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아리랑 – 그 느낌에 대하여

한국학교 교사는 제 아내가 25년 째 계속해 오고 있는 일입니다. 아내는 이 일을 즐기는 동시에 일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답니다. 봉사를 전제한 일이므로 재미와 자부심 없이 즐기기만 하기는 힘들겝니다.

그런 아내를 따라 어제는 필라델피아, 남부 뉴저지, 델라웨어 지역에 있는 한국학교 연합체인 동중부협의회가 주최한 2014년 교사 송년의 밤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아내를 따라 이런 한국학교 연합체 행사에 가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시는 분들의 애씀과 참석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느낄 수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밤 그 모임에서 제게 특별히 새롭게 다가 온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평시엔 쉽게 듣거나 부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거나 듣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애국가와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애국가를 부르면서는 참으로 뜬금없이도 울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마 세월호 이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모국(母國)과 한인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겹쳤기 때문일 겝니다. 새삼스럽게 한물 간 민족주의 감상에 젖었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그래도 쉽게 연결해 주는 도구로써 애국가라는 노래에 잠시 빠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날, 홀로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몇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이야말로 애국가를 넘어서는 한국어 사용자들을 이어주는 끈일 것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를 연결해 주는 노래인 동시에 한반도 남과 북을 이어주는 노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홀로 아리랑은 홀로 외롭게 부르는 아리랑이 아니였습니다. 홀로일 수 밖에 없는 개개인들 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념과 신앙이 서로 다른 공동체는 물론이고 빈부의 차이, 지식의 차이, 권력이나 권위를 누리거나 못 누림의 차이로 벽을 쌓고 홀로 섬이 되어 사는 모든 세력들이 적어도 손을 서로 맞잡을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무릇 노래란 느낌이고 감성입니다.

하나되는 일은 이론이나 이성으로는 힘들지만 느낌과 감성으로는 쉬운 일입니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란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감성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이성(理性)이나 이론(理論)이라는 허울을 쓰고 사람들을 편가르고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일이 넘치는 세상에서 홀로 아리랑이 제게 새롭게 다가온 저녁이었습니다.

아리랑을 이민의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 갈 우리 후대들을 위해 가르치는 제 아내를 비롯한 한국학교 교사들에게 제 느낌과 감성으로 치는 박수를 보내며…

그 놈들 – 5

<1940년대의 남부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천,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그리고 차경석의 보천교나 전해룡의 백백교도 혹은 거기에 편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1948년 ‘문장’지에 실린 채만식의 소설 <도야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은 작자 채만식이 멀지 않은 장래에 사어사전(死語辭典)으로 갈 “빨갱이”라는 말에 대해 이런 주석이 달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1948년에 작가 채만식이 느꼈던 “빨갱이”에 대한 모습입니다. 그런고 <불원한 장래(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빨갱이”라는 말은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문태석은 스스로를 “빨갱이”라고 부르기를 즐깁니다. 그 까닭은 <인격이 고상한 애국자요, 지방의 덕망가요, 실업계의 중진이요, 그리고 독실한 신자인 동시에 교회의 최대한 보호자>인 그의 아버지 문영환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 문태석이 본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실제 모습은 고매함과는 거리가 전혀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부친 문영환, 이런 모친 최씨부인, 이런 누이 명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드나드는 온갖 종류의 인물들, 그 누구 한 사람에서도 구역이 나도록 불쾌한 반감을 느끼지 아니하는 인물이 없었다. 항차 그들이 그들답게 빚어내는 분위기란 정히 견디기 어려울 만큼 탁하고 추하고 불순스럽고 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도야지> 곧 오직 자기 뱃속 채우려는 탐욕만 가득한 돼지새끼들이었을 뿐입니다.

1948년으로부터 자그마치 66년이 흐른 2014년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인사회에서 쓰이는 “종북”이라는 말을 채만식의 사어사전(死語辭典)속에 있는 “빨갱이”에 대입해보면 그저 딱 들어 맞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빨갱이란 공산당을 일컫는 비속어입니다. 공산당이란 공산주의를 실현코자 하는 강령을 내건 정당을 말합니다. 이론상 공산주의가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거의 최상의 체제인 것은 틀림없지만 실제 그런 체제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망한 것임은 이미 밝혀진 일입니다.

