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과 한국교회

대한민국 전 대통령 이명박이 출간한다는 회고록에 대한 뉴스들이 넘쳐납니다. 그에 관한 뉴스의 분량보다 몇 수십 또는 수백 아니 수만가지 보고 듣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느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숱하게 다른 느낌들 가운데 하나, 바로 제 생각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델라웨어주에는 델라웨어 대학이 있습니다. 해마다 이 대학교에 수십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학교수들과 공무원 또는 정치인 등이 교환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석, 박사 과정으로 짧게는 일년에서 수년 동안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한국에 돌아간 그들은 정, 관, 학계를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나름 중추 역할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장차관, 국회의원, 대학총장 등을 위시해 제법 이름 꽤나 파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가 수인사를 나누었거나 밥 한끼, 술 한잔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 교회를 통해 만난 이들입니다.

델라웨어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로드 아일랜드 다음으로 두번 째로 작은 주이고, 델라웨어대학은 (참 무의미한 짓이지만) 미 전국 대학순위로 따져 60-70위 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그나마 지금의 부통령인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의 모교로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미국 촌구석에 있는 대학에 왔다간 사람들을 위시해 이른바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부터 미 전역, 각 대학에 해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연구원, 교환교수 또는 석박사 과정으로 이 땅에서 머물다 한국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수많이 이들이 한국사회의 중추 역할들을 했거나, 하거나, 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교회를 통해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몇곱이나 많은 이곳 이민자들과 영주자 또는 방문자들과 교류를 나누거나 연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비단 이곳 미국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영국, 동서 유럽, 중동, 러시아, 중국, 일본, 호주,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이젠 쉽게 볼 수 일들입니다.

한국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제반 분야에서부터 사기꾼, 도둑놈 등의 범죄자들에 이르기 까지) 가운데는 해외에 있는 교회를 통해 얼기설기한 연을 맺고 있다는 말씀이고, 그 고리는 단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생김새가 비슷하다기 보다는 같은 언어 곧 한글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 동포를 가름하는 일이 이젠 거의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점입니다. 게다가 ‘웨이보’가 중국을 대표하듯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써도 한글을 이용하고 카톡을 쓰며 대용으로 텔레그램을 써도 한글로 쓰는 이들만의 세상에서는 한반도와 전세계란 지역적 나눔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로 존재하는 곳이 바로 한인교회입니다.

한인교회란 한국내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한글을 사용하는 교회를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올해는 조국 광복(해방- 이런 똑같은 하나의 현상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써야만 하는 세월이) 70주년되는 해입니다.

이런 때에 이명박과 그의 회고록이 뉴스의 헤드를 장식하면서 든 생각이란 바로 지난 70년 동안 한글을 쓰는 사람들이 믿는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 낸 죄의 결과물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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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델라웨어 대학에서 잠시 머물던 이들 가운데 서울대 김종욱교수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 이의 말로 이 글을 접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명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나 울분이 치솟는다. 몇몇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고, 다른 생명과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복원할 수조차 어렵게 만들어 놨다. 다 돈 때문이다. 뭐 그럴싸한 이유를 덮어씌우는데, 실상은 돈에 눈이 멀어서 일어난 일이다.

4대강 사업은 사기다. 전 국토를 이렇게 졸속으로 파헤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서는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있다고 세계를 상대로도 거짓말했다. 그런 엉터리 거짓말로 상도 많이 받았다. 이런 사람이 교회의 장로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패했으면 이런 장로를 배출했을까.

한반도 대운하 얘기 나오고 4대강 사업 진행할 때 목사들이 칭송 많이 했다. 성경적이라든지 문명사적이라든지 무슨 거창한 말 갖다 붙이고. 조금만 살펴보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그걸 믿는 사람들을 보면 참…. 사기꾼들 보면 욕심 많은 사람을 이용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물욕이 많기 때문에 사기꾼의 술수에 넘어간다고 본다. 교회가 물욕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용도 살펴보지 않고 4대강 사업이 좋은 거라고 떠들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도 장로 대통령이라고, 잘못이 있어도 지적하면 안 된다고 두둔한 게 교회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잘 봐야 한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했다. 식민지이기는 했어도 헤롯은 어쨌든 당시 유대인들의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초대교회는 절대 권력자들을 떠받들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한 것과 같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는 안 된다. 권세에 따르라는 성경 말씀은 권력에 굽신굽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족 : 문제는  이명박 뿐이 아니라 한인교회마다 차고 넘치는 이명박 아바타들.

