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해외에서 살고있는 한인들 가운데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 주간입니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숫자나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아마 한반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세계에 퍼져사는 전체 한인인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만큼의 숫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외곽 Ambler에 있는 작은 교회당에서 모인 필라델피아모임도 그 중 하나랍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가까운 남부 뉴저지와 델라웨어주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수는 비록 고무줄 통계이기는 하기만 대충 4만명 정도로 가늠하곤 한답니다.
그 4만여명 가운데 약 50여명이 함께 한 모임이었답니다. 그야말로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랍니다.
숫자 생각을 하다보니 딱 대비되는 것이 있답니다. 한국시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시청앞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랍니다. 5만명 정도(주최측 추산)라고 하더군요.
오천만 가운데 오만, 사만 가운데 오십명. 얼추 비슷한 대비지요.
아마 전세계 동시추모대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 참여한 한인들은 그지역에 사시는 분들 숫자 대비 얼추 비슷한 정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막말로 한줌거리도 안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는 곳에서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운운하는 행사였답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추모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정말 무시해도 좋을만큼 적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우선 어제 있었던 필라델피아 행사를 잠시 소개드리지요.
조촐하지만 정성드려 차린 제단에 헌화를 하며 묵념을 하므로 “내가 왜 여기 와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자답(自答)을 얻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무용안무가 김정웅씨가 만든 세월호 참사 무용극과 추모단편 영화를 함께 보았답니다. 특별히 안무가 김정웅씨가 “이웃의 아픔을 온몸으로 듣고 가슴으로 공감하는” 몸동작을 생활화하자는 설명에 몸치인 저도 저절로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답니다.
여러 순서들 가운데 제 생각으로 이 날의 하일라이트는 손정례님의 춤입니다. 한풀이 춤이었답니다. 이 동네에서는 알려진 고수(鼓手)인 정세영선생의 장고와 추임새에 맟추어 풀어낸 손정례선생님의 춤사위는 단연 이 행사의 으뜸이었답니다.
그녀의 나이 올해 아흔이랍니다.
그리고…
참가한 이들이 저마다 모임에 참여하게 된 까닭과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 ‘제발 이젠 그만해라! 그거 왜 하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 왔습니다. 제 양심의 소리 때문에…”
“목사입니다. 목사여서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럽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살고자 합니다.”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제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이런 모임에 함께하지 않고는 우리 아이들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늘 떠나온 모국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모임을 주관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린 늘 소수여서 마음이 아픔니다.”
“왜? 우리는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게 아픔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 한인들의 미래가 고난에 빠질까봐, 행여라도 단절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소수라는 절박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소수” – 바로 우리들은 적은 숫자라는 데에서 희망을 본 것이랍니다.
무릇 역사란 소수의 사람들이 이웃사람들을 생각하며 확장시켜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당해야만 했던 모든 아픔과 수모와 천덕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그 힘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에서 온답니다.
그 “기쁨”은 바로 소수만이 누리는 축복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