사실 공산주의란 종교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익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마르크스 – 레닌주의(ML)를 주창했던 레닌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종교성을 빼놓고는 이룰 수 없는 세상입니다. 레닌은 <사회주의는 ‘각자로부터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도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라고 일 뿐이고 진짜 공산주의는 ‘각자로부터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라고 합니다.

레닌이 말한 사회주의는 얼핏 실현 가능한 사람들의 세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세상 곧 그런 공산주의 사회란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결코 오지 못할 세상입니다.

“필요”라고 하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직접 개입하는 세상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허망한 그야말로 이론일 뿐입니다.

이즈음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북유럽 국가 모델들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물들일 것입니다.

이쯤, 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이 광야에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여섯째 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차려보면 다른 날 거두어들인 것의 곱절이 되리라.> – 출애굽기 16 : 2-5, 공동번역성서에서

잘 알려진 ‘만나’ 이야기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음식입니다. 물론 신이 내려 준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히브리족들의 신앙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공평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누구나가 남녀노소, 빈부, 지식이나 경륜, 높고 낮은 지위 등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은 질의 음식을 자신의 양에 맞게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신이 <실험해 보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실험이란 바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필요라고 하는 욕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의 실험에 인간은 아주 쉽게 걸려듭니다. 필요의 양을 자신의 욕망에 맞춘 것이지요. 내일이라는 염려를 없애려는 욕망,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망을 막바로 들어냅니다. 그러자 신은 이런 인간들을 향해 그 욕망을 원천봉쇄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튿날이면 만나를 없애고, 욕심으로 쌓아 둔 것은 썩어 못 먹게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공평한 세상에 대한 경험입니다.

신약시대를 연 초대교회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라는 신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 사도행전 4 : 34 -35, 공동번역성서에서

“쓸 만큼” – 필요의 크기 곧 욕망의 크기를 신의 개입으로 제어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세상이었습니다.

소련의 멸망과 함께 공산주의는 실패했다는 말들도 하지만, 실제 사전적 의미로써 공산주의란 인류 유사이래 극히 제한된 신앙 공동체 이외에는 이루어져 본 적이 없는 결코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저 허망한 이론일 뿐입니다.

더더우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북은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입니다. 사회주의헌법(社會主義憲法)으로 부르는 그들의 헌법에서 조차 ‘공산주의’라는 말을 완전히 삭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해방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변해 온 모습을 돌아보면 그래도 그나마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고 우위에 있었던 때는 북이 공산주의라는 명분을 버리지 않았을 때입니다.

북한이 남한보다 뒤쳐지기 시작한 무렵은 바로 그들이 공산주의라는 명분을 버리고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종교로 갈아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남쪽의 박정희가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움켜쥐는 긴급조치 1호가 공포됐던 1974년에 북의 김일성은 마치 성서의 십계명처럼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것을 공포합니다.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투쟁하여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모셔야 한다.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하여야 한다.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6.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

7.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따라배워 공산주의 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 인민적 사업작풍을 소유하여야 한다.

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며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9.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유일적 령도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률을 세워야 한다.

1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남쪽에서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가던 무렵 북은 이미 김일성이 신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미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김씨왕조가 싹트면서 북은 남쪽보다 뒤쳐지면서 그 간격이 점점 벌어지게됩니다.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2012년 민주주의 지수를 보면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남한은 20위, 북한은 167위 입니다. 조사대상국은 167개국입니다. 북한이 전세계 조사 대상국에서 꼴찌인 셈입니다. 물론 이 조사의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지상천국”이라고 믿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index

이제 “그 놈들”을 알아보기 전에 “그 신자들”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합니다.

