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뭐가 다를까?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입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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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이 일어난 지도 6개월이 지나 이백일을 맞는답니다.

이즈음은 ‘종북’이라는 신종 효수(梟首)놀음이 유행의 도를 넘은지라.

155년전과 오늘의 다름은 무엇일까요?

걷자 – 잊지 않기 위해

‘록키의 길’ 걸으며 ‘세월호를 기억합니다’

-필라 세사모 주최 ‘세월호 추모 걷기 대회’ -11월 9일 필라 페어마운트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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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기를 바라며 갖은 노력을 하는 박근혜 정부의 노력과는 달리 해외 동포들의 세월호 기억하기는 그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매주 세월호를 기억하고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일인시위가 벌어지는가하면 런던, 뉴욕 맨해튼, 조지아 아틀란타 등지에서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자유와 독립의 도시 필라델피아에서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걷기대회가 개최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 사람들의 모임’(이하 필라세사모)은 오는 11월 9일(일) 오후 2시 필라델피아 페어마운트 공원에 위치한 켈리드라이브에서 ‘세월호 침몰 참사 희생자 추모 걷기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필라세사모는 “세월호 침몰 참사가 발생한지 6개월이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주변은 세월호 진상규명의 외침조차 식상해하며 잊고 싶은 과거사가 되어가고 있다”며 “침몰 당시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어선 안 되며 ‘잊지말자’는 전 국민적 결의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경기불황의 원인조차 세월호로 돌리는 몰지각하고 비이성적인 상황이 일상화되고 있다”고 현 상황을 통렬하게 비판한 뒤 “이런 몰상식의 흐름을 차단하고 무모하게 희생된 넋들을 추모하는 추모걷기대회를 준비한다”고 추모행사의 배경을 설명했다.

세사모 관계자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는 분, 함께 용기를 내고 싶은 분들의 동참을 호소한다”며 “무고히 희생된 어린학생들의 진혼과 아직도 구조되지 못한 분들의 귀환과 진상규명을 위해 아직도 거리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드리며 우리 조국이 더 안전하고 사람을 중심에 두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동포들의 참여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이번 행사는 해외에서의 추모행사를 주도해온 미시 유에스에이 및 세사모를 종북으로 몰아가려는 시도가 가속화되고 한국의 극우단체들이 미시 유에스에이 관계자들을 고발하는 등 미주 동포들에 대한 탄압이 더해지고 있는 가운데 열리는 행사여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해외동포들의 세월호 진상규명과 추모 의지가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결연해지고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걷기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페어마운트 파크 Lloyd Hall 1 Boathouse Row이며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특히 걷기대회가 열리는 페어마운트 공원 내 켈리드라이브는 강을 끼고 열린 길로 미국 내 10대 아름다운 조깅코스로도 유명한 곳이며 영화 록키에서 록키가 아침에 로드워크를 하던 장면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또한 주변에 미국 4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필라델피아 아트뮤지엄과 로뎅의 진품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는 로뎅 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어 매주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으로 이번 추모 걷기대회가 많은 홍보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추모걷기대회 관계자는 “가족들끼리 모처럼 나들이를 나오기에도 좋은 곳”이라며 “ 추모걷기대회에도 참석하고 가족들끼리 박물관 구경이나 나들이를 하는 것도 좋은 기회”라며 많은 참석을 당부하기도 했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전화 484-557-0531, 215-430-3128으로 연락하거나 또는 이메일 [email protected]으로 문의하면 된다.

–       이상 <뉴스프로> 기사에서

*** 잊지 않는다는 몸짓으로 걷기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생애 최고의 가을

제목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대로 가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가을 오후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작은 사업체를 접고 은퇴 수순을 접는듯하던 벗이 땅을 일구기 시작한 것은 올 봄이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초대를 받았답니다.

그가 일구어 낸 농장에서 정말 찐하고 멋진 쐬주 한잔 붓고 마셨답니다.

가을, 맑은 하늘, 고추, 무우, 배추, 호밀 밭…

갓 따온 상추, 고추에 돼지 바베큐. 그리고 쐬주 한 잔!

정말 간만에 “Wolly Bully”에 맞추어 몸을 뒤튼 벗들의 모습이 아니어도 그저 좋은 가을 오후였답니다.

그 흥에 취해 있다가 상추 비닐 농장으로 들어가는 벗을 따랐답니다.

가을잠바로는 서늘한 기운이 도는 오후였는데 비닐농장의 거적을 벗기자 훅 다가온 열기를 맞으며 든 생각 하나랍니다.

