at least once a day.>

<Unfortunately I have never known the way to live easily and comfortably. However, I could always do one thing at my own will. It is no other than living beautifully.>

These words are from his book, Hours in the Garden and Other Poems.

I wish that you’ll greet spirited and beautiful June with small joy.

From your cleaners.

Happiness

–              Henry David Thoreau

Happiness is like a butterfly; the more you chase it, the more it will elude you, but if you turn your attention to other things, it will come and sit softly on your shoulder.

호구(虎口)에 걸린 국제시장

capture-20150527-205122-vert어제 워싱톤에 있는 Woodrow Wilson Center에서 보낸 이메일이랍니다. 한국영화 국제시장을 미 연방의회에서 특별 상영하니 초대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날 연사로 나선 네 사람들 안호영 주미 한국대사와 영화 국제시장 윤제균감독을 빼고 두 미연방하원을 찾아보았답니다. 한국에 대한 정책 또는 한반도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지요.

우선 뉴욕출신 민주당 소속의원인  Charles B. Rangel은 현역의원들 가운데 두번 째로 최장수 의원인 아프리칸 아메리컨(흑인)입니다. 그는 오랜 의정활동 대부분을 아프리칸 어메리컨(흑인)들과 세금문제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국제관계에도 의견을 표명하곤 하였지만 한국문제나 한반도 문제에 대한 특별한 입장을 보인 적은 없는 듯 합니다.

다만 1930년생(올해 85세)인 그는 1948에서 1952년 사이 미군에 복무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습니다. 특히 영화 국제시장의 초반 무대가 되었던 1.4 후퇴시 중공군과의 접전으로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번 행사에 초대된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연사인 미하원 외교위원회 의장인  Ed Royce는 2013년 북한 제재법안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북한문제 뿐만 아니라 중동문제에 있어서 강경파에 속하는 공화당 소속 의원입니다.

자! 이쯤 좀 감이 잡힙니다. 영화 국제시장이 미 연방의회에서 특별 상영되는 까닭 말입니다.

6.15 남북 공동성명 15주년 되는 날인 오는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방미를 앞두고  벌이는 행사라는 것입니다. 비단 이 행사 뿐만 아니라 미국 상하의회 그리고  한반도와 연관된 각종 이익단체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녀의 이번 방미 과정을 곱씹어 봅니다.

왜 하필 6월 15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상징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15 남북 공동성명은 남북이 공히 한반도의 주인공으로서 한반도의 미래를 열자는 아주 큰 첫걸음이었습니다.

이번 박근혜의 미국방문은 바로 이 6.15 공동성명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기반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박근혜의 이번 방미길의 원인이 된 것은 바로 새롭게 강화된 미일 군사동맹이기 때문입나다.

미일 양국은 지난 달 아베 방미 기간중에 일제시대 있었던 종군위안부를 인신매매라는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지난 역사를 잊자고 세상을 향해 천명한 바 있습니다.

그 바탕에서 대북공조와 동북아 국가간 협력방안과 한미간 파트너쉽 확대를 이야기하자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아주 솔직 간단히 요약해 봅니다.

“첫째 지난 일은 잊고, 둘째 미일의 우산 속에 들어와, 세째 미국산 무기구입에 돈 좀 쓰고, 네째 일본애들 말좀 듣고…”

올해 85살의 Charles B. Rangel가 스피커로 나선다는 국제시장 상영행사 이메일을 보면서 든 제 생각이랍니다.

“쯔쯔, 호구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16개 일본을 대표하는 주요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과거 종군위안부에 대한 아베 총리로 대변되는 일본 정부 입장과는 상반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번 성명은 지난 6일 세계 역사학자 187명이 “역사학자들은 일본군이 여성들의 이송이나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자료를 발굴해왔다”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는 아베 정부의 시도에 강력한 경고가 될 전망”이라고 합니다.

또한 한겨레는 이 보도에서 세 곳(일본정부, 서구학자들, 일본 역사단체)의 입장을 도표로 정리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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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입장의 주요 핵심은 “강제성 여부”입니다. 여성들을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끌고가 성노예화 했다는 것이 이번 역사학회 성명의 주 내용입니다. 반면 아베를 위시한 일본정부의 입장은 일부 강제성은 있어지만 국가가 개입했던 사건이 아니라 인신매매라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비교대상에는 빠져있지만 일부 한국내 보수우익을 자처하는 인간들 가운데는 “자발적 의사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강제성 여부”와 “자발적 여부”에 대한 생각들을 하다보니 일군의 여성들 이름이 떠오릅니다. 일제 식민통치 말엽에 실로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일제에 아부협력했던 사람들입니다.

모윤숙(시인), 임영신(교육, 정치가, 중앙여자대학(중앙대학교의 전신) 설립자), 박순천(교육, 정치가), 박인덕(교육, 언론인, 인덕대힉교 설립자), 김활란(교육, 언론인, 이화여대 총장), 노천명(시인, 언론인), 이숙종(교육자, 성신여자대학 설립자), 배상명(교육자, 상명대학 설립자)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1942년 1월 5일 친일협력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朝鮮臨戰保國團 婦人隊)>였습니다.

