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05

 

더딘 걸음으로 오던 봄이

잠시

앞뜰에서 쉬어간답니다.

 

2015년 4월 30일

봄이 전해주는

이런저런

아리기만한 세상소식들에

쓰린 맘 다스리며

곧 떠날

봄에게 한 잔.

 

그 봄이 따라주는

내 잔은 쌍 잔.

나 비록 여기 살아도…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7월 27일 일본 도쿄에서 미국 육군성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인 윌리엄 테프트(William Howard Taft)와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눕니다.

그 밀담이 공개된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뒤인 1924년의 일입니다.

이른바 가쓰라-데프트 조약(Taft–Katsura Agreement)입니다.

당시 가쓰라가 한 말 가운데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이는 일본에 실로 중대한 문제”

  “만약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한국에 맡긴다면 한국은 또다시 다른 국가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재발시킬 것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종의 확실한(definite)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1904년 에서 1905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와 일본과의 전쟁은 한국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문제는 바로 한국에게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게 외교권(주권)을 쥐어주면 또 다시 이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이 참에 확실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화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상호 날인란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곧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 당시 세계에서 제일 먼저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IE001825061_STD그로부터 11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미국과 일본 바라기로 사는 대한민국의 엘리트에게는 이번 아베 신조 일본 수상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합의한 미일방위협력 지침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한 일일 터이고, 그 때나 지금이나 미일 양국은 대한민국 주권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거품을 물겠지만, 머지않은 날에 일본 자위대 제복을 입은 아이들이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비단 나 혼자뿐일까?라는 생각으로…

답답한 밤

볼티모아(Baltimore)는 제가 사는 곳에서 시속  70마일로 달려 한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오늘 폭동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주리주 Ferguson 에서 일어났던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소년 사살 사건 이후 계속되어온 유사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흑인청년 Freddie Gray 장례식이 있었던 오늘 오전, 장례식 이후의 일어난 항의 시위대들이 폭도로 변해 상가를 탈취하고 경찰 차량등을 불태우는폭동으로 번졌다는 소식입니다.

각종 온라인 뉴스들은 실시간 영상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실시간 영상들을 보면서 더 끔직한 뉴스가 눈에 들어왔답니다.

미국을 방문중인 일본 수상 아베 일행들과미 행정부가  1997년 미일 양국 사이에 맺었던   “미일 방위협력 지침(The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 에서 한층 강화된 새로운 협력지침 가이드라인에 상호합의했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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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합의에 양국 모두 환영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일본군(자위대)이 함께 갈 수 있고, 일본군(자위대)이 작전하는 곳은 미군이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랍니다.

70년 전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였던 두 적국들이 탄탄한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차대전 이후 미국의 점령지였던 일본은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체결되고 발효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1951년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거하여  미군 점령지역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미국의 영향 속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안보법 체계를 구축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패권에 힘이 딸리는 미국을 등에 업고 옛날의 영화를 다시 누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찬찬히 들여볼 일입니다만, 오늘의 뉴스를 보자니 남한은 일본과 미국에 북한은 중국에 가일층 종속으로 달려가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답답한 밤입니다.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사 – 헤리만의 교훈

미국방문길에 오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는 29일 미국 상하원에서 행할 연설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여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으면서 적대적으로 승전국과 패전국 관계였던 미일 양국이 이제는 상호 돈독한 우방이 되어 만나는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관점은 바로 “과거사 문제” 입니다.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각종 만행을 인정하고 그 국가 행위에 대한 사죄와 사과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제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미일 양국이 눈앞에 놓인 중국을 향한 동맹관계와 경제 동반자로써의 상호 이해관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국이야 자기나라의 이해와 아시아 종주국으로써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계속 꺼집어 내겠지만, 어정쩡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대한민국이 아닐까합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뉴스를 보면서, 미일 양국과 특히 대한민국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인물 한사람을 소개해 볼까합니다.

William_Averell_Harriman에버렐 헤리만(William Averell Harriman, 1891-1986)입니다. 그는 살아생전 미국 외교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자(賢者, The  Wise Men)”로 불리었던 사람입니다.