70주년의 차이

메르켈  독일 총리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며 아우슈비츠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일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다.> –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한 말.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70년 전, 우리 민족 모두는 하나된 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함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광복을 기다리던 그 때의 간절함으로 이제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문에서

무릇 역사란 돌아보는 자들의 몫입니다. 그 몫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마련이고요.

나치는 독일이었다는 고백으로 미래를 맞는 공동체와 반민족 친일분자였던 조상을 독립투쟁가로 둔갑시켜 우상화하며 미래를 여는 공동체의 차이.

역사란 오늘을 사는 이들의 고백이지요.

분단을 극복한 공동체와 분단에 얽매인 공동체의 결정적 차이일 겝니다.

70주년을 해석하는 차이 말입니다.

과거에 (해방에 대한)간절함이 애초 없었던 이들이 말하는 (통일에 대한)미래란 그저 공허할 뿐이고요.

겨울, 빙판 운전 요령

Charlie는 거의 말수가 없는 제 가게 손님입니다. 그런데 어제 장문의 이메일을 제게 보냈습니다. 제가 매주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제가 지지난 일요일에 뉴욕을 올라가면서 빙판길 운전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겨울철 빙판길 운전의 베테랑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요령을 설명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겨울철 빙판길 운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Charlie 편지의 번역과 원문 그리고 제가 보낸 편지의 번역과 원문입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 시간에도 제가 사는 곳에는 눈이 내리고 길은 빙판이랍니다.

drive on ice

Young에게

지난 주에 사고없이 뉴욕시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은 침착하게 (운전에)집중할 수 있는 당신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나는 버팔로 지역에서 29년간 살았고, 내 어머님께서 내가 15살 되던 해, 영하의 온도에서 2-3인치 두께의 거울 같은 얼음으로 완전히 뒤덮힌 우리가 살던 (공공이 아닌) 도로에서 내게 첫 번째 운전교습을 시켜주셨다.

이 (교습)초대에 대해 어머님을 쳐다보는 내 눈길에 대한 대답으로 어머님께서는 “만일 네가 거울 같은 얼음에서 운전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나 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가자!” 라고 하셨었다.

그래서 나는 8기통 엔진이 장착된 5,000 파운드가 넘는 닷지 세단 운전석에 앉았고, 가속 페달을 빨리 밟고 떼는 것은 아주 좋지않다는 사실과 브레이크 페달은 거울 같은 얼음에서는 단지 미끄러지게 만드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바로 배웠다.

뉴잉글랜드 인근 언덕이 많은 농장지역에서 성장하셔서, 어머님은 겨울에 아버님 보다 겨울 운전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든 기상 상황에서도) 기술이 더 뛰어나셨고, 내게 우리 도로에서 가속시켜 올라가고, 진입로(driveway) 끝에 도달할 때 차를 옆으로 미끌어지게 하며, 그리고 나서 가속 페달과 핸들을 사용해서 진입로로 빨리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11월과 12월에 우리 집에서 진입로 끝까지 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그 이후 나머지 겨울 동안은 눈이 너무 많이 쌓이거나 진입로가 얼음판이 되어 차를 도로변에 주차시켜야 했고, 나는 겨우내내 눈을 치워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아버님은 그 (운전) 기술에 결코 성공하지 못하셔서, 차를 두번이나 도로변 깊은 고랑에 처박고 나서야 (견인 트럭을 불러야 했다) 배우려는 시도를 포기하셨다.

나는 아나폴리스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열 다섯 해 겨울 동안 운전을 했으며, 버팔로에서 지냈던 겨울 중 몇 해는 지난 세기 중 최악의 상황으로 꼽혔었다.

