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들, 목사 김홍도 그리고 구원

제가 사는 곳은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 마음만 먹으면 일년 내내 가족이외의 한국인들과는 말섞지 않고도 살 수 있답니다. 그런데  어디 사는게 두부모 자르듯 할 수 있나요. 그래 주일이면 교회도 다니게 되고, 이런 저런 한인들 모임에도 참석하게 되면서 한국인들과 섞여 사는 것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많아야 한달에 한 두번 정도이지 그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답니다.

어쩌다 이웃한 대도시인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국마켓에 나가게 되는 일이 있답니다. 이즈음은 동네 마켓(미국인들을 위한)에만 가도 제 입맛에 맛는 찬거리들이 널려 있는지라 굳이 한국마켓을 찾을 일도 그리 많지 않답니다.

아무튼 한국마켓 앞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일요일 오후에 장을 보러 나선 길이면 거의 만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거리 선교(전도)단”입니다. 그들이 호객행위하듯 묻는 물음이지요.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가세요?”, “구원 받으셨나요?” 등등 말입니다.

자! 이쯤에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합니다.

기독교(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에서 ‘구원’은 신앙 곧 믿음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곧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고(여기고, 판단하고, 또는 믿고) 시작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 이래 오늘날까지 이 땅에서 살아 숨쉬는 경험을 한 모든 이들은 죄인이라는 전제아래 믿음이 시작되는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단  한사람만을 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지요.

죄인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믿으면 ‘구원’을 받고 형벌을 면할 수 있다는  전제로 믿음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 대상은 지구상에 모든 인간들입니다. 예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잠시 숨쉬고 살다가는 모든 인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형벌을 면하게 해주고 ‘구원’을 주는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야훼(여호와)라고 부르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해가 생긴 이래 해가 없어지는 순간까지 숨 붙어 있던 모든 목숨 가운데 단 한 사람 예수는 야훼와 동급인 구원자입니다.

자!  이제 “단 하나”로 묶인 “둘”입니다. ‘야훼’와 ‘예수’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 그 누구도 이 야훼와 예수를 실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야훼’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른바 “삼위일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은 만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입니다. 바로 믿음의 시작이자 종교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 교리를 믿는 신앙인이자 예수쟁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며 살아왔고, 그 믿음으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이쯤,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 하나의 신 ‘야훼’, 단 사람 예외인 ‘예수’, 그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단 하나의 고리 ‘성령’ – 사람이 끼어 들데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여기 그 누구라도 사람 이름이 끼여든다면 그것은 이미 사기이고, 삼위일체인 신과 예수와 성령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쯤 정리를 하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고 싶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신을 믿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구원의 주체는 신입니다. 인간은 그저 그에게 맡기면 됩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럼 이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어디 여기서 끝나나요?

오래 살고 싶다.  더 갖고 살고 싶다. 남보다는 더 멋지고 낫게 살고 싶다. 걱정없이 살고 싶다. 남들 위에서 살고 싶다. – 등등의 욕망들이 살아있기에 꿈틀거리기 마련이지요.

이 지점에서 ‘구원’과 ‘믿음’은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어 사기꾼들을 양산하게 되고, 제 스스로 그 사기에 빠져 삶과 죽음의 모습까지 망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영역, 곧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 대해 사람이 말하고 한정짓는 모든 일은 모두 “사기(詐欺)”입니다. 그것은 다만 신의 영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파괴, 살인, 살상, 전쟁을 비롯하여 개인적 부귀영화와 죽음 이후의 천당을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기입니다.

다만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사는 이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들, 곧 손에 잡을 수도 있고, 실현시킬 수도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이게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원’은 ‘말’이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한국 마켓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믿으면 구원 받아요!”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일요일 아침이면 숱한 목사들이 뱉어내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바로 오늘 나와 당신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영역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깔아 뭉개는 그 어떤 신앙과 종교행위는 모두 사기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케 하셨다.”  – 누가복음 4 : 18

오늘 뉴스를 훑어 보가다 머리 속을 스처지나간 생각들입니다.

자신이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상황이 닥쳐오고, 분명 그 상황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외치려는 목소리를 누르고 억압하고, 끝내 한을 안고 주저않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 때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소리는 어떻게 다가갈까?

그 ‘구원’의 소리가 오늘 여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고발, 항거, 개혁, 투쟁으로 나아간다면 믿음이요, 그 누군가인 사람에게 의지하여 자기만족에 족한다하면 사기당하는 일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땅에 널린 김홍도목사 아류들과 세월호 유가족들 그리고 구원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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