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부끄러움

화창한 시월 일요일 오후입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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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을 담은 동네 어귀 개울물도 참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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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이른 가을 오후를 만끽하며 그렇게 걸었습니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흐를즈음 다시 들어서는 집뜰에는 가을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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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으며 제 머리속에 오간 몇 가지 생각들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모처럼 교회 예배에 참석했었답니다. 오늘 주일 설교 본문이었던 성경 말씀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답니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동네에 사는 귀신 들린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누가복음 8: 27)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 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였다.”(누가복음 8: 35)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예수가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성서 본문을 들어 “옷을 입지 않았”던 귀신 들린 상태에서 “옷을 입”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온 모습을 대비하며 “성령의 새 옷을 입은” 신앙인의 모습을 일깨우는 설교 말씀이 이어졌었습니다.

걷는 동안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아래 가려야하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옷은 패션의 상징이기 이전에 부끄러움을 가리는 상징입니다. 가린다는 말은 숨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릴 줄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걸음과 함께 제 머리속에는 부끄러움이 드러날수록 오히려 목청이 커지고, 부리는 권세의 칼날을 더욱 번득이는 이즈음 세태들이 이어졌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모하메드. 그 모두의 시작은 “신앞에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에서였습니다.

오늘 이 순간 저 푸른 하늘 아래서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남의 부끄러움”만을 탓하는 세상은 모두 가짜입니다.

무릇 모든 참된 신앙의 바탕은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고, 가릴 줄 아는 일입니다.

잊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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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 일어났던 세월호 집단 생수장사건으로 죽은 이들의 유가족들이 아직도 길거리에서 하루해를 맞고있다고 합니다. 낙엽지는 이 가을에 말입니다.

이제는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다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 유가족들 때문에 나라살림이 절단날 것 같다고 목청 높이는 이들도 있답니다.

시체장사라는 말에서부터 매국노, 종북 좌빨까지 유가족들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언사들도 날로 거칠어지기만 합니다.

유가족들과 유가족들을 대하는 권력과의 힘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가족들을 포함하여 그들과 뜻을 같이하려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힘의 합보다 수천, 수만 배의 힘을 가지고 있는 쪽은 이른바 국가의 공권력과 언론 권력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른바 여론 쪽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마치 힘의 균형이 팽팽한 것처럼 거짓 정황들을 만들어 놓고는 차마 사람의 탈을 쓰고는 뱉어내서 안될 언사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마치 세월호에 대한 기억의 싹수를 도려내고야 말듯한 기세입니다.

이럴 때, 약한 자들이 힘을 잃지 않고 뜻을 지켜내는 방안은 “잊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는” 일입니다. 바로 잊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연대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