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할 짓 하는 놈들을 보며 마땅히 일어야 할 자각(自覺)

“100년 전 이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도 나라 망칠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따져보면 100년 전보다도 더 심한 상황이다. 조선 망국이 근대화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망국의 의미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정신적 광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망국<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의 저자인 역사학자 김기협의 말입니다.

온라인 매체 프레시안에 게제되었던  그의 글  <해방일기>는 제가 즐겨찾던 글이기도 하였습니다. 매체 프레시안과 그 곳에 게제되는 컬럼들을 제가 다 흔쾌히 받아 들이지는 못하지만, 조중동이나 한겨레, 경향, 오마이 역시 그 언저리에 있다는 생각이고 보면 깨우침과 생각은 늘 제 몫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역사학자 김기협의 노력은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조선 망국의 요인을 두가지로 적시합니다.

권력의 공공성 상실이 첫째요, 도덕 정치의 상실이 두번 째라는 것입니다.

그가 적시했던 조선 망국의 요인 두가지는 망국 이후 일제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져서 ‘엽기적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에 딱히 겨룰만한 반론을 찾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의 말입니다.

”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책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나라 망할 짓들만 골라서 자행하는 놈들이 교활하게 목청만 높이는데 그 소리에 고개 끄덕이는 주권자들이 늘 과반(過半)에 육박하는 현실을 보면 그가 옳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른바 엘리트들의 타락이 비단 우리 한인들에게만 국한된 일도 아니거니와 그가 말하는 ‘국민적 사고방식’에 대한 자각의 역사가 일천함에 비한다면 그 변화의 속도는 빠르다는 낙천적 생각이 앞선 까닭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 때문이랍니다.

세월호 참사 일주년을 맞으며 삼배 일보의 느린 걸음이지만 쉼없이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이호진 부녀와 연대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 유가족들의 모습은 가히 지난 백여년 이래 처음 경험하는 자각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계약이란?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6

이스라엘의 희망은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의 시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유태인들을 괴롭혀온 참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최근사 아우슈비츠와 그 외의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근절되고, 탈출할 수 있는 모든 출구가 닫혀진 것처럼 보였던 나치 횡포의 무시무시한 시절까지도… (John Macquarrie  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

미쳐가는 나라, 미쳐가는 세상?

손님 – “그 뉴스 봤니?”

아내 – “무슨 뉴스?”

손님 –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난 거 말야.”

아내 – “음, 봤지요.”

손님 – “나라가 미쳐가고 있는 거 같아”

아내 – “……”

손님 – “차라리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어.”

아내 – “거제도로? 거기도 예전에 한국이 아닌데…”

손님 – “암튼,  미국은 미쳐가고 있어”

오늘 제 가게에서 한 손님과 제 아내가 나눈 대화랍니다.

Morris씨는 이제 제 가게 손님 가운데 유일한 한국전쟁 참전 용사입니다. 미군으로 복무하면서 한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손님들은 많지만 한국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분들은 최근 수년 이래 모두 이 세상을 떠났고 Morris씨만 남았답니다.

그는 여든 여섯 나이에 비해 아직 정정한 편입니다. 손수운전은 물론이거니와 지팡이 없이도 걸음걸이가 그리 무겁지 않답니다.

저희 부부가 아무리 바빠도 노인들 이야기는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열심히 하는 까닭은 그 나이때에 부모님들이 계시기 때문일겝니다.

Morris씨는 한국전쟁 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답니다. 그이가 겪었던 당시 포로수용소의 이야기들은 저희 부부가 듣는 그의 단골 레파토리이기도 합니다. Morris씨가 이름 석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제도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입니다.

그 Morris씨가 오늘 미국이 미쳐가고 있다며 분통을 터트린 까닭은South Carolina주 North Charleston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의 단속을 거부하고 도망가던 Walter Scott이라는 흑인의 등을 향해 8발의 총알을 쏘아 그를 죽인 백인 경찰 Michael Thomas Slager에 행위를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분노한 것입니다.

사건 발생 초기 정당방위라는경찰과 경찰당국의 주장은 한 시민이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하여 거짓으로 판명이 났고, 도망가는 피해자를 등뒤에서 정조준하여 살해한 것임이 드러난 일입니다.

아내로부터  Morris씨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백인인  Morris씨가 아닌 흑인인  Morrison 씨가 떠올랐답니다.

home-by-toni-morrison1Toni Morrison은  1993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녀는 지난 2012년에  “Home”이라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 소설에서 24살 청년으로 등장하는 주인공Frank Money는 제 가게 손님 Morris씨와 동년배인 흑인입니다.

Frank Money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합니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이  미국땅에서 흑인들이 겪어냈던 아픔 때문이었다고 작가  Toni Morrison은 이야기합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남부 조지아주 로터스 출신의 흑인 청년입니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 겪었던 일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의 경험이란 한 흑인 남자가 백인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훗날, 그렇게 생매장당한 흑인은 백인들의 놀이도구로 그렇게 죽게 된 사실을 알게됩니다.

