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 임금이 한번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하나 구해 오거라.”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구해서 왕에게로 가져왔다. 그것은 왕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였다. 솔로몬왕은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자세히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기, 그 반지 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까지도 다 지나가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다. 이제는 실패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 홍길복목사가 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에서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내 나이 젊어 한 때 많은 선배와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예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처럼 사노라”고 확언하기도 했고, “예수처럼 살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나도 이제 환갑, 진갑을 지나니 그이들은 칠순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쳤던” 그이들이 오늘도 여전히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거나 아는 이들의 전언을 통해서 또는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전한 그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들은 마치 전혀 변함없이 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말했던 “예수”와 지금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 그들에게 들었던 예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체제(體制)안에 안주하며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여전히 외치는 것은 변함 없으되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35년만에 만난 선생님 홍길복목사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그는 여전히 “떠남과 움직임은 아브라함 이후 성경의 전통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움직이시는 하나님(The Moving God, The Mobile God)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고 외치고 있었다.
홍목사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35년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남기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자인하는 까닭으로 두가지를 든다. ‘신학적 실패’와 ‘인간적 실패’가 바로 그것들이다.
두가지 모두, 그가 청년 시절에 외쳤던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과 달리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었던 일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패’란 잘못된 목회 목표 설정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자리인 “호주 이민의 삶”에 두발을 딛지 않고 “한국적 상황 – 일테면 한국의 민주화, 인권 문제, 조국 통일과 평화문제 등”을 그대로 안고 고민하는 일에 빠져서 실제 빵과 기쁨을 함께 나누워야 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이민 초기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는 자신도 한때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던 일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그 역시 “교회 성장이라는 권력욕과 물질욕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탐욕”에 빠졌었던 일을 고백하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 버린 지난 날 나의 목회에 대한 슬프고 아픈 참회”라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가 두번 째로 꼽는 ‘인간적 실패’란 사랑의 실패를 고백함이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에게 사랑의 실패란 곧 성서이해의 실패이며 예수신앙의 실패였다. 그의 고백이다.
<지난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라고 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까지도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진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성장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머릿수가 그득한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자니 찜찜하고 안 다니자니 딱히 다른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만 얻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한 홍목사는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감사”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렇게 실패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아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넘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그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그리보여도 “움직이는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평생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한결같으신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축복이요, 감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