오늘 글을 맺기 전 느끼는 안타까움 하나는 저 조사 결과보다 2014년 남한 역시 훨씬 후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내의 나이

제 아내의 기억력에 대해서는 그 어떤 칭찬도 절대 과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이 부부싸움을 해 보신 경험이 있다면(결혼경험은 있는데 부부싸움 경험이 없다고 하시면 그건 제대로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감히…) 아내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신 적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제 감탄은 그 누구라도 당신의 경험보다 열배는 더할 것입니다.(물론 거의 제 부류 모든 사내들이 같은 생각일지라도…)

제 가게 손님들에게 종종 듣는 이야기랍니다. “니 마누라는 손님들 이름 언제나 다 아는데, 너는….”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답니다. 아내는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 이름들을 기억한답니다. 결코 작은 숫자라고도 할 수 없거니와 거의 세계 각국 여러나라 이름들을 그렇게 잘 외운답니다.

그에 반해 저는 조금전에 제 가게를 들어왔다가 나간 손님이 무언가를 잊고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도 또 다시 맞는 새손님이랍니다.

언젠가 어느 손님 한분이 놀랍도록 다른 저와 아내의 기억력에 대해 물었었답니다. “니 마누라는 손님 이름들을 다 외우는데 너는 어떻게 손님 그것도 이십년된 손님 이름 하나를 못 외우냐?”고요. 그래 제가 한 대답이랍니다. “아! 그거. 지능지수의 차이야, 아마 너도 나와 똑 같을 걸. 지능이 낮을수록 단순한 것들을 잘 기억하지. 내 아내의 경우야. 아마 니 마누라도 마찬가질 걸. 그러나 나는 너를 알아.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바로 너처럼. 지능이 높거던.” 물론 그 손님은 저와 매우 친한 남자 손님이었지요.

뒤에 그 손님이 제 말을 제 아내에게 그대로 옮긴 탓에 제가 받았을 수모(?)는 당신이 생각한 이상이라는 말씀을 덧붙이도록 하고요.

그런 제 아내가 확실하게 기억력이 떨어진 현상이 오늘 나타났답니다.

“오마! 그럼 내가 몇살이야? 오마마…..”

14 정미생일

그런 아내를 위하여, 참 좋은 기억력으로 오래오래 살라는 맘으로 장모님이 끓여주신 갈비국에 넉넉히 넣은 당면국수를 점심에….

저녁에는 아직은 특별한 날에는 곁에 있는 아이들과 이태리 국수를….

아내를 위하여!

그 놈들 – 4

저물어가는 2014년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이름을 꼽으라면 아마 이슬람국가(IS) 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 등으로 불리우는 반문화적, 반인륜적 미치광이 집단이 첫순위에 오르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류의 역사를 무려 1400여년 전으로 돌리고자 하는, 가히 정신나간 사람들이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올 한해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겨 죽인 집단입니다.

헤즈볼라나 알 카에다 같은 기존의 테러집단들과는 궤를 달리하며 국가를 참칭하고 있지만 지구상 어느나라도 그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형국입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적은 그들 이외의 전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ISIL이 전 세계를 하나되게 하였다”라는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중동 지방을 근거로 하는 테러집단들이 최우선의 적으로 삼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러시아,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터키, 이란,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정부군과 시리아 반군, 쿠르드족, 기독교인에 나아가 공산주의자 심지어 헤즈볼라, 알 카에다까지 몽땅 그들의 적들이랍니다.

분명 제 정신이 아닌 집단이거니와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집단이기에, 전세계가 힘을 모으면 금방이라도 이들을 지구상에서 쓸어버릴 수 있겠건만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아 보입니다.

미국정부만 하더라도 이들과의 싸움이 최소 3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을 한다는데 아마 지난 경험치로 본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전 세계는 이들과의 싸움으로 시간을 보낼 듯 합니다.

그런데 알수없는 일은 이 미치광이 집단과 함께 하려는 젊은이들이 미국, 유럽, 아시아, 중동 등 가히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금도 꾸준히 현재진형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 중국은 물론 한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다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이들 젊은이들로 하여금 희대의 미치광이 집단의 품으로 자신들의 삶을 내던지게 할까요?

도대체 왜? 멀쩡하게 잘 자라서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때인 젊은이들이 이런 반인륜적, 반문화적인 집단으로 스스로 발길을 재촉하여 함께 할까요?

여러 다양한 설명들과 해석들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저는 두가지로 생각해 본답니다. 첫째는 ISIL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보고 자란 환경이고 두번째는 잘못된 믿음 곧 종교입니다.

