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行間)을 읽어야 하는 세상

오늘  뉴스들을 훑다보니 북의 김정은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들이 눈에 뜨이는군요. 그가 거의 지난 한달동안(29일) 세상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은 중국발과 이슬람지역발로 무성하게 퍼져 나간다고 합니다. 소문인즉은 북에 쿠테타가 일어나 그가 감금되었다든가 아주 죽었다든가에서부터 심장질환으로 쓰러져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등등의 내용이랍니다.

이런 소문에 남과 북은 함구이고, 중국은 유언비어라며 강력한 부인을 했고, 미국은 아는바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뉴스라인에서 모습을 감춘 김정은에 대한 궁금증이 만들어낸 뉴스들입니다. 허기사 젊은 친구가 그 땅에 사는 제 또래들과는 걸맞지 않게 비대한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걷는 뉴스를 볼 때면 “저 친구 곧 쓰러질 것 같네”라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만, 모를 일이거니와 워낙 숨기는 것을 좋아하는 곳이니 그 진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북의 그(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성 뉴스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남쪽이라고 별로 크게 다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진실”입니다. 각종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고 역시 국제적 뉴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늘 선진화를 부르짖으며 세계 열 몇 번째를 꼽기 좋아하는 자칭 민주주의 국가 수장인 대통령의 시뻘건 대낮 근무시간 7시간 행방이 오리무중이라는 뉴스였지요. 그러다보니 각가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유언비어들이 난무한 것입니다.

이 역시 남쪽의 그(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성 뉴스들일겝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김정은은 29일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박근혜는 그날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소문과 뉴스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쓰고는 합니다.

행간을 읽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곳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세상이지요. 이른바 자유하는 세상이 아닌 것이지요.

제가 청년이었던 1970년대야말로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시대”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답니다.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지요. 여전히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세월인 것을 잊고 산 것 뿐이지요.

신라 48대 임금인 경문왕 때 이야기라니 약 1100년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됐다. 왕후와 궁전의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幞頭-관리가 쓰는 모자)만드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도림사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소리치기를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고 했다.

그 후에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소리를 내어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하였다. 왕이 이것을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면 ´임금 귀가 길다네´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왕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되다´는 당나귀는 미련한 짐승을, 귀는 쇠귀에 경 읽기처럼 무능한 경문왕에게 진실이 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재해와 반란으로 곤궁한 백성들을 헤아리지 않고 대규모 부역동원과 같은 미련한 정책을 강행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한 ´복두´는 왕의 무능과 미련함을 감추는 허위의 상징이요 ´대나무 숲을 베었다´ 함은 여론의 탄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권력은 늘 힘으로 민심을 통제하려 한다는 옛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일이기도 하고요.

행간문제는 최소한 “행간을 읽을 수 있도록”이라도 판을 깔아 주어야 할 이른바 언론들이, 북에는 군사적 힘에 남에는 돈의 힘에 묶여 그저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쁘다보니 그나마도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1,100여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북은 인민이 남은 시민들이 행간이라도 찾아 읽어야 하는 한반도입니다만 여전히 사랑해야만 할 모국이랍니다.

손편지로 정치를?

Ahmad실리콘 밸리 시의회와  San Carlos시의 시장을 지냈던  Omar Ahmad가 제안하는 정치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바로 종이와 펜을 이용해 손편지를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방안입니다.

이런 일이 정치를 바꾸는 방안 가운데 하나로 작동하는 사회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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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 서북청년단

주일 아침, 시간여행을 해봅니다.

인터넷 한겨레에 실린 ‘한영수-서울모던타임즈’ 소개 글을 통해 해보는 여행입니다.

한영수문화재단이 사진집 ‘한영수-서울모던타임즈’를 출간했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작가 한영수(1933-1999)가 담은 1950∼60년대 서울 모습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통해 제 유년과 소년시절을 추억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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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냇가가 모래내는 아니지만 제 유년의 모래내도 이런 풍경이었답니다. 어머니와 동네 아낙들은 잿물을 끓여 빨래를 삶아 냇가에서 두드려 헹구어 풀밭에 널어 말리곤 했답니다. 코흘리개 우리들은 땅을 파고 놀거나 삶은 감자 하나가 주는 행복을 만끽하곤 하였습니다.

