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씨 – “그 소식 들으셨어요? 아, 글쎄 아무개가 알고보니 이런저런 사람이래요”
ㄴ씨 – “에이 설마요? 그 사람이 아무렴 그럴까요? 잘못 들으셨겠지?”
ㄱ씨 – “아니 뉴스에 나왔다니까요. 신문, 방송 할 것없이 다 나왔어요. 그게 사실이래요.”
ㄴ씨 – “그래요? 뉴스에 나왔어요. 그럼 뭐….”
일테면 이런 대화를 나누었거나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이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물론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은 진실일 수도 있다. 다만 이 때의 진실은 누군가의 주관적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을 객관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많은 이들이 “뉴스는 진실보도를 해야한다”는 말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말 속에 진실이란 <객관적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엄밀한 뜻에서 객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백명이 있다고 할 때 그 백명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지난 해 4월 16일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 300일 째 되는 날이다.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실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라는 여객선이 바다 속에 잠기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뉴스로 넘어오면서 진실은 여러가지로 갈린다. 날씨가 나쁜 탓에 일어난 단순 해상 사고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국가가 일으킨 집단 생수장 사건이라고 믿는 사람들까지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의 차이는 현격하다. 때론 물리적인 사실 조차 주관적 해석이 난무하기도 한다.
이쯤 독일이 낳은 위대한 신문학자인 에밀 도피파트(Emil Dovifat)가 그의 고전적인 저서 <신문학(新聞學)>에서 한 말을 곱씹어본다. “뉴스란 ‘알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주관을 통해 흐르며 이와 같은 전달자의 주관적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에밀 도피파트(Emil Dovifat)는 우리들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명확하게 짚어 알려준다. 바로 우리들이 이른바 뉴스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관이 개입된 주관적 사실이라는 말이다.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죤 나아가 이즈음 유행인 각종 SNS(Social Network Service)망의 정보들이 전하는 뉴스들이란 객관적 진실이 없다는 주장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죄송하지만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뿐이다.
그럼으로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넘쳐나는 뉴스들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생각부터 버려야만 한다. 특히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에 대한 뉴스들은 접하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뉴스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어떤 뜻”이 담긴 주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 들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필라델피아 인근지역에 살며 알음알음으로 뜻이 엇비슷한 이들이 모여 소식지 “희망”을 세상에 던지게 되었다.
지난 십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보유통 기술 발달로 인하여 이젠 모국(母國)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동포라는 가름이 거의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적어도 정보에 관한한 동일한 공간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젠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어를 제일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희망”지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는 뉴스들이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전하고 싶은 주관적 진실”임을 알리되, 그 “누군가”의 실체를 알려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 바른 판단을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이달 말경에 필라델피아 인근에 배포할 예정으로 시작하는 소식지 월간“희망”에 보낸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