첫번 째, 젊은이들이 보고 자란 환경이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모습이나 자기 가족들의 모습이 주류가 아니라는 소외감 탓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자신들이 현재 속해 있는 사회에서는 결코 그 소외감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만난 잘못된 종교가 두번 째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멀쩡한 자신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막장으로 스스로 밀어넣는 젊은이들의 뒤에는 바로 미치광이 집단을 이끌어가는 바로 “그 놈들”이 있습니다.

오늘자 한국 뉴스를 보면서 미치광이 집단 ISIL과 그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한반도 남쪽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연합<‘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 전북 익산에서 토크 콘서트를 열었으나 한 관객이 인화물질에 불을 붙인 뒤 투척하는 바람에 관객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오늘자 연합뉴스가 전한 기사 한 대목입니다.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이 남한 전국을 돌며 벌이는 토크 콘서트의 주제는 “평화와 통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합뉴스를 비롯한 뉴스매체들은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 토크 콘서트로 의도적인 믿음을 독자들에게 심어줍니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에서 <…을 빚고 있는>이라는 말이 사라질 것이고, <논란>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종북>이라는 말만 남기게 이들의 교묘함은 작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거의 일상화된 습관에 이어 마침내 18살 젊은 아이가 폭발물을 투척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ISIL이 인류의 역사를 1400여년 전으로 돌리고자고자 하는 것과 ISIL 다음으로 전 인류적, 전 세계적 왕따가 된 북한을 쫓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종북(從北)이라는 딱지가 과연 2014년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이나 전세계 한인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주술일까요?

그 18살짜리 고등학생에게 “인화물질에 불을 붙인 뒤 투척하”도록 사이비 믿음을 심어준 “그 놈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 하나는 바로 박정희의 공로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이바지한 큰 공로를 높히 기린답니다. 다름아닌 철저한 총기류 규제입니다.

총을 들고 쿠테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총기류 규제만큼은 정말 철저했습니다. 자유당 시절만해도 심심치 않게 있었던 총기사고가 박정희 통치기간 이래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안전한 나라가 된 까닭은 모두 박정희의 공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18살 아이가 총기류 대신에 “인화물질에 불을 붙인 뒤 투척”할 수 밖에 없었던 일도 저는 순전히 박정희의 공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박정희 부부 모두 총기류 사고로 세상을 뜬 일은 안타까운 아이러니지만…

그 놈들 – 3

제3세계 발전 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 실패는 보다 산업화된 국가들의 발전만큼이나 서구 맑시즘에 일대 타격이 되었다. 맑시즘이 사라진 뒤 중국은 자본주의적 경제기업 형태를 도입하게 되었고 급속한 경제발전 시기에 돌입했다. 아프리카와 그 밖의 사회주의 사회는 무너졌고, 나중에는 쿠바의 사회개혁이 아무리 성공했을지라도 그것이 소련의 대규모 경제원조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극동 지역 ‘호랑이들’의 급속한 발전이 제3세계 국가들도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그리고 자본주의적 준거틀 내에서만 급격한 성공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일게다. –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에서

제 가게에서 바느질 일을 20년 넘게 도와주고 있는 Lou 아주머니는 제 또래의 라오스 출신 이민자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몇 해 전에 은퇴를 했고 저와 친하게 지낸답니다. 제 가게나 집 배관 시설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친구랍니다.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해서 Lou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고 사는 사내랍니다.

이들 부부의 집에는 커다란 사진 하나가 거실에서 손님을 맞는답니다. Lou 아주머니의 시아버지 곧 전직 배관공인 Ban의 아버지입니다. 사진속 인물은 마치 일본식 정장을 했던 고종임금 모습같답니다. 어깨에 술이 달린 제복에 가슴에는 각종 훈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랍니다.

Lou 아주머니의 시아버지는 1975년 라오스에 오늘날의 “라오 인민 민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 라오스왕정 시대에 총리급 고관이었다고 합니다. 라오스가 공산화된 후, 망명하듯 전 가족이 미국 이민을 왔다고 합니다.