이 부인대는 바로 전해인 1941년10월 21일에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保國團) 산하 여성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설립 취지문에 따르면, 반도민중(조선민)은 특별지원병 외에 병역에 복무할 명예를 가지지 못하므로 무한한 황은(일본천황)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국민운동의 강력한 하나의 기관으로 설립되었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강령을 통해 1.황도정신 선양과 사상의 통일, 2.전시체제의 국민생활 쇄신, 3.국민 모두의 노동보국, 4.국가우선의 원칙하에 저축, 생산, 공출 등에 협력, 5.국방사상의 보급 등을 내세우며 해방직전까지 일제에 자발적 충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조선임전보국단원) 대부분이 해방후 대한민국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해방후 부통령까지 지낸 김성수를 비롯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 본인 및 그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각 분야에 이른바 엘리트층을 이루며 대한민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됩니다.

또한 자유당이래 오늘날 새누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당 이래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의 주도 세력들 역시 이들에서 비롯된 세력들입니다.

조선임전보국단 상임이사였던 김용주(金龍周)의 아들이 새누리당 현대표인 김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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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전보국단원들은 해방 직전까지만해도 서슬 퍼렇게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외치며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어야만 한다고 목청 높이던 자들입니다. 외세에 의탁해서 그 앞잡이가 되거나 하수인이 되어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고, 동포들을 먹이 삼아 살찌우고 영달을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해방 –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오늘.

그 조선임전보국단원가운데 중심인물이었던 김용주(金龍周)의 아들 김무성에게 한마디 던진 노건호를 향해 내뱉는 말들이 정말 가관입니다.

그 가운데 으뜸이 바로 “예의(禮儀)” 운운 아닐까합니다.

구태여 고 노무현대통령을 끌어 들이지 않아도, 일본 역사학회의 성명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까닭입니다.

바른 사회로 나가는 전제 – 피케티 이야기를 들으며

모처럼 맞는 연휴 아침, 토마 피케티 (Thomas Piketty)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는 철저한 자료검증과 정보의 공유를 전제한 후 역사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이나 혁명이 아닌 체제내에서의 건강한 변혁이 담보되는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그의 경제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할 충고라는 생각입니다.

0:12 오늘 밤 여기에 와서 정말 좋습니다.

0:13 저는 소득과 부의 분배에 관한 역사를 지난 15년간 연구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에서 나온 재미있는 교훈은 정말 장기적으로는 자본이익율이 경제성장율을 초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부가 높이 집중되게 합니다. 부의 무한한 집중이 아니라 r 과 g 사이의 격차가 더 커지고 부의 불평등 수준이 큰 쪽을 사회가 직면합니다.

0:48 그래서 이것이 제가 오늘 이야기할 주요 힘입니다. 하지만 소득과 부의 분배 역학에서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힘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소득과 부의 분배의 장기적인 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힘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아직도 많은 데이터를 모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던 것보다 오늘날 조금 더 알지만 아직도 조금 밖에 모르고 거기엔 서로 다른 과정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 사회, 정치를 좀더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단순한 이 힘에 초점을 맞추지만 다른 중요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1:27 제가 보여드릴 데이터의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이용가능한 세계 최고 소득자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은 불평등에 관해 존재하는 가장 큰 데이터베이스이고 수십 개 국가에서 30명 이상의 학자들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사실 몇 가지를 보여드린 뒤에 g 보다 큰 r 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는 소득 불평등의 순서가 지난 세기동안 미국와 유럽 사이에 크게 뒤집어졌습니다. 1900, 1910년 당시의 소득 불평등은 실제로 유럽이 미국보다 더 높았는데 그 반면 오늘날은 미국이 더 높아요 그래서 명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요한 설명은 g 보다 큰 r 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술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변화, 교육과 기술 사이의 경쟁, 세계화, 미국 안에서 기술에 대한 좀더 평등하지 않은 접근인데 아주 좋은 최고 대학이 있지만 교육 체계의 하위권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기술에 대한 아주 불공평한 접근이 있고 미국의 최고 매니저에 대한 보상이 전례없이 상승해서 교육만으로 해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진행중이지만 오늘 이것에 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싶으니까요.

2:47 소득 불평등에 관해 아주 간단한 지표를 보여드리죠. 이것은 상위 10%로 가는 총소득의 점유율입니다. 보시다시피 1세기 전에는 유럽에서는 45 – 50% 사이였는데 미국에서는 40%를 약간 넘어섰죠. 그래서 유럽이 좀더 불평등했어요. 그 뒤에 20세기 초반에 급작스런 감소가 일어났고 최근에 들어와서 미국이 유럽보다 더 불평등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방금 얘기했던 첫번째 사실입니다. 자, 두번째 사실은 부의 불평등과 좀더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부의 불평등은 항상 소득의 불평등보다 훨씬 높고 부의 불평등 또한 최근에 들어서 증가했지만 1세기 전에 비하면 오늘날은 덜 극단적입니다. 소득에 대비한 부의 총량은 1차 세계 대전, 대공황,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일어난 엄청난 충격에서 이제는 회복되었습니다.