오늘 쐬주 한잔은 환갑 나이에 허리 아픈 줄 모르고 한해 내내 땅을 일군 벗의 땀이라는 생각이었답니다.

제가 정말 멋진 가을 오후를 즐긴 까닭이랍니다.

돌아와, 제 차 트렁크에 가득 실린 무우를 보며 벗의 한 해를 몽DSC01797땅 뺏어온 미안함으로 여간해서는 먹지 않는 생무우를 한 입 베어 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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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해서 아름다운 어느 목사의 청원

어느 사이에 서른 다섯해가 지났습니다. 간간히 소식은 주고 받았지만 얼굴 뵌지가 그리 되었답니다. 홍길복목사님이십니다.

조만간 뵈올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변함없이 여전하신 목사님의 올곧게 고집센 모습을  뵈었답니다. 홍목사님의 고집센 모습을  이곳을 방문해 주신 분들과 함께 합니다. 다음은 홍목사님께서 교회에 청원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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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목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을 빕니다.

항상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베풀어 주시는 크신 사랑과 기도에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의 신구목사 이 취임식을 앞에 두고, 몇 일 전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의 ‘원로목사 추대 사양’의 글월을 드렸습니다. 하오나 지난 주일 1부 예배 후, 배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는 저를 따로 만나 아주 간곡한 마음으로 저의 사양하는 그 뜻을 거두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제는 배목사님 내외분께서 제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 심방을 오셨다가 제가 꼭 원로목사로 그냥 남아 있어서 원로와 후임 사이에 후배들과 시드니 교민 교회에 좋은 모델을 보여 주십사 하면서 아주 간곡히 부탁 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랑과 진지함과 겸손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월을 다시 드리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귀 교회의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더 확고하게 전해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혹시라도 배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간곡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홍목사가 마음을 돌이켰으리라고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는 뜻은 이미 지난 번 글월에서 다 말씀 드렸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좋은 의도를 갖고 드린 말씀이 다시 반복되어서 오히려 말 만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 원로목사추대를 사양합니다.

아울러 한가지 더 간절히 부탁 드리옵기는 오는 4월 신구목사 이 취임식은 시드니 우리교회 제 2대 담임목사 취임에 촛점이 마추어지기를  바랍니다. 은퇴하는 사람은 조용히 떠나가는 것이 아름답고 보기에 좋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제 무대의 중앙에 서서 조명을 받아서는 않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제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부터 정말로 존경 받을 수 있는 한가지 길이기도 합니다. 좀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제가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존경의 기회를 막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백방으로 원로목사 추대를 간청하였고 본인은 진심으로 사양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제 이후 촛점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비젼,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이제 무대의 뒷 편에서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예배와 예식 역시 취임식에다 초점을 마추어서 준비 해 주십시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람을 위하여 지난 날 온갖 섬김과 헌신, 사랑과 기도로 지원 해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더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제는 이 원로목사추대 건을 가지고는 다시 말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일도 자꾸 말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마음에 상처를 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우리 배진태 목사님의 깊은 마음과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장로님들께서는 지난 날 저에게 해 주셨던 것 처럼 배목사님을 대해 주시고 목사님을 중심 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시어서 끝까지 주님과 우리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겨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홍길복드림

홍목사님 참조기사 : 시드니 예수마을 강연회

빈들에서 보낸 초대장

<바닥이 하늘이다. 빈들이 희망이다.> – 주초에 받아 본 어느 초대장에 적힌 첫 글입니다.

해마다 받는 초대입니다. 대한민국 대전시에 있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빈들교회에서 보낸 초대장입니다.

김규복목사가 그 공동체를 일구어온지 올해 서른해가 되었답니다. 올곧게 외길을 걸어온 벗을 생각하며 이곳을 방문해 주신 당신에게도 초대장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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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글

예수와 함께  민중과 더불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하여

섬기고 나누고 희생하는 공동체

 

낮게 작게 느리게,

가난하고 겸손하고 소박하게,

그러나 참되고, 끝까지 기쁘게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고

보잘것없는 것이 존귀한 것이고

작은 것이 아름답고,

바닥이 하늘이다.

 

가난이 축복이고, 고난이 영광이고

죽음이 생명이고, 희생이 영생이다.