헤리만의 아버지는 조선과 만주의 철도건설을 도맡았던 대재벌이었고, 헤리만 자신은 투르먼(Truman) 대통령 아래에서 상무장관,  48대 뉴욕 주지사,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또한 은행업을 비롯한 투자, 부동산업 등에서도 성공을 거둔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비롯한 동시대의 한국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그가 베트남전쟁 말기에 미국과 월맹 사이에 있었던 휴전협정에서 미국 수석대표를 지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1969년, 그가  휴전협정 수석 대표직을 사임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남긴 말은  2015년 오늘 미일 양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인들이 한번 곱씹어도 좋은 명언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월맹(북베트남)이나 월남(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거 프랑스 식민에 식민권력에 앞장섰거나 협력한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식민정권의 권력이나 행정 그리고 군대에 대항해서 민족해방과 독립투쟁을 평생 동안 해온 사람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월남(남베트남)의 정부, 군대, 종교,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지도층 인물들은 해방후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에 프랑스 식민권력의 관리였거나 군대의 장교 또는 하사관으로서 자기 동포와 적대적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남북베트남의 대중들이 어느 쪽을 더 존경하고 신뢰할 것인가? 어느 쪽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베트남의 재중과 민족을 위해 행동할 것인가? 이에대한 답변은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 전쟁은 이미 진 전쟁”이라고 선언합니다.

역사란 과거사와 오늘과 미래사가 단절되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가 곧 현재사이자 미래사가 된다는 충고입니다.

아베 신조의 방미 행보를 보면서 곱씹어도 좋을 헤리만의 교훈입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에 대하여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일곱번 째

7-YoungKim“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이 찾아가고 있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이르는 첫 번 째 핵심 열쇠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의 드러남과 나나 우리가 그를 만나고 아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나나 당신에게 나타셨는가?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모세는 직접 사람의 말을 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모세에 후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들에게 나타났던 신 야훼는 스스로 드러내셨던 분입니다. 비록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무리들이 때론 의심하고, 불신을 드러내긴 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가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을 보냈습니다. 그런 고백들을 쉬지 않기도 했습니다.

사사시대 이후의 야훼 하나님의 드러남 곧 계시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직접 신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꿈이나 어떤 징후로 사람과 만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선생이 주는 교훈

l_2015042401003950000316611오늘 뉴스들을 훓어보다가 눈에 들어 온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10년 만에 신간 <담론>(돌베개)을 출간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74)를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가 했다는 말을 여러번 곱씹어 봅니다.

“통일을 대박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경제주의적 발상입니다.

사실 통일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 과정에서 우리의 주체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결국 사드는 배치하게 될 것이고 한·일 정상회담도 하게 될 것이라 봅니다. 그만큼 국가적 장래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결정 내릴 수 있는 자주성이 없지 않습니까.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동북아의 정치질서를 결정하고 남과 북이 발언권을 쥐는 것은 작습니다.

한반도의 오래된 민족사적 과제죠. 문제는 지도자, 정치인들이 역사적 의식이 없고 민족사적 관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뿌리를 잘 펴는 정본(政本)입니다. 그 뿌리는 사람입니다. 즉, 사람을 인간답게 키워내고 그들이 지닌 창의성·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 실천이 정치인데 오히려 정권 획득과 재생산이 전부라고 아는 천민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IMF, 2008년 금융위기 등 위기에 처했지만 그 역사적 계기를 성찰로까지 이끌지 못했습니다. 미봉책에만 급급했지요.

인간의 삶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사고가 얕습니다.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깊이 있게 천착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것이 커져야 합니다.

최근 인문학적 관심이 고조되고 우리 삶에 대한 성찰성이 사회 일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곳곳에 그런 작은 숲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간다면 사회적 변화의 역량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으로.

표심(票心) 그리고 어떤 대통령

한곳에서 오래 장사를 하다보니 단골손님들의 세대가 바뀌어 갑니다. 아주 오래 전 단골들 가운데는 세상 뜨신 분들도 많거니와, 오랜 단골 손님들은 이제 거의 은퇴를 했거나 준비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젠 결혼한 아들 딸들의 옷을 들고 손주들과 함께 가게를 들어서는 손님들도 제법 된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것이지요.

