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主)떠난 주일아침

주일 아침입니다. 아니 일요일 아침입니다. 이즈음 주(主)가 떠난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청운효자동이 아침에 “자식이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그걸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울분에 찬 목소리를 전하는 뉴스를 봅니다.  137일 째 이어지고 있는 한 서린 목소리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그들의 목소리는 열흘째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어릴 적 그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까닭으로  6년 동안을 걸어 지나 다니던 동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동네의 상징이었던 곳입니다. 단지 평온한 세월이었을 때 말입니다.

1960년 4월 민(民)을 향해 첫 총알이 날아간 곳이 그 동네 거리였으며, 6-70년대 툭하면 쳐지던 군대의 바리케이트와 탱크, 자동화기 등이 가장 먼저 포진했던 곳도 바로 그 동네였습니다.

청운 효자동은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인 동네입니다.

2014년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그 곳에 갇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입니다. 애써 듣지 않으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거니와 그 소리를 죽이고 차단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소리를 비틀어 왜곡하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 소리와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갇힌채 새어 나오는 한맺힌 소리를 듣는 교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는것은  비단 오늘이 주일아침 -제 입에 달린 말이라 스스로 나오는 主(주)입니다.-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137일 동안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거기에 생각이 닿으면 실망과 분노를 넘어 거의 체념에 이르게 됩니다. 과연 2014년 이 지점에서 한국(인)교회에 구원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체념 말입니다. 물론 제가 개신교인이므로 개신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잠잠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입니다. 마치 “가만 있으라!”라는 어떤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듯한 모습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나마 “정의”라는 화두를 던지고 간 천주교황의 행위에서 종교적 위로를 느낀 시간들이있긴 했습니다.

필리핀 빈민 선교에 헌신한 비브 그릭 선교사는 그의 책 “가난한 자들의 친구”에서 정의를 이루는 네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관계에서(곧 일대 일의 사람 사이에서) 정의를 이루는 일 둘째는 쌍방간에(곧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화평과 화해를 이루어 정의를 이루는 일 세번째는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의 운동 단체를 설립하여 정의를 확산 시키는 일 네번 째로는 사회 상류층(사회 모든 분야의 기득권 계층)들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여 정의를 이루는 일이 바로 그가 말한 네 단계입니다.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든 정의(正義)는 사람 사이에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사이에서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한 신(神)은 그저 공허할 뿐입니다. 신의 뜻, 신의 개입이란 바로 사람들의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브 그릭 선교사는 이 지점에서 <만인을 위한 정의>를 외친 존 퍼킨스 목사를 인용합니다.

존 퍼킨스는 보안관 총에 맞아 죽어가는 형을 부뚱켜 안으며 “정의”에 대한 화두를 풀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존 퍼킨스의 말입니다.

“우리의 권리요구는 우리가 희망했던 것처럼 백인공동체를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백인 공동체는 굳게 반대했다. 침대 위에 누워서, 백인들에 대해 적의를 갖고 맞서는 것은 전쟁만 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그것은 사랑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역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아니 적어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또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써의 행위를 성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 에스겔 45: 9, 공동번역

바로 권력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일인 동시에 갇히고 한 맺힌 이들의 목소리를 포악스럽게 짓누르고 한맺힌 소리의 뜻을 왜곡시켜 겁탈하려는 통치자들을 바르게 세워 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이 그리운 일요일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