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으로 엮어진 만 7년간의 군대생활은 1957년 8월 16일 육군소령으로서의 진급명령과 제대비 8천 원이 덧붙여진 223848 군번의 예편통지서를 받아든 것으로 그 지루했던 막을 내렸다.
1950년 8월 16일 입대했을 때 스물 두 살이던 철부지 젊은이는 스물 여덟 살의 고민하는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으로서 이 나라와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거의 무조건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던 개체의 내면에서는,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회의하고 질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된 가치를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는 종교같은 신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 변화를 분명히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고 하나의 되살아남이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작고하신 리영희선생님께서 1984년에 쓰신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의 마지막 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6.25 전쟁체험을 자전적으로 엮은 글입니다. 선생께서는 이 자전적 이야기에서 줄곧 “나”라는 화자(話者)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러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글의 화자를 “그”라고 객관화 시킵니다.
그 시점부터 리영희선생님의 삶은 “나”라는 자기 중심적 삶에서 “그”라는 공동체적 삶으로 바뀝니다. 그 공동체를 정의하여 리선생님은 “민족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는 “진실을 찾는 공동체” 안에 자신을 객관화시켰습니다.
그 이후 그가 걸어온 언론인과 학자로서의 길은 바로 그런 자기 객관화의 삶이었습니다.
같은 시대의 인물로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님이 계십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역시 자신을 민족과 민중 속에서 객관화 시키기 전까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져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편안하게 많은 것 누리시며 사시다 가셨을 수도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스스로 고난의 짐을 메고 사시다 가셨습니다.
리영희선생님은 평북출신의 피난민이었습니다.
이즈음 70여년 전 서북청년단 흉내내기에 빠진 미친놈들 뉴스를 보다가 떠올려본 두 분 선생님 이야기였습니다.
리선생님께서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에 남기신 이야기 하나 더 소개 드립니다.
“동물적 생존본능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이 그 후 경험하고 목격하게 된 무식한 사병들이나 형무소의 파렴치 잡범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쓸쓸한 심정이었다. – 중략 – 이런 동물화된 인간군의 상태는 그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
이즈음 세월호 집단 수장사건의 처리과정 모습은 바로 이런 “동물적 생존본능”이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한 한 양태일 것입니다.
혹자는 리영희선생님나 송건호선생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패로 규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거의 광기에 빠져있는 이즘 세태로 보자면 분명 실패로 규정지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리영희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의 경지에 이르고보면, 그 즐거움이 여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맛본 사람들만의 몫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이런 충족하고 만족한 삶을 꿈꾸며 자유하는 삶을 누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