그 세월 덕에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지내는 손님들이 제법 된답니다. 특히 장성한 아이들 이야기와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메뉴랍니다.

반면에 웬만해서는 꺼려하며 꺼내지 않는 이야기 주제도 있답니다. 바로 정치  이야기입니다. 종종 이런 주제의 화제를 꺼네는 손님들도 있지만 제가 좀 피하는 편이랍니다. 구태여 꺼내서 제게 득될 것이 없다는 장사속도 있겠지만 자칫 논쟁의 빌미를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제가 사는 곳은 비교적 민주당세가 강한 곳이어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은 늘 민주당 몫이랍니다. 그러나 아주 보수적인 측면이 강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손님들의 약 80%가 백인 중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제 또래 손님들은 아주 보수성향이 강하답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손님들이나 저나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면서 웃던 정치인이 한사람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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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기억하실만한 이름입니다. 바로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입니다. 2008년에 있었던 제 44대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인물입니다.(페일린이 방한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그녀의 사진을 검색하다 안 일이랍니다.)

당시 제 가게 손님들이 그녀에 대해 했던 말들이 아직도 기억난답니다.

“그 여자는 하와이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이름인줄 알걸!”, “아마 그 여자가 너를 보면 북한에서 왔다고 할걸!”, “영어 알파벳을 다 쓸줄이나 알까 모르지?” 등등 이었답니다.

무지, 무식에 뻔뻔함의 대명사처럼 그녀의 이름이 회자되곤 했었답니다.

당시 공화당에서는 비교적 고령인 72살의 존 매케인(John Sidney McCain III)이 대통령후보였고, 민주당 오바마 현 대통령이 후보였지요. 민주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쏠렸던 표심 특히 여성표심을 좀 잡아보겠다고 공화당이 내민 깜작 카드였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답니다.

그녀가 낙선한 선거 이후에도 한때 제법 메스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준 이른바 “티파티(Tea party)”라고 하는 극우 강경파 때문이었답니다.

이 티파티라고 지칭되는 공화당네 극우 강경파들은 오바마라고 하면 거의 치를 떠는 수준이랍니다. 특히 오바마가 내세운 의료개혁법안인 오바마케어는 나라 망치는 주범으로 여긴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답니다.

저희 가게 손님들 가운데 페일린을 비웃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바마케어에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네들은 공화당내 강경보스 그룹인 티파티 세력이나 운동에는 비판적이랍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에 필적할만한 티타티(Tea party) 그룹의 샛별이었던 여성 정치인이 있었답니다. 크리스틴 오도넬(Christine Therese O’Donnell)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오바마대통령의 러닝 메이드로 부통령이 된 이 곳 출신 상원이었던 Joe Biden의 의원자리를 놓고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답니다. 그때 그녀의 뒷배경이 된 것은 극우 보수 강경세력인 타파티와 극우 방송매체인 Fox News였답니다. 그녀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었답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Chris Coons에게 57% 와 40%라는 현격한 차이로 상원의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답니다.

오바마케어라는 의료개혁법으로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 법안을 빌미로 한 극우 강경세력도 반대하는 이곳 표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이득과 손실에는 민감하지만 극우나 극좌의 강경한 변화에는 거부감을 나타내는 표심의 일반적인 현상은 아마 제가 사는 동네에 국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티파티를 등에 업고 오는 2016년 대선 공화당 후보로 나선 테드 크루즈(Rafael Edward Ted Cruz)가 어떤 결과를 얻을지도 궁금하거니와,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과 참 흡사하다는 느낌을 같는 얼굴마담이 통치하는 어느 나라가 겹지기도해서 몇자 적어보는 것인데….

2008년 선거에서 공화당원조차 메케인과 페일린조에게 표를 던지지 못했던 까닭으로 고령의 메케인이 사고를 당했을 경우 페일린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도저히 못봐준다는 심리가 작동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답니다.

자기나라 말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듯한 대통령을 보면서 든 생각들이랍니다.

작은 바램 – 시대정신

지난  12일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공개했던  동영상입니다.