3:49 이제 2개의 그래프를 보면서 2번 사실과 3번 사실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부의 불평등 수준을 보면 상위 10%의 부자들이 가진 총재산의 점유율인데 소득 불평등에 관해 미국와 유럽 사이에 있었던 비슷한 역전을 볼 수 있습니다. 1세기 전에는 부의 집중이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높았지만 지금은 반대입니다. 하지만 2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의 불평등의 일반적인 수준은 늘 소득의 불평등보다 높았습니다. 소득 불평등에 대해 상위 10%의 점유율은 총소득의 30 – 50% 사이였지만 반면에 부에 관해서 점유율은 늘 60 – 90% 사이임을 기억하세요. 자, 그게 1번 사실이고 다음에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부의 집중은 항상 소득의 집중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4:47 2번 사실은 최근에 일어난 부의 불평등 상승은 1910년대로 돌아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커다란 차이는 부의 불평등은 아직도 엄청 크고 전체적인 부의 60, 70%가 상위10%에게 가지만 좋은 소식이라면 실제로 1세기 전보다는 낫습니다. 그때는 유럽에서 90%의 부가 상위 10%한테 갔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가진 것은 제가 중간 40%라고 부르는데 상위 10%도 아니고 하위 50%도 아닌 사람들로서 전체적인 부, 국부의 20 – 30%를 소유하는 부의 중산층입니다. 반면에 그들은 1세기 전에는 가난했죠. 그때는 기본적으로 부의 중산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중요한 변화이고 비록 부의 총량은 회복되었지만 부의 불평등이 1차 세계 대전 이전 수준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좋습니까? 이것이 소득에 대비한 부의 총량이고 보시다시피 특히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수준으로 거의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2가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축적ㅎㄴ 부의 총량과 관련이 있고 물론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는 잘못된 것이 없어요. 특히 부가 좀더 분산되고 덜 집중되었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부의 불평등의 장기적 진화이고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1차 세계 대전까지 부의 불평등이 아주 높았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고 그게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한다면 미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6:31 미래에 관해 몇 가지를 설명하고 추측을 해보죠. 우선 왜 부가 소득보다 더 많이 집중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모델은 역동적이고 왕조적인 모델로서 개인은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온갖 목적으로 부를 쌓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수명이 다할 동안만 부를 축적한다면 늙어서 소비할 수 있으려면 부의 불평등 수준은 소득의 불평등 수준과 어느 정도 비례해야 합니다. 부의 불평등이 소득의 불평등보다 훨씬 심한 이유를 단순한 수명 모델로 설명하기는 아주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목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보통 그들은 부를 다음 세대,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거나 부와 함께 오는 명성이나 권력 때문에 부를 축적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데이터에서 보는 것을 설명하려면 수명 이상으로 축적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 부의 축적에 관한 역동적 모델의 커다란 계층에서 상속을 목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동기를 가지며 온갖 종류의 복합적 충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가족은 자식수가 엄청 많아서 부가 나눠질 것입니다. 어떤 가족은 자식이 적습니다. 자본수익율에 대한 충격도 있습니다. 어떤 가족은 엄청난 자본이익을 얻습니다. 어떤 가족은 투자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부의 과정에는 늘 어떤 유동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내려갑니다. 중요한 점은 어떤 모델에서나 그런 충격의 변동에 대해 부의 불평등에 대한 평형상태는 급격하게 증가는 r – g의 함수입니다. 직감적으로 자본이익율과 경제성장율 사이의 차이가 중요한 까닭은 초기의 부의 불평등이 보다 큰 r – g를 가지고 더 빨리 가속될 것이기 때문이죠. 간단한 예를 보죠. r 이 5%이고 g 가 1%일 때 부자는 자산의 1/5만 재투자하면 그들의 부는 경제 규모만큼 빨리 증가합니다. 그래서 더 큰 재산을 만들고 영속시키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안 낸다고 가정하고 4/5를 소비할 수 있고 1/5만 재투자하면 되니까요. 물론 어떤 가족은 그보다 더 소비하겠지만 어떤 가족은 덜 소비할 것이고 분배에 어떤 유동성은 있지만 평균적으로 1/5만 재투자하면 되고 그래서 높은 부의 불평등이 지속되는 이유입니다.