 

대전 대화동 빈들교회가

3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며 춤추며 불렀던 노래입니다

 

아무에게나 손벌리지 않고

꼬리표 붙은 나쁜 돈 바라지 않고

힘있는 자에게 기대거나 줄서지 않고

사람과 조직과 인기에 집착하지 않고

 

날마다 바닥을 긁어 나누고

차라리 자신의 살과 피를 떼어 주고

땀과 눈물을 함께 흘리며

강물이 흐르듯 한눈 팔지 않고

앞만보고 달려온 길 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눈을 뜨고 귀가 뚫리고

손발에 힘을 얻고

희망과 감사를 가득 안고 돌아갔으나

 

어떤 이는 힘들어서 돌아가고

어떤 이는 이해못해 돌아가고

어떤 이는 상처받고 돌아서고

어떤 이는 실망하고 돌아서고

 

어떤 이는 마리아가 되고, 니고데모가 되고, 베드로가 되고

어떤 이는 삭개오가 되고, 마르다가 되고, 가롯 유다가 되고

어떤 이는 구레네 시몬이 되고, 막달라 마리아가 되고, 백부장이 되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라합처럼

남은 자는

오직 12척의 배와 같은 작은 사람들

 

승리한 패배자들

성공한 실패자들

지혜로운 바보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진리와 자유와 평화와 생명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갈 남은 10년의 힘찬 시작을 위하여

 

얼굴 한 번 보고

손 한 번 잡아주길

차 한 잔 정성껏 차려놓고

함께 부를 노래 몇 곡 준비하고

님들을 기다리겠습니다.

 

1. 빈들교회와 함께 하는 날 – 사랑의 찻집

2014년 10월 20일(월) 10-22시

까페 수다떠는 도서관 (한밭도서관 앞)

 

2. 빈들의 열린 문화제 – 섬김과 나눔과 십자가의 노래

2014년 10월 28일(화) 저녁 7시

한남대 56주년기념관 서의필홀

 

3. 빈들교회 창립 30주년 감사예배

2014년 11월 23일(일 오후 4시

대화동 빈들교회당

 

빈들바람 김규복 목사

빈들교회 창립 30주년 감사마당 준비위원회

 

<공동체 후원하기

천사계좌:우리은행(김규복)

563-039690-02-004

www.seomna.or.kr >

초대1

초대2

가을과 부끄러움

화창한 시월 일요일 오후입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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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을 담은 동네 어귀 개울물도 참 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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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이른 가을 오후를 만끽하며 그렇게 걸었습니다.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흐를즈음 다시 들어서는 집뜰에는 가을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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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으며 제 머리속에 오간 몇 가지 생각들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모처럼 교회 예배에 참석했었답니다. 오늘 주일 설교 본문이었던 성경 말씀이 머리 속을 오락가락했답니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동네에 사는 귀신 들린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누가복음 8: 27)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 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두려워하였다.”(누가복음 8: 35)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예수가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성서 본문을 들어 “옷을 입지 않았”던 귀신 들린 상태에서 “옷을 입”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온 모습을 대비하며 “성령의 새 옷을 입은” 신앙인의 모습을 일깨우는 설교 말씀이 이어졌었습니다.

걷는 동안 구름 한점없는 맑은 하늘아래 가려야하는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옷은 패션의 상징이기 이전에 부끄러움을 가리는 상징입니다. 가린다는 말은 숨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릴 줄 안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걸음과 함께 제 머리속에는 부끄러움이 드러날수록 오히려 목청이 커지고, 부리는 권세의 칼날을 더욱 번득이는 이즈음 세태들이 이어졌습니다.

모세와 예수와 모하메드. 그 모두의 시작은 “신앞에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에서였습니다.

오늘 이 순간 저 푸른 하늘 아래서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남의 부끄러움”만을 탓하는 세상은 모두 가짜입니다.

무릇 모든 참된 신앙의 바탕은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고, 가릴 줄 아는 일입니다.

잊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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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 일어났던 세월호 집단 생수장사건으로 죽은 이들의 유가족들이 아직도 길거리에서 하루해를 맞고있다고 합니다. 낙엽지는 이 가을에 말입니다.

이제는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다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 유가족들 때문에 나라살림이 절단날 것 같다고 목청 높이는 이들도 있답니다.

시체장사라는 말에서부터 매국노, 종북 좌빨까지 유가족들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언사들도 날로 거칠어지기만 합니다.

유가족들과 유가족들을 대하는 권력과의 힘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가족들을 포함하여 그들과 뜻을 같이하려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힘의 합보다 수천, 수만 배의 힘을 가지고 있는 쪽은 이른바 국가의 공권력과 언론 권력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른바 여론 쪽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마치 힘의 균형이 팽팽한 것처럼 거짓 정황들을 만들어 놓고는 차마 사람의 탈을 쓰고는 뱉어내서 안될 언사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마치 세월호에 대한 기억의 싹수를 도려내고야 말듯한 기세입니다.