”Everyday Americans need a champion, and I want to be that champion.” 평범한 미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챔피온이 되겠다며 다음 대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직장으로  돌아가는 엄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아시아계 젊은이, 사업을 시작하는  두  이민자 형제,  결혼을  앞둔  동성연애자  등  그야말로 평범하고 소수자들을 내세운  동영상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을  강조했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영상입니다.

“힐러리 클린턴” – 그녀가 살아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녀는 평범한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명문 사립대인 웨슬리여자대학, 예일대학교 로스쿨 출신에 변호사, 주지사, 대통령 영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 등을 거쳐온 그녀의 삶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가족만해도 그렇습니다. 그녀의 대선가도에서 가장 큰 장애물들 중 하나로 꼽히는 남편 빌 클린턴의 유명한 외도 사건과 두 부부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그녀가 내새우는 핵심가치인 “가족”이라는 명제에서 별로 점수를 얻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그렇게본다면 힐러리 클린턴과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는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캠프는 그 두가지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캠프가 표를 얻기위해 공략해야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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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미국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행사권을 결정하는 국가의 모든 정치인들은 선거를 앞둔 주민들의 관심사를 공략하기 마련입니다. 힐러리 클리턴이 내세운 이미지 광고에서 시작하여 각종 공약들이 그런 촛점에 맞추어 생산되어지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클린턴이 당선되었다고 친다면 그녀와 그녀의 행정부가 ‘평범한 사람들’과 ‘가족’에 촛점을 맞추고 권력을 행사하는지를 가늠하고 판단하고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몫은 바로 그렇게 선택한 시민들의 것입니다.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도를 측정해내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런점에서 대한민국 보다는 좀 나은편에 속하지만 미국 역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랍니다.

내세운 정책들과 내세운 정책들의 수행능력을 “한표 행사의 권력”을 누리는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미지와 상징조작에 속아 던져 놓고는 잊고사는 주권자들이 넘치는 사회는 갈 길이 멀기만 한 것이지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거의 모든 정책공약들이 거짓으로 판명난 대통령과 그 정권이 여전히 40%대의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는 한국 뉴스들을 볼 때면 참 남감한 생각이 들곤한답니다.

“경제”, “민생”이라는 화두는 언제 어느 나라 선거에서건 중요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그 명제에 그 시대 그 곳에 사는 주권자들의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않는한 허망한 것입니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지금 필요한 시대정신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한 이민자로서 내게 주어진 한표의 행사 권리를 놓고 늘 꼼꼼히 따지려 애쓰는 것은 바로 이 땅 미국과 내 영원한 모국 대한민국이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때문이랍니다.

소수라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해외에서 살고있는 한인들 가운데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 주간입니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숫자나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아마 한반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세계에 퍼져사는 전체 한인인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만큼의 숫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외곽 Ambler에 있는 작은 교회당에서 모인 필라델피아모임도 그 중 하나랍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가까운 남부 뉴저지와 델라웨어주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수는  비록 고무줄 통계이기는 하기만 대충 4만명 정도로 가늠하곤 한답니다.

그 4만여명 가운데 약 50여명이 함께 한 모임이었답니다. 그야말로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랍니다.

 숫자 생각을 하다보니 딱 대비되는 것이 있답니다. 한국시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시청앞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랍니다. 5만명 정도(주최측 추산)라고 하더군요.

오천만 가운데 오만, 사만 가운데 오십명. 얼추 비슷한 대비지요.

아마 전세계 동시추모대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  참여한 한인들은 그지역에 사시는 분들 숫자 대비 얼추 비슷한 정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막말로 한줌거리도 안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는 곳에서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운운하는 행사였답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추모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정말 무시해도 좋을만큼 적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우선 어제 있었던 필라델피아 행사를 잠시 소개드리지요.

조촐하지만 정성드려 차린 제단에 헌화를 하며 묵념을 하므로 “내가 왜 여기 와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자답(自答)을 얻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무용안무가 김정웅씨가 만든 세월호 참사 무용극과 추모단편 영화를 함께 보았답니다. 특별히 안무가 김정웅씨가 “이웃의 아픔을 온몸으로 듣고  가슴으로 공감하는” 몸동작을 생활화하자는 설명에  몸치인 저도 저절로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답니다.