9:11 이제 r 이 g 보다 항상 크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마세요. 왜냐하면 사실 이것이 인류역사상 늘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이유에서 누구한테라도 아주 명확합니다. 성장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0%에 가까웠기 때문이죠. 성장은 어쩌면 0.1, 0.2, 0.3% 였지만 인구증가율과 1인당 생산량은 아주 느렸고 그 반면에 자본수익율은 물론 0%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전통적인 형태의 자산이었던 토지 자산에 대해서는 보통 5%였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독자라면 아시겠죠. 천 파운드의 연간 소독을 원한다면 자산의 가치가 2만 파운드가 되어야만 2만의 5%가 천이 되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사회의 근간이었고 g 보다 큰 r 때문에 부와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 수익으로 살면서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걱정하는게 아니라 살면서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10:21 자, 제가 한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결론은 근대의 산업성장은 기대한 만큼 기본적인 사실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물론 산업혁명에 따른 성장율은 보통 0에서 1 – 2%로 올랐지만 그와 동시에 자본수익율도 올라서 둘 사이의 격차는 정말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세기 동안 아주 독특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1914년과 1945년의 전쟁 충격으로 아주 낮은 수익율이 일어났고 대공황 시기에 부의 파괴, 물가 상승, 파산이 일어나 이 모든 것들이 민간 자본수익율을 1914년과 1945년 사이에 아주 낮은 수준으로 감소시켰습니다. 그뒤에 전쟁이 끝난 뒤 부분적으로는 재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성장율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독일, 프랑스, 일본에서 1950년과 1980년 사이에 5%의 성장율을 보였는데 주로 재건 때문이었고 또한 베이비 붐 효과에 따른 아주 큰 인구증가 때문입니다. 자, 분명 그것은 오래가지는 않고 최소한 인구 증가는 앞으로 감소할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상은 장기적 성장은 4 – 5%라기 보다는 1 – 2%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을 보시면 최고의 예상치로서 세계 GDP 성장율과 자본수익율, 평균적인 자본수익율입니다. 보시다시피 인류역사의 대부분 동안 성장율은 아주 작았고 수익율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동안 인구가 정말 증가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 더 높았고 재건 과정이 성장을 가져왔고 수익율과 작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UN의 인구예측을 사용하는데 물론 확실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많은 아이들이 생길 수도 있고 성장율이 더 높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이것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상이고 이에 따르면 세계적인 성장은 감소하고 수익율과 차이는 증가할 것입니다.

12:37 자, 20세기 동안 일어난 또다른 특이한 사건은 제가 말했듯이 파괴, 자본의 과세로 이것은 세전 수익율입니다. 이것은 세후 수익율이고 파괴 이후에 그 때문에 파괴 이후 세후 평균수익율이 아주 오랫동안 성장율을 밑돌았습니다. 하지만 파괴가 없었다면 과세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래서 수익율과 성장 사이의 균형은 아주 많은 요소에 의존하며 이런 요소를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술과 자본집약형 기법의 개발. 오늘날 경제에서 자본집약이 가장 심한 부문은 부동산 부문, 주택, 에너지 부문이지만 미래에는 수많은 부문에서 많은 로보트를 사용하게 되고 오늘날에 비해 총자산의 점유율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것에서 아주 멀리 있고 지금부터 부동산 부문, 에너지 부문에서 일어나는 일은 총자산과 자산 분배에 대해서 훨씬 더 중요합니다.

13:44 또다른 중요한 문제는 자산 관리에서 규모의 효과, 금융의 복잡성, 금융의 자유화 등으로 대규모 자산의 경우 더 큰 수익율을 얻기가 쉬습니다. 이것은 특히 억만장자, 대규모의 자본기부에 강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하나 드리자면 이것은 1987-2013년 사이에 포브스지의 억만장자 순위에서 나왔는데 최상위 부자들은 물가상승을 윗돌며 해마다 6, 7%로 상승하는 반면 세계 평균 소득, 세계 평균 부는 해마다 2%만 상승했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결과를 큰 대학기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최초 기금이 클수록 수익율도 큽니다.

14:33 이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제가 생각하기로 경제의 투명성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부의 역학을 아주 조금 알고 있고 국제적으로 은행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 자신의 국제적인 등록제도, 자산과세에 대한 협력도 필요합니다. 자산과세에 적은 세율을 적용해도 정보를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관찰한 실상에 정책을 적용해갈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조세피난처에 대항한 싸움과 정보의 자동공유가 우리를 이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이제 부를 재분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사용해 볼 수 있습니다. 물가 상승이죠. 세법을 고치는 것보다 돈을 찍어내는게 훨씬 쉽기에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때로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강제 몰수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나치게 부를 가졌다고 느끼면 강제 몰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의 역학을 조정하는데 아주 효율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전쟁은 훨씬 덜 효율적인 방법이고 그래서 저는 누진과세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물론 역사는 (웃음) 역사는 스스로 최선책을 만들어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 관여하겠죠.

15:45 감사합니다.

15:47 (박수)

15:49 브루노: 토마 피케티. 감사합니다.