5©한영수,서울1956-1963

달구지, 버스, 전차, 시발택시, 그리고 강한 두 다리가 동시에 도로에 놓인 사진은 그 시절 문안(사대문안)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습니다.

8©한영수,서울1956-1963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 타고 다녔던 전차에 대한 추억도 있답니다.

시간여행이 여기까지였으면 행복했을텐데…

선우휘의 테러리스트로 이어진 여행으로하여 주일 아침 기분을 상하고 말았답니다.

2014년 오늘 서울 한복판에 등장했다는 ‘서북청년단’ 사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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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시간을 70년이나 돌려놓는 이런 황당한 일이 실제 2014년 현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기기 않는 일입니다.

오늘날 조선일보의 모습을 공고히한 김대중(조선일보의), 유근일, 조갑제 이전에 그 터를 닦아놓은 이로 선우휘가 있습니다.

그가 쓴 소설 테러리스트가 발표되었던 것은 1956년이었습니다. 선우휘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지만 그가 극단의 반공주의자였음에는 별 이론이 없습니다.

이른바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에서 반공기치의 선봉대였습니다. 전후(한국전쟁후) 남쪽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서북청년단에 속했던 사람들의 목표가 사라집니다. 소설 테러리스트는 그런 류의 청년 세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옛날 서북청년단 전성기 때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인물과 정치깡패로 변신하는 인물 그리고 끝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인물들입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선우휘조차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단체가 바로 서북청년단입니다.

실제 서북청년단에 몸담았던 그 시절의 청춘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의 소모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역사적 사실입니다.

2014년 9월, 서북청년단 글자를 가슴과 등판에 새기고 1950년대로 살아가려는 한심한 인간들에게 소모품이란 말이 가까이 닿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매국?

매국(賣國) : (명사)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음 

모처럼 한국어 사전을 들추어 그 뜻을 찾아 보았습니다. 한국을 떠나온지도 벌써 한 세대가 흐른  시간이 되었으니 행여 제가 뜻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매국에 대한 예제로는 이런 게 있었습니다.

“그는 매국 친일파의 후손이다.”

종일 일을 하면서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말 “매국”이었습니다.

졸지에 제가 매국하는 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국하는 놈, 곧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나라의 주권이나 이익을 남의 나라에 넘기는 것,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익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역적을 일컬어 매국적(賣國賊)이라고 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남의 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일컬어 매국노(賣國奴)라고 한다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국적 또는 매국노라고 불리우는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된 까닭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씨(또는 양 孃(계집 양)가 미국을 방문하는 시점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제게 매국이라는 딱지를 붙여준 이들은 대한민국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 대변인이라는 이와 조선일보입니다.

애초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매도는 예측해온터라 전혀 새로울 일이 아니었답니다. 제 나라 대통령을 지낸 이까지 나라 땅과 바다를 북에 상납한 종북 좌파라고 우기는 사람들인데 하물며 이름조차 내밀 건덕지없는 평범 이하의 사람 하나 종북 좌파로 만든다 한들 그게 무슨 큰 사건이겠습니까?

북의 김정은 입장에서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희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한순간에 삼백명이 넘는 종북 좌파가 뉴욕 맨하턴을 휘젓고 다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있으니 말입니다.

종북 좌파라는 소리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매국”은 참 생소하기도 하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박근혜씨가 사개국어인가 육개국어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는 못한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진 터에 이른바 종박주의자들이 그것조차 따라하느랴고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매국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행위”가 곧 매국입니다.

매국 운운하는 이들이 말하는 교통사고가 나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교통사고가 일어났는지, 그 사고로 인해 꼭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었는지, 행여 그 모두를 살릴 방법은 없었는지, 살릴 수 있었는데 그대로 죽음을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아무리 단순사고라고 하여도 그 사고를 예방, 수습, 처리하는 정부기관들이 있는 법이고, 그들이 그 때 제대로 대응을 한 것이지를 묻는 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여러차례, 하물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까지 “왜?”에서부터 “어떻게?”까지 해결하겠노라 했으면 그거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지으라는 주장이 매국이 되어야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나라 말 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위인들이 정치를 하고, 신문을 만드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무릇 언어습관은 제 버릇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이 모두가 아마 새누리와 조선, 매국(賣國)을 밥 먹듯 해 온 “매국 친일파”라는 자기네들 가계(家系) 탓일 겝니다.