그런 Lou 아주머니는 격년에 한번씩 고국 라오스를 방문한답니다. 그녀의 고국방문이 가까와지면 저희 부부가 하는 일이 하나 있답니다. 바로 제 가게 손님들이 맡기고 찾아가지 않는 옷들을 정리하는 일이랍니다. 상태가 어떻든 입을만한 것이면 어떤 종류의 옷이든 이민백으로 하나 가득 Lou 아주머니의 여행 짐이 된답니다. 라오스에 있는 친지들에게는 아주 좋은 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즈음 한국에 사는 이들은 Lou 아주머니가 가지고 가는 옷들을 보면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옷들일 겝니다.

벌써 지지난 해던가,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 온 Lou 아주머니가 저희 부부에게 물었던 말이 있답니다. “아니 김씨 부부는 왜 그 잘 사는 한국을 떠나서 여기서 살아요?”하는 물음이었답니다.

그녀의 귀국 길에 탄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중간 기착을 했던 모양입니다. 공항 바깥에 나가지도 않았지만 한국은 엄청 잘 사는 나라라는 그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니 김씨 부부는 왜 그렇게 잘 사는 한국을 떠나서 여기서 살아요?”라는 Lou 아주머니의 질문은 그녀의 입장에서 던질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일겝니다. 아마 누구라도 그녀의 입장이라면 던질 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양키 고 홈”하면 빨갱이가 되는 세상에서 자랐습니다. 아니 그런 말조차 몰랐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깁 미 껌”, “깁 미 쬬꼬렛”이라는 말이 친근했던 세대입니다. 미국에서 건너 온 옥수수로 만든 옥수수 빵과 딱딱하게 돌덩이같은 우유 덩어리를 배급받아 먹으며 학교를 다녔던 세대입니다.

미국하면 천국 다음으로 좋은 나라쯤으로 알던 세대입니다.

제가 십수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친구 하나가 일찌감치 회사를 그만 두고 서울 인근 외곽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답니다. 자신이 스스로 무공해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당시 유행이었던 주말농장을 분양해서 나누는 그런 농장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연좌제그 농장을 방문했을 때 제 친구의 아버님께서 밭을 일구고 계셨답니다. 제가 인사를 드리자 반가히 맞아 주시던 친구 아버님께서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려, 미국 시민 되었지! 높아졌네 높아졌어 미국 시민 높은 것이여, 아무렴!”

친구 아버님은 6.25 한국전쟁 부역자로 낙인 찍혀 평생을 사시다 이젠 돌아가신 분이랍니다. 장남이자 제 친구의 형님이신 이는 참 사람 좋고 자상하신 분이었는데(그 이도 이젠 칠순이겠다는 생각을 하니 참 세월 빠릅니다.) 사범대학을 나와 학교 발령을 기다리다가 연좌제에 걸려 꿈을 접고 사셨답니다.

Lou 아주머니의 종한(從韓), 제 친구 아버님의 종미(從美)적 발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의 경험과 ‘좀 더 잘 사는 곳’에 대한 동경(憧憬)은 지극히 사람다운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 거꾸로 되었을 때, 일테면 라오스와 미국의 형편이 뒤바꿨을 때나, 한국과 미국의 형편이 뒤바꿨을 때도 이것이 자연스런 일이 될까요?

그렇게 뒤바뀐 환경에서도 종한(從韓) 또는 종미(從美)적 발언이나 사고가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한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세는 가능 이전에 미친 짓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상일 겝니다.

이른바 종북(從北)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답니다.

  • 계속 이어집니다.

 

찌라시와 어떤 예언

<박대통령 “찌라시에 나라 흔들”> – 온라인 한국일보의 기사에 달려있는 작은 제목입니다. 그 기사의 큰 제목은 <朴, 찌라시·애국심 키워드로 결백 호소.. 의혹 본질엔 함구>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지도부 및 당 소속 예산결산특위 위원들과 가진 오찬 회동을 보도한 기사입니다.