15:54 토마, 2 – 3가지 질문을 하고 싶군요. 데이터를 잘 사용한게 놀랍지만 기본적으로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부의 집중이 늘어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갖는 자연스런 성향인데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시스템 자체를 위협할지도 모르니까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가 방금 본 것인 누진과세등을 포함해서 부를 재분배하는 정책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그것들이 정책으로 실시될 것 같습니까?

16:29 토마: 글쎄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득, 부와 과세의 역사는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를 안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1세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누진소득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되었죠. 심지어 5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은행 비밀주의는 스위스에서 영원할거라고 말했지만 스위스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큰 힘을 가졌다고 봤고 그러다가 갑자기 스위스 은행에 미국이 경제제제를 가했고 큰 변화가 일어났죠. 지금 우리는 경제의 투명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잘 조절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EU가 조약을 맺으면 세계 GDP의 절반이 해당되고 경제의 투명성을 개선하는데 세계 GDP의 절반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최소한의 과세를 부과하는 건 어떨까요? 이런 것들은 기술적으로 어렵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에 보다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경제의 불투명성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제재를 한다면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7:45 브루노: 당신의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의 하나는 경제적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모습일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엔진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평등을 낮추려고 조치를 하면 그와 동시에 성장을 낮추게 되죠. 그에 대해서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18:00 토마: 예, 불평등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불평등은 어느 정도 혁신과 성장에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인가이죠. 불평등이 너무 극단으로 가면 성장에 쓸모가 없게 되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평등이 훨씬 더 가속화되고 유동성이 낮아지니까요. 예를 들면, 우리가 19세기에서 1차 세계 대전까지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겪었던 부의 집중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의 집중은 비극적인 사건과 정치 변화의 조합으로 파괴되었고 이것은 성장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극단적인 불평등은 민주주의 기관에 나쁠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목소리에 아주 불평등한 접근을 만든다면 말이죠. 미국에서 민간자금의 영향력은 지금 우려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불평등과 같은 그런 극단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산층이 국부를 적절하게 점유하는 것은 성장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공평성과 효율성에 모두 도움이 됩니다.

19:13 브루노: 제가 초반에 당신이 쓴 책이 비판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데이터 일부가 비판받았습니다. 데이터의 선택이 비판받았습니다. 당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데이터를 선별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19:25 토니: 자, 이 책이 토론에 자극을 주게 되어서 아주 좋습니다. 그런 목적도 있습니다. 보세요. 제가 모든 데이터를 자세한 계산과 함께 모두 온라인에 올린 이유는 우리가 이것에 관해서 열리고 투명한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우려점에 대해 하나씩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책을 다시 쓴다면 저는 실제로 이렇게 결론내릴 겁니다. 부의 불평등 상승은 특히 미국에서 제가 책에서 보고한 것보다 실제로 더 높습니다. 사에즈와 주크먼이 한 최근의 연구는 새로운 데이터를 보여주는데 책을 쓸 때는 없었지만 미국에서 부의 집중은 제가 책을 썼을 때보다 더 많이 상승했습니다. 앞으로 다른 데이터도 나오겠죠. 일부는 다른 방향으로 갈테구요. 보세요. 우리는 거의 매주 세계 최고 소득 데이터베이스를 새롭게 올리고 있고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 특히 발전도상국에 관해서도 말이죠. 이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은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사실 부의 역학에 관해 투명성이 충분하지 않다는데 저도 동의를 하고 더 나은 데이터를 갖는 좋은 방법은 적은 세율로 자산 과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렇게 중요한 진화에 동의하고 우리가 관찰한 실상에 정책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과세는 지식의 원천이고 그게 지금 가장 필요합니다.

20:52 브루노: 토마 피케티, 고맙습니다.

20:54 감사합니다. 토마: 감사합니다. (박수)

변종(變種)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버지니아 촌동네에서 살고 있는 후배가 전화를 주었답니다.

언제나 목소리가 경쾌한 친구랍니다.

정초에 덕담을 나누고는 처음입니다. 한달동안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는 인사였습니다.

763458_6거의 십년 만에 나선 고국방문길이었다고 합니다.

“야, 변해 변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변할 수가 있수? 정말 많이 변했습디다.”라며 이어진 변한 한국의 모습을 들었답니다.

물론 후배의 주관적 시각으로 본 변화겠지만 말입니다.

후배는 이야기 끝무렵에 이런 매듭을 지었답니다.

“형, 내 생각엔 말유, 종(種)이 변했더라고 종(種)이…. 변종(變種)이라니까!”

후배는 이 이민의땅에 정착하기 전 한국의 제법 유수한 언론사에서 일했답니다. 왈 기자출신이랍니다. 출입처도 제법 짱짱한 곳들을
돌다가 데스크에 앉을만 할 때 뜻한바(?) 있어 여기 주저 앉은 친구랍니다.

여기서는 반농사꾼으로 도닦고 살며 이제 은퇴를 저울질하고 있는 친구랍니다.