자유하고자

자유

–       김남주(1948-1994)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세월호- 뉴욕시위

어제 큰 맘 먹고 뉴욕 맨하턴을 다녀왔습니다. 맨하턴을 오고가는 길이 꼭 큰 맘을 먹어야만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뜸해졌지만 아직 인터넷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90년대 까지만 하여도 한국소식을 좀 제대로 듣거나, 신간서적이라도 한 줄 냄새를 맡으려고 틈나면 오고가던 길이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서 한때는 한던 일 때문에 거의 매주 한차례씩 오고가던 길이었답니다.

큰 맘 먹었다고 운을 띄운 까닭은 이번에 맨하턴행을 하게 된 연유때문입니다. 다름아닌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행진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1987년 이민을 올 때 여느 이민들과는 다르게 제가 한 일이 하나 있었답니다. 대한민국 정부 앞으로 “나가서 절대 대한민국을 위해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물론 정확한 문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는 내용의 각서를 쓴 일입니다.

그 조건으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이곳 델라웨어라는 작은 마을에 살아 오면서 내 모국인 대한민국을 위해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제 능력껏 이곳에서 더불어 사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알리기 위해 작으나마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비록 큰 일은 하지 못했어도 이곳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아시안계 이민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작은 노력도 기울여 왔습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대한민국 정부를 향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시위에 참가 권유를 받은 적은 여러번 있었어도 단 한번도 참여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쓴 각서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여기에 뼈를 묻을 사람이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종 글이나 말은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 뿐이지 어떤 운동으로써 행위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려면 다시 보따리 싸서 한국행을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월호집단 생수장 사건은 대한민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참담한 사건은 어디에 살건 오늘날 한국어를 쓰거나 한국적 사고를 지닌 모든 이들의 문제입니다.

그 맘으로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였습니다. 오늘은 사진으로 이야기 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 기차역과 시외버스 정류장(Greyhound)입니다. 조용하지요. 늘 이런 풍경으로 한산한 동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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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라웨어 메모리얼(한국전쟁 참전용사를 기념하는 다리)브리지를 건너며 찍은 델라웨어강입니다. 가끔 이곳이 한강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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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간 사십분만에 도착한 맨하턴입니다. 타임 스퀘어 광장 앞 도로에 엄청난 인파가 시위 중에 있었습니다. 이날 약 31만명이 참여했다는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였습니다. 마치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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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함께해야 할 시위대열에 참여하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겼습니다. 대한민국 뉴욕 총영사관앞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먼저 만났던 시위대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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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열에 섞여 함께 걸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때 신촌에서 시청앞을 걸었던 이래로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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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내와 함께 맨하턴 거리를 거닌 이야기는 뒤로 미룹니다.

나라가 아닌 그들

자신들은  나라라고 하지만  나라 대접 못받는 두 곳. 그나마 Isis 보다는 DPRK가 낫다할까?

영국 수상  Cameron의 정치적  언사에 다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They are not Muslims, they are monsters.”라는 소리는 옳을 듯.

무릇 모든 근본주의, 교조주의는 이미 종교가 아니므로.

그걸 닮지 못해 안달난 내가 속해 있는 그들 역시.

역시 조선일보 – 그 야비함

주일 아침 이런 저런 지나간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변함없이 야비한 조선일보 글줄이 눈에 띕니다. <법정 소란이나 다를 게 없는 어느 판사의 막말>이라는 사설입니다.

‘어느 판사’가 전직 대통령을 죽이고, 현직 검찰총장의 옷을 벗기는 막강한 권력의 눈밖에 난 모양입니다. 바로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입니다.

사설의 내용인즉 김동진 부장판사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거법 무죄, 국정원법 유죄를 선고한 재판에 대한 의견을 법원 게시판에 올렸는데 읽어보니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거의 언어 테러 수준의 인신공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완숙하지 않은 일부 판사가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의 갈 길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을 갖고 있다.”며 “두려운 일이다.”고 맺음을 합니다.