이럴 때, 약한 자들이 힘을 잃지 않고 뜻을 지켜내는 방안은 “잊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는” 일입니다. 바로 잊지 않는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 연대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주일아침, 두편의 시(詩)

뜰에 가을이 밀려든 주일아침입니다.

이 아침도 제 삶이나 세상 소식들은 그저 일상의 연속입니다. 딱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아침에 느끼는 허전함 말입니다.

그렇게 손에 든 옛 시집을 넘기다가 눈에 꽂힌 시 두편입니다.

차마 버리지 못하는 제 믿음을 확인하며, 일상에 대한 감사를 되찾습니다.

팽목항

풀잎이 하나님에게

–       허형만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우리의 이파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지키소서

야훼, 우리 하나님

태풍이 몰아쳐도 뿌리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불이 번져 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

우리의 햇살을 전과 같이 함께하게 하시고

우리의 새들도 처음처럼 돌려보내주소서

짓밟는 자에게 생명의 귀함을 일깨워주시고

낫질하는 자의 낫은 녹슬게 하소서

야훼, 우리 하나님

우리의 땅은 더욱 기름지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은 버러지로부터 보호해주시고

우리의 뿌리는 더욱 깊이 뻗게 하시며

우리의 하늘은 더욱 푸르르게 하소서.

 

 

–       이탄

돌멩이처럼 굴러 있는 그런 것들의

틈에서 사는 평범한 하루

아침이 왔다 가고 저녁이 왔다 가고

더러는 왔다 갔는지 모르게 가고

아직 한번도

내가 부른 아침, 내가 부른 저녁은 없었지만, 이제 아침이나 저녁은 가족 같은 걸.

 

연기가 새어나오는 틈으로 새어나가듯

틈에서 사는 하루

그래도 보이는 하늘은 넓다.

늘 푸르다.

 

돌멩이처럼 사라져 간들

깨끗한 귀 깨끗한 눈으로

틈을 메우며 살려는 재미.

세월호 유가족들, 목사 김홍도 그리고 구원

제가 사는 곳은 한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 마음만 먹으면 일년 내내 가족이외의 한국인들과는 말섞지 않고도 살 수 있답니다. 그런데  어디 사는게 두부모 자르듯 할 수 있나요. 그래 주일이면 교회도 다니게 되고, 이런 저런 한인들 모임에도 참석하게 되면서 한국인들과 섞여 사는 것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많아야 한달에 한 두번 정도이지 그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답니다.

어쩌다 이웃한 대도시인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국마켓에 나가게 되는 일이 있답니다. 이즈음은 동네 마켓(미국인들을 위한)에만 가도 제 입맛에 맛는 찬거리들이 널려 있는지라 굳이 한국마켓을 찾을 일도 그리 많지 않답니다.

아무튼 한국마켓 앞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일요일 오후에 장을 보러 나선 길이면 거의 만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거리 선교(전도)단”입니다. 그들이 호객행위하듯 묻는 물음이지요.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가세요?”, “구원 받으셨나요?” 등등 말입니다.

자! 이쯤에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합니다.

기독교(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에서 ‘구원’은 신앙 곧 믿음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곧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고(여기고, 판단하고, 또는 믿고) 시작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 이래 오늘날까지 이 땅에서 살아 숨쉬는 경험을 한 모든 이들은 죄인이라는 전제아래 믿음이 시작되는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단  한사람만을 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지요.

죄인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믿으면 ‘구원’을 받고 형벌을 면할 수 있다는  전제로 믿음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는 대상은 지구상에 모든 인간들입니다. 예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잠시 숨쉬고 살다가는 모든 인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형벌을 면하게 해주고 ‘구원’을 주는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야훼(여호와)라고 부르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해가 생긴 이래 해가 없어지는 순간까지 숨 붙어 있던 모든 목숨 가운데 단 한 사람 예수는 야훼와 동급인 구원자입니다.

자!  이제 “단 하나”로 묶인 “둘”입니다. ‘야훼’와 ‘예수’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 그 누구도 이 야훼와 예수를 실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등장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야훼’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른바 “삼위일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은 만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입니다. 바로 믿음의 시작이자 종교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 교리를 믿는 신앙인이자 예수쟁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며 살아왔고, 그 믿음으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이쯤,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 하나의 신 ‘야훼’, 단 사람 예외인 ‘예수’, 그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단 하나의 고리 ‘성령’ – 사람이 끼어 들데가 없는 이름들입니다. 여기 그 누구라도 사람 이름이 끼여든다면 그것은 이미 사기이고, 삼위일체인 신과 예수와 성령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쯤 정리를 하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고 싶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신을 믿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구원의 주체는 신입니다. 인간은 그저 그에게 맡기면 됩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럼 이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어디 여기서 끝나나요?