이번 방문길에서 옛직장 동료들을 비롯하여 정관계에 있는 친구들과 법조계 지인들을 두루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형, 우리도 더러운 짓 많이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좀 나간데는 애들 정말 더럽데, 부끄러운 줄 모르더라고. 우린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다 대놓고야.  너무 뻔뻔해. 아무튼 변종이라니까!”

“형도 걔 알지. 그 중 좀 나은 애 말야! 걔가 그러더라고 자기도 아는데 방법이 없다고말이지.”

“우리네야 떠나와 사니까 안보면 그만이지만…. 거기 살았다면 술독에 빠졌거나 미쳤거나… 뭐 솔직하자면 그들처럼 살겠지? “

“여기서 종종  형 목소리나 듣고 삽시다.”

전화를 끊고 종일 먹먹한 느낌으로 보낸 하루랍니다.

후배때문인지 후배의 말 때문인지 뭔지모를 아픔으로 말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딱 일주일 전 이 시간쯤이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답게 살며, 이웃을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온 필라에 사시는 김경지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답니다.

35주년 5.18을 맞아 조촐한 간담회를 개최하려고 준비 중인데, 광주항쟁을 기념하면서 4.16 세월호 참사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참석하겠노라고 응답드리고나서 이런 저런 뉴스들과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제 눈에 들어 온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했던 말들 입니다. 그것도 자칭타칭 기독교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사들이 한 말들입니다.

해당 기사들을 훑어 보다가 든 생각이랍니다. 과연 이런 생각들이 그들만의 것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은 분명 잊혀져가는 사건, 또는 잊혀져야만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안타까움, 동정하는 마음, 웬지 그냥 아리고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어떻게 이런 일이….”하던 이들도 이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언제적 일이냐고?”, “제네들은 뭘 더 바라는거야?”, “그건 지나간 일이고 우리들이 이젠 살아야지!”, “아니 누가 그때 제주도를 가라 그랬냐고?”, “저게 아무래도  종북 빨갱이들이 뒤에 있을게야…” 등등등

누가 하는 소리냐고요? 바로 믿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들이랍니다.

11050688_392090650982606_5665019593049397144_n아마 이 순간에도 유가족  이호진씨 부녀는 광화문을 향한 삼보일배 고된 여정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거의 다달았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들 부녀가 광화문광장에 도달한다하여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이들이 함께 소리쳐 외치는 함성은 “진실규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인 “진실규명”은 시간이 갈수록 잡기 어려운 길목으로 들어서는 듯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실규명”은 비록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지금 보고 듣고자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진실보다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아 온 공동체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능멸하는 사회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그렇게 그들의 외침은 스러져 갈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 끝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바로 바울이 이야기했던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 15)는 명령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넓고 깊게 연대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아직도 예수쟁이로 남아 있답니다.

세월호 – 역사와 성서에게 묻다

신구약 성서에는 각기 전체 이야기에 큰 기둥이 되는 사건들이 하나씩있습니다.구약에서는 출애굽사건이요,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출애굽사건은 해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십자가사건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바로 신앙고백서이고 그 고백서의 핵심은 바로 해방과 구원 이야기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하면서 제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 또는 탈애굽이라는 해방사건이 노예들이었던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던 역사적, 신앙적 경험이었던 것처럼, 우리 한민족에게는 70년 전에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피지배민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지 올해로 70년이 되었지만, 그 역사적 경험을 민족 공동체가 깊게 되새기는 시도는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거나 오히려 되새기는 일이 금기시되는 지경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한반도에서는 무수한 사건 사고들이 이어져왔습니다. 이런 사건 사고들은 비단 한반도 남북에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역사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공동체 겪어 온 경험들입니다.

다만 각 민족 또는 국가 공동체들이 자신들이 당한 사건이나 사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느냐는 것은 각기 다릅니다.

오늘 저는 우리들의 경험들 곧 1945년 이래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 사건 사고들 가운데 자연재해 등의 천재 이런 것들은 제외하고 국가권력을 비롯한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들을 몇가지 꺼내어 짚어보고자 합니다. 사건이나 사고는 연도순으로 짚어봅니다.

우선 제주 4.3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미군정 치하였던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정부 치하인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약 6년 동안 이어져온 제주 4.3사건 또는 제주항쟁에서 약 3만에서 8만명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제주도민 7-8명당 1명 꼴로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이 사건 개시일로부터  약 55년이 지난 2003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총리후보였던 문창극이 4.3폭동이라고 규정하는 등 현 집권세력 및 동조세력들은 이 사건을 좌익 빨갱이들을 토벌한 사건으로 만들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다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949년에 이 단체를 만들면서 관료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마구잡이 또는 강제로 양민들을 이 단체에 가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국가는 이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과거 전력 때문에 북에 동조할 염려가 있다면서 산골작이로 이들을 끌고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 수는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60만에 이른다는 설들이 있는데, 대략 20만 추정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역시 노무현대통령이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였지만, “보도연맹”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금기시되는 사회라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다음은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났던 국민방위군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한때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른바 1.4후퇴입니다. 이때 국가는 다시 적의 지배지역이 될 곳에 사는 장정들을 적들에게 뺏기지 않을 목적으로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만듭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해당 연령층에 있는 사내들을 징집합니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시설도 식량도 의복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원된 장정들은 2인당 한명꼴로 가마니 한장을 지급받은 채 무조건 각자 알아서 부산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한겨울 추위, 전쟁통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이들 국민방위군 총수 50만명 가운데 약 20%의 10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입니다.