김동진 부장판사가 옷 벗을 날도 얼마 안남은 듯 합니다. “두려운 일”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 조선일보의 행패가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어느 정도 두려운 일인지 김동진 부장판사가 올렸다는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답니다. 두렵기도 할 만한 글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줄 아는 걸 보면 조선일보 아류의 권력이 아주 미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튼 김동진 부장판사의 글을 꼼꼼히 읽고난 후에 하고픈 말 한마디랍니다.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완숙하지 않은 일개 언론(인)이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의 갈 길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을 갖고 있는 사회야말로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모처럼 뉴스에 등장한 황석영선생 말마따나 아직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이 필요한 사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은 김동진 부장판사가 남긴 글의 전문입니다.

K-48

<법치주의는 죽었다>

–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 김동진

판사와 검사의 책무는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권은 때때로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가의 핵심기능을 좌지우지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수결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정신의 한 축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유린하는 것이다.

헌법이 판사와 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하라”고 하는 준엄한 책무를 양 어깨에 지운 것은, 판사와 검사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아니한 채 묵묵히 ‘정의실현(正義實現)’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판사와 검사에게 ‘신뢰(信賴)’를 부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의 심연(深淵)에 있는 출세욕, 재물욕, 공명심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심(私心)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현 정권이 승리하면서 이런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아직도 민간기구(특별조사위원회)에게 수사권과 공소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長文)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

판결문을 모두 읽은 후에,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1) 201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원세훈 국정원장의 계속적인 지시 아래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댓글공작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개입’인 동시에 ‘선거개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 이것은 궤변이다!

(2) 판결문의 표현을 떠나서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3) 재판장은 판결의 결론을 왜 이렇게 내렸을까? 국정원법 위반죄가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실질적인 처벌은 없는 셈이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 이 판결은 ‘정의(正意)’를 위한 판결일까?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 돌아와서, 판사님들과 법원 가족들에게 고사 성어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는 권력을 잡고서 허수아비 왕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치면서 “말(馬)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인 호해는 “왜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고의 편을 들면서 “말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몇 명의 신하들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는데, 환관 조고는 나중에 진실을 말했던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3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3%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법(法)”을 꼽은 응답자는 43%로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 전국의 성인남녀 2937명을 대상으로 한 법률소비자연맹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대답해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 3. 26.자 세계일보 참조).

사법부가 국민들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의 판결』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절망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제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더 큰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여당/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편 가르기” 풍조에 입각하여 나를 향하여 “좌익판사”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편견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나는 판사로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몰락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2014년 추석, 그리고 어느 민란

삼의사2“여기 세우는 이 비(碑)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 대한민국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에 적혀있는 비문입니다.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어록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그가 한국땅을 이륙한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으로 던졌던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후 천주교 서울 대교구장인 염수정추기경은 “(세월호 참사)가족들이 생각하는대로 이루워지면 좋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양보해야 서로 뜻이 합쳐진다.”라는 말로 잠시 뉴스 촛점 인물이 되었었습니다. 마치 교황과는 뜻이 다른듯한 뉴앙스를 풍기는 말이였기 때문입니다.

염추기경의 발언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있는 가운데 눈에 뜨인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오마이뉴스에 실린 백찬홍의 주장 “박근혜 편드는 염수정 추기경,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입니다.

자신(염추기경)의 재임시 남길 또는 남겨야할 업적에 대한 욕심(?)때문에 권력지향성 발언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염수정추기경은 제14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겸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이입니다. 한국천주교 또는 서울대교구하면 떠오르는 상징은 명동성당입니다.

천주교인도 아닌 제가 명동성당을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1978년 이 무렵이었습니다. 오원춘사건 또는 안동교구 카톨릭농민회 사건으로 알려졌던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해 8월 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카톨릭 농민회 사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특별조사령을 발동했을만큼 권력과 천주교가 일대 맞싸움을 벌였던 큰 사건이었습니다. 카톨릭을 빨갱이로 몰았거니와 명동성당을 들락거리는 것만으로도 불순세력이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 고작 일년이 조금 지나서 박정희는 끔직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명동성당 – 한국천주교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상징입니다. 그 명동성당을 세운 사람은 민덕효(閔德孝)입니다. 본명이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인 프랑스 신부입니다.  그는 명동성당 건립뿐만 아니라 신학교 건립 등 한국천주교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이입니다.