이날 박근혜대통령은 모인 이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시작하기 전,후에 짧게 글을 읽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읽는 글 속에는 ‘나라’라는 단어는 15번, ‘대한민국’은 3번, ‘국민’은 19번 씩을 사용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나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들을 자주 읽어 내려가면서 스스로 “오직 나라가 잘 되게 하는(일에 빠져)…”, “일생을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국민(아마 그녀는 백성이라고 생각할 듯하지만)들이 이런 자신의 애국심을 믿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듯(아니면 연출자의 뜻이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그런 믿음에 스스로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찌라시전후 사정이야 어떠하던 그 기사가 제 마음에 꺼림직한 까닭은 “찌라시”라는 말 때문이었답니다. 저희 세대쯤만 하여도 익히 아는 일본말입니다. 바로 ‘ちらし(散らし)’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광고를 위해 뿌려지는 인쇄물을 일컫습니다. 선전지, 광고지를 뜻하는 일본 말입니다.

무려 ‘나라’, ‘대한민국’, ‘국민’에 빠져 사시는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라 제겐 참 난감하게 들렸답니다. 그이나 저는 거의 같은 세대이거니와 해방후 세대랍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직책을 맡고있는 그이가 쓰기에는 참 부적절한 낱말이거니와 그이나 저나 일본말이 그리 입에 베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그 놀라움이 컷답니다.

물론 그이가 5개 국어인가 6개 국어인가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 아무 때나 자기 나름의 적절한 외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문득 그이의 아버지 시절이 떠올랐답니다. 저는 그이의 아버지 시대에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1974년의 일이랍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아마 박근혜대통령이 대학을 졸업했던 해일 것입니다. 그해 정월달에 이웃 일본국의 수상이었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榮)는 동남아 5개국 친선방문 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봉변을 당합니다. 일본대사관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끌어내려지고 찢겨지고 짓밟히고 불태워지는가 하면 일제 자동차들을 불태우는 반일 시위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호텔방에서 꼼작없이 갇혀있다가 귀국을 하게됩니다.

1974년 1월 한국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긴급조치 1호가 발동했습니다. 바로 박근혜씨의 아버지가 모든 국민의 자유과 권리를 제 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한을 쥔 것이랍니다. 이후 5년 동안 박정희와 국민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설정되었고, 바로 그 시절에 박근혜 현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른바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며 국민에 대해 배웠답니다.

아무튼 그 해 1월 동남아 5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다나까수상은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받게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반일데모를 잊지 못했던 다나까는 만만한 게 한반도 남한 정부였던지 이런 말을 쏟아냅니다.

“과거 한일사이에 합방시대가 길었지만 그 후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긴 합방 역사 속에 한민족 마음 가운데 심어 놓은 것은 일본의 휼륭한 교육제도였다.  ….역시 경제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국민생활 가운데 뿌리를 박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동남아 순방길에서 절실히 느꼈다.”

그 당시 한국인들의 공분을 자아낸 이른바 다나까 망언이라는 것이데, 애처롭게도 그 공분을 오늘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다나까의 말이 옳다는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고 가는 듯하다는 생각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닌 현실입니다. 다나까는 40년 전에 망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한 셈인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찌라시” 발언이 가져다 준 생각들입니다.

그날 밥상머리에서는 각하(閣下)라는 호칭도 이어졌다는 보도입니다. 집권당 원내대표라는 이의 입에서 연이어 나온 호칭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본 국왕이 임명한 문무관리들을 부르던 말인지는 알기나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놈들 2

no 2오늘(2014년 12월 4일)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날이라는 기사가 경제 전문 온라인 신문인 MarketWatch에 실렸습니다.

이제 미국은 공식적으로 세계 제 1위의 자리를 오늘로 중국에게 넘겨준 날이라는 기사입니다. 2000년도에 중국의 3배 규모였던 미국경제 규모가 2014년 12월 4일자로 중국보다 적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세계경제 지표를 발표하는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상품과 서비스 생산규모에 있어 올해 17.6조 달러를 기록한 중국이 17.4조 달러를 기록한 미국을 앞섰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 경제 점유율로 따지면 중국이 16.5%로 16.3%인 미국을 앞선 결과라고 합니다.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말이 딱히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제대로 적응못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 기사였답니다.