훗날 이 사건이 세상에 들어나면서 국회조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을 위한 국가 예산 대부분인 당시돈 50-60억이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 등 당시 국가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어 간 사람들 가운데 정부가 인정한 사망자수는 꼴랑 331명입니다.

그리고1970년 4월 8일에 일어났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이듬해인 1971년 8월 10일 전라도 광주가 아닌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광주대단지 대봉기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개발독재 시절 국가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들입니다.

1960대 서울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해 짧은 시간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그들이 살 집들 곧 주택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는 하꼬방이라고 불렀던 무허가 판자집들이 넘쳐났습니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하여 정동을 중심으로 한 신문로 일대 등 서울 곳곳에 하꼬방들이 즐비했습니다.

그즈음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판자집 좀 정리해 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블도저시장이라는 닉네임이 갖고 있던 그의 충복 김현옥 서울시장 은 이른바 시민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과 신도시 건설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시민 또는 국민이라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건설사업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사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구잡이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세워진 시민 아파트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의 말은 이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높은데 있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6개월만에 세워진 5층 아파트가 완공된지 5개월만에 주저 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철근 70개를 써야하는 기둥에 철근 5개를 썻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아무튼 이 사고로 33명이 죽고 40여명이 크게 다쳤답니다. 제 고향이 신촌이라 이 사건에 대해 할말이 많지만 일던 여기서 접고요.

광주대단지 봉기사건으로 넘어갑니다.

무허가 판자촌 해결에 봉착한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부 무허가 주택은 개량해서 허가 주택으로 양성화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세워 무허가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경기도 광주에 대단지 주거 공간을 만든다고 공표를 합니다.

주로 청계천과 서울역 부근에 거주하던 빈민층 10만여명에게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면 광주에서 살 집을 마련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킵니다.

문제는 10만명이 이사를 한 광주에는 도로, 교통, 시장 등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떵 몇 평을 주고 여기서 살되 각자 알아서 살아라는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주를 권유하면서 평당 당시 돈 200원에 주기로 한 땅을 8000원에서 16000원씩을 내라고 국가 공권력이 강제한 것입니다. 국가의 사기질에 불이 붙었습니다. 자그마치 약속보다 40배에서 80배를 요구한 것입니다.

대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약 6만여명이 시위를 하면서 경찰 차량을 포함한 약 2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대규모 항거가 일어납니다. 이들이 “서울로…”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이 사과하고  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기로 하고 사흘만에  이 봉기는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자 22명은 “폭동을 일으킨 주범들”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일어난 부마항쟁, 광주항쟁 등 민중항쟁의 한 표본이 되기도 하는데 현재 많은 진보인사들 가운데도 이 사건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납니다. 아니 일어난 게 아니라 일으킵니다, 누가 국가권력이. 이 부븐은 제가 건너 뜁니다.

자, 다음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입니다. 이게 어떻게 국가 권력과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1994년 10월 21일 서울시간 아침 7시 48분경에 일어났던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전세계사에서 보기드문  안전불감증에 걸린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듬해인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난 단군 이래 최대의 참사라고 일컬어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역시 이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두 사건 이후 실시된 정부의 안전 평가 실시 결과를 보겠습니다. 정부의 발표입니다.

  1. 전체 고층 건물의 1/7(약 15%)은 개축이 필요한 사태이다.
  2.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다
  3. 한국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이다.

1995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있었던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해방후 겪었던 모든 사건들을 축약해서 드러낸 사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서해앞바다 에 배가 가라 앉았고 이내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구출되었다는 뉴스에서부터, 건국이래 최대의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졌지만 단 하나의 생명체가 구출되었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이제껏 되돌아보았던 사건들의 공통점입니다. 국가권력과 공권력이 주도했거나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결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왜 그랬지?”라고 묻는 사람들은 불순분자, 좌빨, 종북 등등으로 불온의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그리고 국민, 시민들에게 그 사건을 빨리 잊어버리라고 종용합니다.

2015년 오늘까지 자그마치 70년을 이어져온 것입니다. 역사를 되새겨 곱씹을 줄 모르는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갑니다.

저는 해방과 구원이라고 말씀드렸고, 그것은 신앙적 고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해방과 구원의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신이라고요?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 지금 노예인 상태, 억눌린 상태, 억압받은 상태 바로 우리말로 이야기하자면 한을 품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바로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 정의는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강단에서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황당한 정의들이 난무하는 뉴스들을 보곤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란 바로 부자들이라는 논리입니다. 부자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까닭없이 지탄받고 소외되고 미움을 받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황당하다고요?