나는 또한 스포츠카 경주를 몇 번 했으며, (내 차의 엔진이 고장이 났고, 모든 부품은 아파트에 두고 와서) 차동호회 친구로 부터 빌린 차로 내 겨울 운전 지식을 이용하여 얼음 운전 대회에 참여했고, (일반 대중에게) 차단된 도로 코스에서 (그 친구의 차로) 첫 번째 시도에서 그의 기록을 18초 단축시켜 의도치 않게 그 친구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대회에서) 1분 8초라는 내 기록은 그에게 2등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내가 탑승객으로 조차 그의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를 더 무안스럽게 만들었지만, 이후 우리는 계속 친구로 지냈다.

내가 유리했던 점: 그는 겨울 환경에서 운전하는 방법을 내 어머님께 배우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내가 처음 ‘Delmarva Power’에 취직을 했을 때, 겨울 운전에 대한 한 시간 길이의 교습을 해줄 것을 부탁받고, 최소한 3년 동안 그렇게 했다.

내 교습으로 사람들이, Young, 당신이 본 것 같이, 겨울 폭풍으로 연쇄충돌 차더미에 쌓이지 않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겨울 운전의 관건은 침착을 유지하고, 어리석게 운전하는 사람들로 부터 멀리 떨어지며, 브레이크는 마지막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관성과 엔진 브레이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며, 걷지도 못할 정도의 얼음판에서는 운전하지 마라.

당신이 Exit 5에서 뉴저지 턴파이크 북쪽 끝까지 무사히 운전해 갔다는 것은 당신이 이런 것들을 최소한 일부를 따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잘했다! 이곳에서 사는 2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필요한 (운전) 기술을 알지 못해서, 동네 자동차 정비공장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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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To have successfully completed your journey to NY last week without incident is a testament to your ability to stay calm and focused.

I lived in the Buffalo area for 29 years, and my mother gave me my first driving lesson when I was 15 on a sunny winter day with the temperature below freezing and the (non-public) road we lived on covered entirely with 2-3 inches of glare ice.

My look at my mother upon this invitation was answered with “If you can learn to drive on glare ice, you can drive on anything.  Let’s go!”  So I climbed behind the wheel of a Hemi V8 engine Dodge sedan weighing over 5,000 lbs, and quickly learned that getting on and off the gas pedal quickly was a very bad idea and brakes are merely a mechanism that puts you into a skid on glare ice.

Having grown up in a hilly farming region near New England, my mother was more skilled at winter (and truthfully, all weather) driving than my father, and taught me how to accelerate up our road, kick the car sideways when approaching the end of the driveway, and then shoot into the driveway by using the gas pedal and steering.

That was the only way to be able to drive all the way up the driveway in November and December at our home before the snow became so deep and the driveway so icy that we had to park the cars on the road for the rest of the winter and I had to shovel a walkway for the rest of the winter.

My father was never successful at that technique, and put his car into the road’s deep ditch twice (requiring a tow-truck to remove it) before giving up on trying to learn.

I drove through fifteen winters up there before moving to the Annapolis area, some of them among the worst Buffalo saw in the last century.

I also did some sports car racing, and used my winter driving knowledge in an ice driving competition using a car I borrowed from a fellow car club member (my car’s engine had failed, and I had it all apart back in my apartment) and managed to unintentionally embarrass the car’s owner on my first attempt by undercutting his time on the closed course by 18 seconds.

My finishing time of 1 min 8 seconds gave him the second place trophy.  It was doubly embarrassing as I had never even ridden in his car as a passenger, but we remained friends afterward.

My advantage: He had never had the benefit of my mother teaching him how to drive in winter conditions.

When I was first employed by Delmarva Power, I was asked to give an hour-long course on winter driving, and did so in at least three years.  I hope that saved other people from winding up in pileups in winter storms, such as you saw.

The keys to this driving is to be patient, stay away from others driving foolishly, use your brakes only as a last resort, use momentum and engine braking to your advantage, and do not drive on ice on which you cannot even walk on.

For you to successfully drive from Exit 5 northward to the end of the turnpike indicates that you must have been following at least part of this approach.

Well done!  I have noticed over twenty nine years of living here that many people in this area do not understand the techniques needed, much to the happiness of the auto collision shops in the area.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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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뉴욕을 다녀왔답니다. 평소 그리 자주 가지 않는 편이라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오고 가는 길의 날씨는 어떨지 등등 미리 확인을 하고 집을 나섰답니다.