그리고 어제 한국의 ‘일등 인터넷 뉴스’라고 자처하는 조선닷컴에 한때 탑뉴스로 떠있던 기사의 제목입니다. <탈북여성 5人 “신은미·황선 끝장토론하자”> 그리고 그 아래 붙어있던 소제목들입니다. “재미 교포 관광객 오면 한달간 수업 중단하고 연습”, “’평양 원정 출산’ 황선씨는 최상류층 이용 평양산원… 난 보일러실서 몸 풀었다”

기사의 내용인즉은 최근 남한에서 통일토크 콘서트를 하는 연사들인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 황선씨는 탈북여성 5인의 시각으로 보니 영락없는 종북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북에서 살다가 남으로 온 자신들(탈북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겨우 북한에 여행이나 다녀온 주제에 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니 우습다는 것이고, 그들(신은미, 황선)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 탈북여성 다섯 명은 2002~2007년 사이에 탈북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황선씨는 2005 10월 북한에 방문했고 당시 평양에서 출산을 해 화제가 됐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은미씨는  2011년 10월 첫 방문을 시작으로 2013년 9월까지 여섯번 북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그런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라본 북한에 대한 느낌을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콘서트를 진행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들이 영락없이 종북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듯 합니다. 아무렴 그들이 틀림없이 종북주의자들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이미 꽤나 많을 것입니다. 일등 신문인 조선일보가 발벗고 나섰는데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한편 오마이뉴스는 이런 상황을 맞게 된 당사자인 신은미씨와 황선씨의 기자회견 현장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신은미씨가 말한 한 대목입니다.

“종편에서 저를 난도질하고, 이렇게 빨갱이, 종북이 곧 빨갱이더라고요. 빨갱이로 몰아부쳐서 친정, 시댁, 친구, 친지 다 관계가 단절됐습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 민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언론이십니까… 이렇게 (제가) 그대로 가면 ‘(종편 등 보수언론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간다’고 박수하겠죠.”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일상적인 관계에서 단절당한 왕따가 되어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가 보도하고 있는 각기 다른 두개의 뉴스야말로 “종북주의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나 한인 동포 사회나 일단 “종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왕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어떤 사람이 종북행위를 했느냐 안했느냐, 종북적 사고를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단지 “종북주의자”라는 낙인은 어떤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왕따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누군가 또는 특정한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를 종북주의자 또는 종북단체로 만들기는 아주 쉽습니다. 왕따를 시켜버리면 그만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다섯명의 탈북여성처럼 일단 왕따로 찍힌 사람이나 단체에게 화살을 날려줄 전위대들은 차고 넘칩니다. 일부 탈북자들을 위시해 어버이연합 등 실체가 빤한 실로 딱한 이들로 부터, 김영환, 하태경, 김지하류의 자기상실 환자들, 국회의원 김진태 부류의 완장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완장들을 부리는 그 놈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오늘자 MarketWatch 보도에 따르면 당장 내일, 내년 또는 수년래에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200년 동안 지구상 최강대국이었던 미국이 옛날 영화를 누렸던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덧붙입니다.

중국보다 세 배나 앞서있던 미국이 중국에게 추월을 허용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4년입니다.

남한보다 세 배나 앞서 달리던 북한이 남한에 비해 40분의 1 수준으로 몰락하는데 걸린 시간은 50년입니다.

도대체 있지도 않는 종북주의자들을 양산해 내어 왕따군(群)들을 키우는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겝니다.,

“오늘 왕따로 사는 사람들은 복이 있을진저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므로”라는 믿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 놈들 – 1

비록 라디오가 뒷전으로 물러앉은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애호가들을 위한 FM방송이나 최근 유행하는 팟캐스트같은 신종 라디오의 위세는 여전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제 어린 시절의 진공관 라디오가 누렸던 위세에 비하면 많이 퇴락한 셈입니다.

김일, 장영철 등이 나오는 프로레슬링을 보노라고 동네 유일하게 흑백 텔레비가 있었던 쌍둥이네 집으로 몰려갔던 제 또래 아이들과 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서울 신촌이었답니다.

진공관 라디오그 무렵 대세는 라디오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알지도 못하고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주인공 아로운은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있답니다. 한명숙, 현미, 이금희, 위키리, 최희준에 이어 배호까지 다 이 라디오를 통해 섭렵하였습니다. 장소팔, 고춘자에 이어 구봉서, 곽규석,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떳어도…’의 서영춘 까지도 아무렴 라디오였답니다. 아직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 진공관 라디오였답니다.