백인들은 흑인 아버지와 아들을 싸우게 해놓고는 내기를 벌입니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말입니다. 그때 흑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죽이라고.” 흑인 아버지는 결국 생매장을 당합니다.

작가 Toni Morrison는 194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일고나고 있었던 미국의 원시적이고 병적인 인종차별 현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이런 병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단지 피부색이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누군가에는 심심풀이 놀이가 되고, 또 다른 누구가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노리개가 되어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던 세상을 “미쳐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없이 살아왔을 Morris씨가, 오늘날 공권력이란 힘을 빌어 도망가는 흑인 용의자의 등뒤를 향해 정조준하여 총알을 8발이나 발사한 백인 경찰을 보며 “미쳐가는 세상”이라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미쳐가는 것일까?” 아님 “그래도 나아지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 사이에서 하루를 보냈답니다.

Morris씨와 Morrison의 주인공 Frank가 겪여냈을 1950여년 그 전쟁통에서 일어났던  “국민방위군 사건”과  2015년 오늘  일주기를 맞이하는 “세월호참사 사건” 사이의 연계 역시 그선상에서 일어난 발상이랍니다.

두가지 사건 모두 무지, 무능, 탐욕이라는 공통점들이 있지만 사건을 겪어낸 가족들의 행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다름에서 희망을 보게된답니다.

무지, 무능, 탐욕의 바탕, 바탈까지 부끄럼없이 뻔뻔스럽게 드러내는 권력을 보면 “미쳐가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켜낸 꿋꿋한 지난 일년의 행태를 보노라면 “그래도 나아지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멋진 찬양 – 상상력

상상력구약성서에는 신인 야훼 하나님과 인간인 히브리(유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계약을 맺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러 계약이야기들 가운데 유명한 것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과 맺는 계약이야기와 다윗왕이 통일왕국을 이룬 후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계약이야기입니다.

이 두가지 계약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중심 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개의 계약이야기를 서로 상충 곧 부딪히는 개념이라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미국의 성서학자입니다.

그는 다윗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을 “왕권의식(Royal Consciousness)”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다윗, 솔로몬과 그 후의 왕과 제사장들 중심으로 축복이 이어져 나가는 믿음과 소망을 바탕으로 한 계약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좀 더 쉽게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이야기를 풀어 쓰자면 이런 말입니다.

잘 사는 게 축복인데 잘 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고 그 왕권은 바로 신이 부여해 준다는 계약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선민사상 곧 신에게 택함을 받은 백성인 유대족에게만 그런 왕권을 부여받은 메시아가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계약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이 이따금 벌이는 국제 무법자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개독교 소리를 듣는 오늘날 한인 교회나 신자들이 “예수 천당”이라며 ‘괴롭고 힘든 이 세상보다 천당가서 잘 살자’는 삐뚫어진 신앙을 외치는 일도 바로 이런 계약 정신이 한몫하고 있다는 해석이 따를 수 있답니다.

잘 사는 축복을 위해서라면 왕권이라는 신과의 중간 매개자가 필요하고 그 매개자가 억압과 착취를 하더라도 그 힘을 신에게 부여받았음으로 정당하다는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계약은 무조건적으로 신이 이스라엘에게(특히 왕권에게) 내려준다는 계약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는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모세와 신과의 계약정신 바탕에는 “대안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집트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준 하나님과 노예에서 해방이 된 히브리족과의 쌍방계약인 이 계약은 잘사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더불어 함께 먹고 사는데에 초점이 있다고 합니다.

잘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빌미로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매개자가 있는 계약이 아니라 올바른 정의와 공평이 강과 같이 흐르는 세상에 대한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런 모세와 하나님과의 맺은 형태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 특히 예언자적 상상력(Prophetic Imaginat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The Prophetic Imagin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이 왕권 의식에 의해 철저하게 공략당하고 흡수되어 버려서 대안적인 사고를 품을 용기나 능력까지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닌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성취에 앞서 상상력이 와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힘이 있지만,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기도하다. 어떤 것이든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바로 그 왕권 의식이 상상력을 억눌러 버린다. 상상력은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가를 두려워한다. 지배 현실에 도전하여 싸울 수 있는 수단으로써 마지막 남은 것이 시적 상상력이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바라보면서 2015년 오늘을 사는 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사람의 예수쟁이로서 떠올려 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입니다.

종말론적 삶을 강조하는 신 앞에서  예언자적 상상력은 사람이 그에게 화답하는 정말 멋진 찬양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의 이름들

부활의 아침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사건을 나에 대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고 믿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은 누구에게나 늘 열려있습니다.