그가 남긴 일기 몇 구절을 인용합니다.

“토마스(안중근)의 사형 집행이 26일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시신을 유족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나를 붙잡고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3.1운동 당시 천주교 신학생들을 언급하며 남긴 일기)

그의 일기에서 보듯 그는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기도 했던 철저한 친일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일행각은 바로 그가 생각하는 한국천주교의 발전, 또는 천주교의 발전에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염수정추기경의 발언에서 떠올린 뮈텔 곧 민덕효신부였습니다.

그(뮈텔)가 제 8대 조선교구장으로 있던 때인 1901년 제주도에서는 큰 민란이 일어납니다. 이 민란으로 약 300명이 넘는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제주신축교란(濟州辛丑敎亂)’이라고 부르는데 ‘이재수의 난’으로 알려진 민란입니다.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이 제주도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와 그의 보좌로 조선인 김원영신부를 파견하여 제주에 성당을 건립한 때는 1899년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일, 이년 사이 제주도에 새로 늘기 시작한 천주교도들은 당시 제주도의 권력자들과 손을 맞잡고 행세를 부립니다. 물론 천주교도들의 뒤에는 프랑스라는 외세의 힘이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동안 제주도에서 천주교도들이 저지른  살인, 강간, 유부녀 윤간 등 악행과 만행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들은 진정한 천주교인들이 아니라 당시 권력과 배를 맞춘 현지깡패들이 행한 일들이라고도 합니다.

천주교도(또는 교도를 빙자한 이들)들의 만행과 이들을 보호하는 권력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란이 바로 이재수의 난입니다.

이재수를 비롯한 민란의 주인공들은 제주를 장악하고 삼백명이 넘는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신부들을 참수(斬首)합니다.

이에 프랑스 군대가 움직입니다. 제주도에 프랑스군대가 들어오자 깜작놀란 조선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집니다. 민(民)을 향해  큰소리치고 각종 조세를 부과하며 군림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외국군대 앞에서 속수무책인 조선조정이었습니다.

노예-관노(官奴)- 출신이었던 이재수는 프랑스군대에 짓밟힐 제주도민들을 생각하며 약 일만 여명에 달했던 민란의 주인공들인 저항군을 자진 해체하고 자신은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9일 사형을 당합니다.

후에 제주의 시인(詩人) 문무병은 이 사건을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이라는 장시로 풀어 놓습니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재수는 긴 한숨, 뜨거운 눈물을 마셨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장두(장수)는 외로웠다.

뿔뿔히 흩어지는 군중들. 그러나 당당하게

재수는 관덕정 마루에 올라 외쳤다.

어르신네들, 내 말 들읍서.

이제 우리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싸움은

이 한 목숨 버리면 그만이주마는

태 사룬 땅에 의지가지 없는 것들 배곯아 울고,

늙은 할망은 병들어 누었우다. 우리가

오늘, 이 다 이긴 싸움을 그만 두는 것은

배고프고  병든 식솔들을 살리는 일이고

조상의 땅을 지키는 일이라마씸

다들 집으로 돌아갑서, 헤어지는 마당에

서러운 것은 이 한 목숨 아깝지 않으나

저 불국(프랑스) 잡귀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우다. 다시는 우리 땅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거우다. 이 재수의 눈알은

죽지 않고 살아서 제주땅을 넘보는

축산이들을 지켜볼꺼우다. (축산이: 저승도 못가고 떠도는 배고픈 원귀)

날랑 죽건 펄에다 묻어 줍서.

날랑 죽건 닥밭(닥나무밭)에 묻엉… >

 (*** 이 시에서 닥나무는 양반을 비유해서 쓴 말입니다.)

삼의사 1그리고 그들을 기려 세운 비(碑)가 바로 제주대정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입니다.

2014년 음력 팔월 한가위,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이 명절을 기리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의 피해 유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보며 떠올린 우리네 지난 이야기 하나였습니다.

당시 조선(대한제국) 조정처럼 광장의 유가족들을 이제 곧 흩어질 “이재수의 무리”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권력가들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