그 무렵부터 제가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갔다오고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까지 라디오를 지킨 프로그램이 하나 있답니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5분 드라마랍니다.

제 또래치고 이 라디오 프로그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듯합니다. 제 머리가 굵어지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시대가 된 이후로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지만, 1960년대만 하여도 ‘두만강 푸른 물에…’에 함께 아주 귀에 익은 방송이었답니다.

내용은 거의 엇비슷해서 지옥같은 북한 인민들의 삶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리면서 천리마운동이라는 노동에 혹사 당하고 공산당 압제에 신음하는 북의 인민들의 모습을 김삿갓이라는 인물이 고발하고 풍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제 또래나 이즈음 한국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어버이연합에 속한 분들과 같은 세대 사람의 기억속에는 이 방송이 심어준 북한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깊이 남아 있을겝니다.

그리고 이제 2014년 스마트폰 전성시대에 서서 그 때를 돌아봅니다. 1960년대 일인당 GNP가 북한은 325달러, 남한은 94달러였답니다. 거의 3.5배가 차이가 났답니다. 바로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드라마가 시작하던 무렵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그 무렵만해도 북은 지금과 달리 어느 정도 분배에 있어서 평등이 이루어졌던 시절이었고, 남한은 부(富)의 쏠림 현상이 오늘과 못지 않았으므로 보통의 북의 인민과 남의 국민을 대비해 본다면 당시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방송내용은 명백한 허위였습니다.

거짓이거나 말거나 남에서 살았던 저와 같은 사람들은 북은 사람살 곳이 못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답니다.

제가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치며 군생활을 할 때인 1970년대 중반까지도 북이 남쪽보다 경제력에서 앞서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그 무렵 전방부대 중대장이나 대대장의 월북소식이 쉬쉬하며 장병들 사이에 떠돌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 남북의 경제적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입니다.

그리고 2014년 현재 기준으로 본다면 남한은 1인당 소득 28,739달러, 경제 규모는 1조 4,400억 달러인 반면에 북한은 1인당 소득 506달러, 경제 규모는 2012년 기준 123억 달러랍니다. 도저히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차이의 수치입니다.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2011년 한 해 북한 전체 예산은 2020억원이었는데, 2014년 남한의 종로구 한해 예산은 2980억원이었답니다. 정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랍니다.

진공관 라디오 시대였던 1960년대에 3.5배 앞서있던 북한이 2014년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러 남한의 1/40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지나간 50년의 과정이 이랬니? 저랬니?하며 따져 볼 이유도 없이 2014년 오늘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남에 사는 국민들 가운데 북의 인민을 부러워 하거나 북의 지배체제를 받들거나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그건 정말 정신나간 사람들이 아닐까요?

일테면 나보다 3.5배나 잘 살던 사람이었는데 50년이 흐른 후 보니 내가 그 사람보다 40배나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그 사람의 지금의 삶을 부러워한다? 도대체 말이 됩니까?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아무리 상식을 뛰어넘어 생각을 해보아도 남한 국민들 가운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종북(從北)주의자’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남한에서도, 이곳 이민자들의 동포사회에서도 말입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뿌리내리고자 이민 온 미국 동포 중에 신은미라는 분도 종북주의자라고 하는 뉴스를 보았답니다. 그 이가 북을 다녀온 모양이고, 거기에서 사람사는 모습들을 ‘오마이 뉴스’라는 남한 정부가 허락한 매체에 기고를 했고, 그 글을 즐겨 읽은 이들이 제법되었고, 그래 책도 내고  토크 컨서트라는 행사도 한 모양입니다.

오마이 뉴스에 기고한 그이의 글을 읽어보니 2014년을 스마트폰 전성시대로 사는 그이는 당연히 스마트폰으로 찍은 북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답니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들었다고 생각한 남한의 정부 당국과 1960대로 살아가려는 일부 세력들은 신은미씨가 진공관 라디오시대의 <김삿갓 북한 방랑기>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종북주의자라고 한답니다.

2014년 이 문명의 시대, 선진조국 대한민국에서 진공관 라디오 시대로 살고자 하는 놈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