비는 좀 오겠지만 낮기온이 40도에 이른다고 해서 그리 걱정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답니다. 집에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넉넉하게 약속시간보다 4시간 전에 떠났답니다.

뉴저지 턴파이크에 들어서자 비가 오기 시작했답니다. 평시처럼 차들은 60-70마일로 달렸답니다. 그러다 Exit 4와 5사이를 지날 무렵부터 차들은 35마일 미만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답니다.

비가 내리면서 얼어서 도로가 빙판이 된 것입니다. 제 앞에서 가던 차가 스스르 미끄러지더니 갓길에 처박히는 것도 보았답니다.

겁이나서 service area로 들어서 쉬어갈까 했지만 ramp를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 어떤 차도 service area를 들어갈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게 6시간이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6시간 동안 분리대를 박고 부서진 차, 서로 부딪혀 부서진 차들, 20-30대가 넘게 연속 충돌된 차들 등등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거의 100여대가 넘는 사고차들을 보았답니다.

무사히 도착한 후에 저는 “아무 사고없이 운전하는 것이 바로 기적이야,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오래 전에 중국에 있었답니다. 약 1200여년 전에 살았던 임제라는 불교 스님이랍니다.

그가 한 말이랍니다.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 이라고요.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기적이라는 것이지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답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손님들의 옷에 스테인들을 없애는 일에 감사하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한답니다.

Last Sunday, I went to New York City. As I don’t go there often, I checked the weather forecast and expected road conditions before I left home.

As the weather forecast said that though it would rain, the daytime temperature would be 40 degrees, I could leave home without concerns about the trip. Since it takes about three hours under normal conditions, I left four hours before the appointment to have the extra room of one hour.

As soon as I entered the NJ Turnpike, rain started. Vehicles were moving at the speed of 60-70 mph as usual. But when I was passing somewhere between Exit 4 and Exit 5, all the cars dropped their speed to under 35 mph.

The temperature was lower than expected and the rain was frozen as soon as it touched the ground. Yes, it was freezing rain! A car in front of me slid off the road.

I was somewhat afraid and thought about taking a break at a service area. But the ramp to the service area was icy and no cars could go there. I had to just follow the traffic and keep going.

I managed to reach my destination after six tense hours. During the trip, I saw so many accidents: cars which hit the median strip of the road and collided with other cars, and piles of cars crashed. I’m pretty sure that I saw more than 100 cars which were involved in accidents that day.

After I arrived at the appointment place, one thought came to my mind: “It is a miracle. Just to drive without getting involved in an accident is really a miracle.”

A long time ago in China, one Buddhist monk made a statement similar to this thought. He was Rinzai (or Linji, 臨濟) who lived around 1,200 years ago.

He said: “A miracle is not to walk on water, but to walk on the ground.”

What he meant is that to live every day uneventfully is nothing but a miracle. If we would understand this, we could not but live in gratitude, I think.

I wish that you will have a week which is full of things for which you are grateful.

For myself, I hope that I’ll have a week during which I get rid of all the stains from my customers’ clothes and feel grateful for that.

어떤 감사 – 홍길복목사님께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 임금이 한번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하나 구해 오거라.”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구해서 왕에게로 가져왔다. 그것은 왕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였다. 솔로몬왕은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자세히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기, 그 반지 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까지도 다 지나가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다. 이제는 실패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 홍길복목사가 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에서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내 나이 젊어 한 때 많은 선배와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예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처럼 사노라”고 확언하기도 했고, “예수처럼 살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나도 이제 환갑, 진갑을 지나니 그이들은 칠순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쳤던” 그이들이 오늘도 여전히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거나 아는 이들의 전언을 통해서 또는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전한 그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들은 마치 전혀 변함없이 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말했던 “예수”와 지금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 그들에게 들었던 예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체제(體制)안에 안주하며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여전히 외치는 것은 변함 없으되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다.

홍길복-2그러나 35년만에 만난 선생님 홍길복목사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그는 여전히 “떠남과 움직임은 아브라함 이후 성경의 전통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움직이시는 하나님(The Moving God, The Mobile God)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고 외치고 있었다.