오래 살고 싶다.  더 갖고 살고 싶다. 남보다는 더 멋지고 낫게 살고 싶다. 걱정없이 살고 싶다. 남들 위에서 살고 싶다. – 등등의 욕망들이 살아있기에 꿈틀거리기 마련이지요.

이 지점에서 ‘구원’과 ‘믿음’은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어 사기꾼들을 양산하게 되고, 제 스스로 그 사기에 빠져 삶과 죽음의 모습까지 망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영역, 곧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곳에 대해 사람이 말하고 한정짓는 모든 일은 모두 “사기(詐欺)”입니다. 그것은 다만 신의 영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파괴, 살인, 살상, 전쟁을 비롯하여 개인적 부귀영화와 죽음 이후의 천당을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기입니다.

다만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사는 이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들, 곧 손에 잡을 수도 있고, 실현시킬 수도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이게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구원’은 ‘말’이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한국 마켓 앞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믿으면 구원 받아요!”하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일요일 아침이면 숱한 목사들이 뱉어내는 그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바로 오늘 나와 당신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영역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깔아 뭉개는 그 어떤 신앙과 종교행위는 모두 사기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케 하셨다.”  – 누가복음 4 : 18

오늘 뉴스를 훑어 보가다 머리 속을 스처지나간 생각들입니다.

자신이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상황이 닥쳐오고, 분명 그 상황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외치려는 목소리를 누르고 억압하고, 끝내 한을 안고 주저않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 때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소리는 어떻게 다가갈까?

그 ‘구원’의 소리가 오늘 여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고발, 항거, 개혁, 투쟁으로 나아간다면 믿음이요, 그 누군가인 사람에게 의지하여 자기만족에 족한다하면 사기당하는 일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땅에 널린 김홍도목사 아류들과 세월호 유가족들 그리고 구원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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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 그의 되살아남

“괴로움으로 엮어진 만 7년간의 군대생활은 1957년 8월 16일 육군소령으로서의 진급명령과 제대비 8천 원이 덧붙여진 223848 군번의 예편통지서를 받아든 것으로 그 지루했던 막을 내렸다.

1950년 8월 16일 입대했을 때 스물 두 살이던 철부지 젊은이는 스물 여덟 살의 고민하는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으로서 이 나라와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거의 무조건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던 개체의 내면에서는,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회의하고 질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된 가치를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는 종교같은 신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 변화를 분명히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고 하나의 되살아남이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리영희작고하신 리영희선생님께서 1984년에 쓰신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의 마지막 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6.25 전쟁체험을 자전적으로 엮은 글입니다. 선생께서는 이 자전적 이야기에서 줄곧 “나”라는 화자(話者)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러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글의 화자를 “그”라고 객관화 시킵니다.

그 시점부터 리영희선생님의 삶은 “나”라는 자기 중심적 삶에서 “그”라는 공동체적 삶으로 바뀝니다. 그 공동체를 정의하여 리선생님은 “민족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는 “진실을 찾는 공동체” 안에 자신을 객관화시켰습니다.

그 이후 그가 걸어온 언론인과 학자로서의 길은 바로 그런 자기 객관화의 삶이었습니다.

같은 시대의 인물로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님이 계십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역시 자신을 민족과 민중 속에서 객관화 시키기 전까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져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편안하게 많은 것 누리시며 사시다 가셨을 수도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스스로 고난의 짐을 메고 사시다 가셨습니다.

리영희선생님은 평북출신의 피난민이었습니다.

이즈음 70여년 전 서북청년단 흉내내기에 빠진 미친놈들 뉴스를 보다가 떠올려본 두 분 선생님 이야기였습니다.

리선생님께서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에 남기신 이야기 하나 더 소개 드립니다.

“동물적 생존본능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이 그 후 경험하고 목격하게 된 무식한 사병들이나 형무소의 파렴치 잡범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쓸쓸한 심정이었다. – 중략 – 이런 동물화된 인간군의 상태는 그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

이즈음 세월호 집단 수장사건의 처리과정 모습은 바로 이런 “동물적 생존본능”이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한 한 양태일 것입니다.

혹자는 리영희선생님나 송건호선생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패로 규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거의 광기에 빠져있는 이즘 세태로 보자면 분명 실패로 규정지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리영희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의 경지에 이르고보면, 그 즐거움이 여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맛본 사람들만의 몫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이런 충족하고 만족한 삶을 꿈꾸며 자유하는 삶을 누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