다만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의 선언처럼  신의 용납(은혜와 은총)을 용납(받아드리는) 하는 것은 사람의 몫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아침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다섯 번째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의 노래소리에 귀 기울여지는 아침에.

성(聖)금요일 그리고 기억

성(聖)금요일, Good Friday 밤입니다.

예루살렘과 로마 권력, 그리고 당시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수난을 받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일을 기억하는 날, 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바로 이 날 밤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그의 죽음은 나와 인류의 속죄 제물이었다는 신앙고백이 시작된 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되는 밤입니다.

예수의 부활 곧 믿음 가운데서 일어날 나와 인류의 부활은 바로 오늘밤이라는 예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聖)금요일인 동시에 Good Friday입니다.

그리고 이천여년 전 이 날 밤 일어났던 일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해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유다인의 대사제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 가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 히브리서 13 : 11-13, 공동번역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음이 그가 수난과 고난을 겪었던 예루살렘 성안이 아닌 성밖에서 이루어진 것에 촛점을 맞추어 우리에게 그 죽음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이 성문밖에서 이루어졌다는 히브리서 기사의 해석은 오늘을 예수쟁이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명쾌한 삶의 해답을 줍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고자하는 삶을 살아가고저 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예수를 삶의 구세주로 믿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성문 밖에서 그리고 성문 밖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와같은 삶을 추구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39940_29753_918오늘자 기독교타임즈는 <교회협 세월호 침몰현장에서 눈물로 성금요일 예배>라는 제목으로 팽목항을 찾아 예배를 드린 교회협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말미에 이덕주 감신대 교수가 한 말들이랍니다.

“역사왜곡과 같은 역사적 실수가 반복되는 이유는 ‘기억’하지 않는데 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과 전망은 항상 같이 가야하며, 미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도 정확한 기억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비전을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현장에 참여한 이유 역시 아이들의 꿈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살아남은 우리는 이들의 비전을 이뤄야할 의무가 있다.”

“이제는 잊으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기억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는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2015년 성(聖)금요일밤, 제가 무교회주의를 주창하지 않는 희망이랍니다.

삭발(削髮)에

2015년 Good Friday를 하루 앞둔 날,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삭발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보았습니다.

뻔뻔스러움에 교활함까지 더한 모든 분야의 권력과 금력 앞에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삭발뿐이었던 이들의 눈물은 그저 아픔일 뿐입니다.

기독교력으로 Good Friday는 예수가 못박혀 죽은 날입니다. 그리고 사흘 후,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다는 믿음은 기독교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삭발은 불교의식일 뿐만 아니라 한때 카톨릭 사제들에게 이어져온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한인들에게 완전히 잊혀진 풍습이기는 하지만, 오랜 유교적 전통속에서 살아온 우리네 조상들에게 삭발은 곧 불효(不孝)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행위였습니다. 바로 살아있되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다만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면 삭발이 용인된 것이고, 이 때의 삭발이란 이제까지 괴로움이 넘쳐났던 사바세계의 자신을 죽이고, 이제는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서 괴로움이 없는 자기를 만나러 가기 위한 마지막 의식이었습니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도대체 한인이라는 공동체의 인자는 무엇일까?”, “3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그것도 대부분이 10대였던 아이들을, 사상최대의 구조작전을 편다는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인채 생수장을 시켜놓고, 일년이 다되도록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 벽앞에서 삭발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사진을 보며 읊조려보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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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삭발이 뻔뻔스러움에 교활함까지 더한 권력과 금력의 탐욕을 죽이고 끊는 일의 시작이기를.

그들의 삭발이 죽은듯이 사회적으로 매장된 것 같지만, 결국 사회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시작이기를.

그들의 삭발이 그들이 잃은 사랑하는 이들을 부활케하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삭발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우리 이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

말 잘하는 사람

00528025301_20150402소설가 최인호선생이 남기신 글 가운데 한토막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거짓말을 잘한다는 뜻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의 험담을 잘한다는 뜻이며,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첨을 잘한다는 뜻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간질을 잘 시킨다는 뜻이며 말을 잘한다는 뜻은 그만큼 뻔뻔하다는 뜻이다.”

그가 월간지 샘터에 연재되었던 ‘가족’시리즈를 책으로 엮어낸 두번 째 책이름은 <이웃>이었습니다. 그가 나이 쉰을 향해 달려가던 무렵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이 나와 가족을 넘어 이웃으로 확대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그는 평소 말이 많았던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말하기보다는 듣는”것의 중요성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말로 말 잘하는 사람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열심히 듣는 사람이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남의 말을 있는 그대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다. 대화란 결국 남의 의견을,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겸손하고 진지하게 듣는 행위인 것이다.”

들을 귀와 듣고자하는 마음은 없고, 오직 뻔뻔스럽게 나불내는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듯한 뉴스를 보면서 떠올려본 그에 대한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