홍목사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35년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남기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자인하는 까닭으로 두가지를 든다. ‘신학적 실패’와 ‘인간적 실패’가 바로 그것들이다.

두가지 모두, 그가 청년 시절에 외쳤던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과 달리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었던 일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패’란 잘못된 목회 목표 설정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자리인 “호주 이민의 삶”에 두발을 딛지 않고 “한국적 상황 – 일테면 한국의 민주화, 인권 문제, 조국 통일과 평화문제 등”을 그대로 안고 고민하는 일에 빠져서 실제 빵과 기쁨을 함께 나누워야 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이민 초기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는 자신도 한때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던 일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그 역시 “교회 성장이라는 권력욕과 물질욕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탐욕”에 빠졌었던 일을 고백하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 버린 지난 날 나의 목회에 대한 슬프고 아픈 참회”라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가 두번 째로 꼽는 ‘인간적 실패’란 사랑의 실패를 고백함이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에게 사랑의 실패란 곧 성서이해의 실패이며 예수신앙의 실패였다. 그의 고백이다.

<지난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라고 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까지도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진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성장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머릿수가 그득한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자니 찜찜하고 안 다니자니 딱히 다른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만 얻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한 홍목사는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감사”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렇게 실패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아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넘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그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그리보여도 “움직이는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평생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한결같으신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축복이요, 감사일 뿐이다.

당신 탓

내 나이 스물 다섯에 헤어져

서른 다섯해 만에 만난

열살 위 선생님께서

던지신 첫 말씀.

 

“어째 키도 안 크고…”

 

그 말씀을 함께 들은

내 아내와 아들과 딸이

모두

선생님께 자랑스러웠던 까닭은

 

“어째 키도 안 크게…”

 

내 나이 환갑, 진갑이 되도록

뵙지 못했던

서른 다섯 해 동안

정신으로만

 

그렇게

“키보다는 정신이라고”

가르쳐 준

 

바로

당신 탓이라고.

그래도 희망은…

“식물도 새도 곤충도 아이들도 모두 즐거웠다. 그렇지만 사람들- 나이먹은 어른들-만은 여전히 자기 자신과 서로서로를 속이고 괴롭히는 일들을 그만두지 않았다.

신성하고 중요한 것은 이 봄날의 아침도 아니며 만물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신(神)이 만들어 준 세상의 아름다움 곧 평화와 일치와 사랑으로 마음을 이끄는 아름다움도 아니고, 단지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16년전인 1899년에 발표된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부터 소설 ‘부활’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로부터 116년 후인 2015년 1월, 뉴스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지배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들만이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찹니다.

어제가 된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현재 시각 오전 11시 30분, 파리 19구에 위치한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건물에 두 괴한이 습격해 AK47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 시각 현재 12명이 죽고, 11명이 중상인 상태이며, 그 가운데 4명은 목숨을 잃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사건을 기록한 동영상들이 이미 많이 유포되어 있는데 찾아보니 “저게 과연 사람일까?”하는 의문이 들만큼 그냥 잔인한 영화속 장면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살인마들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Allah akbar”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게 “알라는 위대하다”는 뜻이랍니다.

죽은 12명 가운데 <샤를리 엡도>의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Stéphane Charbonner)라는 이도 있습니다. 그가 지난 2012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그 때도 이 주간지는 이슬람세력에게 살해 협박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가 한 말이랍니다.

“나는 보복이 두렵지 않다. 나는 아이도, 아내도 차도, 신용도 없다.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나는 무릎 꿇고 사느니 선 채로 죽겠다.”

그가 선 채로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랍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 역시 스스로 “알라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이었는지 역시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자 CNN 온라인판에는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전세계 만평가들이 그림 삽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이고 더 보시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링크를 걸어드립니다.

Charlie Hebdo

그리고 또다른 뉴스 하나.

대한민국 검찰이 재미동포 신은미씨를 강제출국 조치 해달라고 8일 오후 법무부에 요청했다고 합니다. 또 그녀와 함께 토크쇼를 했던 황선 희망정치포럼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검찰이 발표한 내용이 참 가관입니다.

