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주일 아침, 제 이메일함에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한인들 가운데, 지난해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잊지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까?”라는 물음을 줄기차게 던지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이들이 오는 3월초에 세월호 유가족들 두 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간담회를 개최한다는 내용과 그 간담회를 위한 준비사항들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성원을 보낼 뿐 이런 저런 핑계로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이 글을 씁니다.
육년 전인 2009년 1월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뉴스를 전하는 화면에서는 엄청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즈음 날이 새면 터지는 IS(이슬람 국가)의 만행에 버금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시간 2009년 1월 20일 아침 7시20분, 대한민국 서울 용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크레인에 실린 컨테이너 박스안에 있는 경찰 특공대들이 망루 양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망루 틈이 벌어지고, 불기둥이 망루 아래로부터 솟구쳤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망루 전체로 퍼지며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군가가 외쳤다는 소리입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
애타는 맘으로 외쳤을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라는 절규를 육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열달 전인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앞바다, 바닷물 속으로 잠겨가는 여객선 세월호에 울려 퍼지던 소리 “가만히 있으라” – 그렇게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015년 2월, 오늘 우리들 귀에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바로 “그만 하라!”입니다. “제발 지겹다. 이젠 좀 그만 하라.”는 소리 말입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뜻만 있었다면 충분히 살릴 수도 있었던 생때같은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사람이….”를 외치는 이들에게 “가만 있으라!”라고 외치는 자들 “이젠 지겨우니 그만 하라”고 외치는 자들의 목청만 높아가는 세월입니다.
성서 마가복음의 기자인 마가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복음 1장 14-15절, 개역개정본>
갈릴리에서 일하던 요한이 잡혀 죽음에 이르게 되자 예수는 갈릴리로 나가 그의 일을 시작했다고 마가는 전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 마가복음 16장 7절, 개역개정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갈릴리로 간다는 마가의 전언으로 사실상 마가의 예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갈릴리” – 예수가 나아갔던 곳이고 일했던 곳이고 다시 살아나 달려간 곳입니다.
예수가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기전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 패거리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 마가복음 14장 70절)”
“갈릴리 사람이니 너 또한 한 패거리지?”라는 물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같지 않으신지요?
“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는 외침을 불온하고 불순하다고 낙인찍으며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외치는 자들을 향해 나아갔던 이, 바로 예수라는 믿음이 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2015년 오늘 “가만 있어라!”, “이젠 그만 하라!”고 강압하는 자들을 향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는 곳, 갈릴리에 예수가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매운 바람소리 온종일 그치지 않는 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에서 전해 온 소식 가운데 만난 예수랍니다.
‘우리가 텍스트(성서)에 말을 걸기까지는 텍스트(성서)는 결코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텍스트(성서)는 우리 자신의 언어로 대답한다. 그것이 사회학적인 언어이든 신학적인 언어이든지간에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대답은 새로운 자료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새로운 물음으로부터 나온다.” – John Goodrich Gager(전 프린스톤대학 종교학 교수)가 쓴 <우리들은 적들과 손잡을 것인가? 사회학과 신약성서 (Shall we marry our enemies? Sociology and the New Tastament)>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