여러 순서들 가운데 제 생각으로 이 날의 하일라이트는 손정례님의 춤입니다. 한풀이 춤이었답니다. 이 동네에서는 알려진 고수(鼓手)인 정세영선생의 장고와 추임새에 맟추어 풀어낸 손정례선생님의 춤사위는 단연 이 행사의 으뜸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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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이 올해 아흔이랍니다.

그리고…

참가한 이들이 저마다 모임에 참여하게 된 까닭과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 ‘제발 이젠 그만해라! 그거 왜 하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 왔습니다. 제 양심의 소리 때문에…”

“목사입니다. 목사여서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럽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살고자 합니다.”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제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이런 모임에 함께하지 않고는 우리 아이들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늘 떠나온 모국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모임을 주관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린 늘 소수여서 마음이 아픔니다.”

“왜? 우리는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게 아픔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 한인들의 미래가 고난에 빠질까봐, 행여라도 단절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소수라는 절박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소수” – 바로 우리들은 적은 숫자라는 데에서 희망을 본 것이랍니다.

무릇 역사란 소수의 사람들이 이웃사람들을 생각하며 확장시켜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당해야만 했던 모든 아픔과 수모와 천덕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그 힘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에서 온답니다.

그 “기쁨”은 바로 소수만이 누리는 축복이랍니다.

이제 초상(初喪)입니다.

sewol22“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침몰후 바다속으로 잠겨가는 배안에서 열일곱살 사내아이가 외쳤던  절규입니다. 고등학교 이학년이었던 김동혁군의 꿈은 그렇게 그의 절규와 함께 수장(水葬)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던 305명 가운데 살아 뭍으로 돌아온 사람은 단 사람도 없습니다. 그 중 아홉명은 아직도 바다속에서 잠겨있건만 벌써 일년이 흘렀습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고난 후 일년이 지나면 소상(小祥)이라는 의례를 치루었습니다. 소상이라고 말할 때 쓰이는 상(祥)은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 상(喪)이 아니라 상서롭다는 뜻의 상자를 썻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되었으니 이제 슬퍼하는 마음을 잊고 좋은 계절을 맞으라는 뜻입니다. 슬픔에 겨워 식음을 전폐하던 세월을 접고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맞으라는 뜻의 의례였습니다. 물론 이제는 거의 잊혀진 옛풍습일 뿐입니다.

이미 옛것이 되어 모두에게 잊혀진 이 풍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과 기둥이자 삶의 의미였던 가족들을 잃고 난 일년맞이가 그들에겐 다시 초상(初喪)이 되었습니다.

2015년 4월 16일을 맞이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가족들은 다시 상복을 입고 삭발을 했습니다. 슬픔을 잊는 때가 아니라 슬픔에 아픔을 더하는 일년맞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봄이 흐드러진 제주의 풍광 대신 진도 앞바다 추운 겨울보다 차디찬 바다물 속으로 잠겨가며 외쳤던 김동혁군의 절규는 2015년 4월 16일 그의 어머니 김성실님의 소리가 되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상규명을 할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나같이 다하는 이야기는 추모와 기억 뿐이다.”

2015년 4월 16일, 여기 필라델피아에서는 김동혁군과 305명의 넋을 추모하지 않으려합니다. 아직 그들이 소리치며 절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그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직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늘 삼보일배의 느린 걸음으로 광화문광장으로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아버지들과 누이들과 함께, 오늘도 봄이 가득한 안산과 광화문광장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꿈으로 사는 어머니들과 오라비들와 함께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지 않으려합니다.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 단 한사람이 남더라도 외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돌이 되어 외칠 것입니다. 끝까지 단 한사람만이라도 남아 있기만 하다면 그 순간까지 부디 우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기억해 주십시요. 그것만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 바램으로 여기 필라델피아까지 우리들이 온 까닭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 잊지못할 당부를 남겨놓고 다시 상복을 차려입은 김동혁군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 곧 잊어버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아픔과 슬픔의 진실 규명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온몸, 온힘을 다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꿈을 위하여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이 까맣게 타토록 절규했던 넋들을 기리는 일은 바로 이제부터 우리들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 4월 16일, 이제 초상입니다.

416 참사 1주기 전세계 해외동포 동시 추모 집회 from SESAMO on Vim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