저는 어제 한국의 경향신문에서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의 피해자가 되게 하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이 한 말이랍니다. 바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우기는 한 전형입니다.

해방은 노예, 피압박, 억압, 굴종 등의 상태에서 풀려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의 상태 곧 죄인에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해방과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가 말한 가난한 사람들이란 바로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가진자, 권력자와 그에 기생하는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손가락질 받고, 불온시 당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렇게 억눌리고, 불온시 당하며 그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내세 곧 죽음 이후의 세상에다 촛점을 맞우는 종교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해방되고 구원받는 바로 한풀이하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960, 70년대 브라질과 남미 민중들이 스스로 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다수가 문맹자였던 농민과 빈민들에게 문해교육 곧 글을 깨우치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혹자는 2015년 문맹률 0%에 가까운 한민족에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무슨 뚱딴지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들의 문맹율은 0%에 수렴하고있지만 문해력, 곧 어떤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현재 OECD 국가들 중에 꼴지라는 것입니다.

자신,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지역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것들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기에 불편한 것들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간편하게 불온으로 찍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분단 상황은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고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권력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적절히 이용합니다. 남북대화록을 마구 까댈 수 있었던 까닭이나, 앞뒤 논리가 맞지않고 심지어 허위사실까지 적시했던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문을 다 까서 공개하는게 거림낌이 없는 만용들은 바로 읽지 않고, 듣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하는 민, 곧 국민, 시민, 민중의 속성을 잘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횡포입니다.

이제 제 발제를 마치려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해방 이후 숱한 사건과 사고들을 겪어오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이렇게 끈질기게 자발적으로 가난의 상태에서 해방되고 구원 받고자 했던 전례가 없습니다. 바로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이 지난 일년 동안 줄기차게 목청높게 외쳐온 진실규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과 외침에 귀기울이고, 이해하려는 해외동포들의 연계작업 바로 우리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고(事故) 그리고…

WireAP_e63875bb4502421b80264aebafe516fd_16x9_992지난 화요일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필라델피아 인근에서 열차사고가 있었답니다. Amtrak 열차 탈선 사고라고 이미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워싱톤과 뉴욕을 오가는 이 열차편을 저도 종종 이용한답니다. 특히 뉴욕 맨하턴에 볼 일이 있는 경우에 제가 즐겨 이용하는 열차편이랍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뉴욕 맨하턴 펜스테이트 역까지 주말 편도요금이 백불 내외이니 서비스에 비해서는 좀 비싼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리로는 서울서 대구사이는 좀 못되고, 서울서 전주 구간쯤 될듯하니 비싼편이지요.

몇년전에 KTX를 타 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비싸고, 서비스와 속도 모든 면에서 한참 아래질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답니다.

Grayhound 버스를 이용하면 약 반값에 뉴욕을 오르내릴 수 있지만 아무래도 쾌적한 것은 열차편이랍니다.

차를 끌고 가는 경우 고속도로 이용료와 뉴욕 통과비, 제가 사는 델라웨어 다리 통행료에 더해 개스비, 그리고 악명높은 맨하턴의  주차비등 합치면 Grayhound와 열차비의 중간쯤 경비가 든답니다.

그러니 혼자가는 경우에는 버스가 가장 싸고 열차가 좀 비싼 편이지만 운전하지 않는 장점을 더한다면 아무래도 열차가 제일 낫기에
그걸 이용하는 편이랍니다.

바로 그 열차가 탈선을 해서 8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답니다.

문제는 제가 종종 이용한다는 사실보다는 이젠 뉴욕 맨하탄에서 일하는 제 딸아이가 사용하는 제 일순위 교통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이 사건 사고 뉴스에 촉각을 세우고 지낸 한주간이었답니다.

연관뉴스들과 사고의 경위, Amtrak 및 정부의 대응 등에 대한 기사들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지요.

만일 같은 사고라도 서부나 중부지역에서 있었다면 “음, 이런 일이 있었군”하고 지나칠 법하겠지만 이건 거의 바로 제 일이기 때문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지요.

초기에 과속(급커브 길에서 거의 두배에 가까운 속도)운행이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보도에서부터 오늘은 어떤 방해물이 운전 구간에
있었다는 보도도 있답니다.

19세기 철도 운영체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철도 운영방식에 대한 비판기사도 있고, 국가가 지원해 주는 사기업 형태의 열차 운행 시스템에 대한 해부기사도 있고, 각 기사마다 저마다의 이견들이 넘쳐나는 댓글들이 있답니다.

그런 기사나 글들을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적어도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구나하는 것이랍니다. 의견은 서로 다르지만 사고 원인을 찾아내고, 해법을 찾자는데는 이견이 없는 것같은 분위기 때문이랍니다.

엇비슷한 사고를 경험하면서 국가공동체 안에서 적을 만들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