“북한에서 치밀하게 사전 연출된 사실에 기초하거나 신씨의 지역적 또는 다년간의 경험에 기초한 걸 일방적으로 왜곡해 마치 그것이 북한 전체의 실상인양 오도함으로써 결국 북한 세습정권과 독재체제를 미화 내지 이롭게 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북한에 다섯 번 가서 ‘남한이 참 잘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여행사를 따라가 좋은 곳만을 보며 쓰거나 말하는 여행 이야기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되고, 세계 어느나라에 가든 ‘대한민국은 참 잘 산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상은 아마 톨스토이도 짐작치 못한 일일 것 같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2015년, 이리 저리 검색창을 두드리다가 그래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던 사진 한 장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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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이 죽고 6천6백만 명이 다쳤다.”

프랑스의 희망이요, 사람사는 세상이 희망이 되는 사진이랍니다.

선진화를 외치는 대한민국에도 이런 희망이 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무우말랭이

무우말랭이를 만들어 보았답니다. 머리털나고 처음 해 본 일이랍니다.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인데 신기하기도 하고 제가 한 일이 대견하기도 하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튼실한 무우 세 개를 손가락 크기로 썰어서 채반과 oven grill pan에 널어, 부엌 바닥에 있는 air duct vent 위에 올려 놓았을 뿐이랍니다. 그런데 하루 반나절만에 아주 잘 마른 무우말랭이가 되었답니다.

무우말랭이농사짓는 벗이 보내준 무우는 아주 잘 생겼답니다.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도 제법 많이 남은 것들을 어떻게 보관할까를 고민하던 차에 짜낸 생각이 무우말랭이였는데 썩 잘한 생각 같답니다. 나머지 무우들도 모두 말랭이를 만들려고 한답니다.

제가 무우를 썰고 말리기까지 하게된 까닭은 아주 엉뚱하답니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문득 든 생각 하나는 시간을 나눈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것이었답니다. 2014년 12월 31일과 2015년 1월 1일의 차이라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었지요.

그저 제가 살아가며 흘려 보내는 시간들의 연속일 뿐인데 거기 숫자를 부여하고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뭐 그런 생각에 빠져 새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그래도 명색이 예수쟁이인데 구태여 사람들이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 시간에 대해 예수가 던지는 질문 하나 정도는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답니다.

그 생각들 끝에 “가라”라는 뜻을 찾아냈었답니다.

예수 당시 사회공동체로부터 왕따를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민재판으로 돌맹이에 맞아 죽을 환경에 놓였던 사람도 있었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용서해 주고 고쳐주면서 그들이 살던 공동체로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다시 돌아간 사회공동체를 예수는 바꾸어 주지도 않았고, 왕따였다가 돌아간 이들의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예수는 책임지지 않았답니다.

2015년 이라는 새로운 숫자가 제게 준 의미였답니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주인은 “바로 너”라는 선언을 예수식으로 하면 ‘가라!’라는 명령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 본 것이랍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새해맞이를 하던 제게 아주 엉뚱한 일이 느닷없이 다가왔답니다.

늘 밝고 젊은 생각으로 사는 제 아내가 그 생각이 지나쳐 자신의 나이를 잊은채 운동을 한답시고 뛰다가 그만 뒤로 정말 오지게 넘어지고 말았답니다. 한동안 꼼작을 못하는데 정말 제가 오지게 놀랬었답니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려다 잘 아는 정형외과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답니다. 사태와 증상을 두루 듣던 의사 양반이 뼈에 이상은 없는 듯 하니 응급실에 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처방하는 약을 먹고 하루 두어 본 뒤 가정의에게 응급상담을 해서 그 때 문제가 있으면 병원행을 하는 게 덜 고생할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었답니다.

다행히 아내는 처방해 준 약과 이틀 동안 안떨어지고 벗이 되어 준 침대 덕분에 이젠 걸을만한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누워있는 아내는 제 일상을 조금 흩트려 뜨렸답니다. 그렇게 흩트려진 일상을 서성이다가 제 눈에 뜨인 것이 창고방에 놓인 무우들이었고 그 무우들이 하루만에 말랭이가 된 것이랍니다.

아마 이번 주말엔 무우말랭이 무침이나 무우말랭이 속이 든 만두가 우리 부부 식탁에 오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2015년 문을 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