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전성시대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 못하는 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나 고대 중국 문헌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하며 혀차는 일이 어느 특정한 시대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종종 제가 이해 못하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건 세대나 나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세상” 특히 “한인 사회 – 딱 한국이라고 특정짓지 않는 까닭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에 만연한 어떤 풍습입니다.

바로 세상사는 방법을 재는 잣대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고, 가정, 집단, 지역사회 크게는 국가나 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고 부르든, 집단 이익이라고 부르든 모든 판단 기준이 “나와 우리가 얼마나 차지하고 누리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돈과 권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단  이틀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졌던 화두(話頭)  “정의(正義, justice)” 는 언제적 이야기인지 다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는 방법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즈음에는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한 때 한국에서 정치평론가라는 직업을 내세운 이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직업군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철들어 한국 땅에서 산 세월보다  이민의 세월이 길다보니 낯설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거기도 그런 세월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자못 기쁜 마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내 실망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이들이 평론을 펼치는 잣대야말로 “돈과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수, 진보 또는 여, 야 아니면 친미, 종북 –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그 평론가들이 어떤 블럭에 속해있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잣대는 똑같이 “돈과 권력”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오늘도 열을 올리고 핏대를 세우고 마치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양 싸우고 다투는 척을 합니다.

거짓에 둘려 쌓여, 아니 스스로 쳐 놓은 거짓의 거미줄을 자신들의 밥상으로 여기며 말입니다.

저라고 뭐 별반 다를게 있겠습니까만 그저 느낌 하나 적어보자는 생각이랍니다.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크리스티안 안코비치( Christian Ankowitsch)가 쓰고 박정미가 번역한  리더스 북 발행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제 밥그릇을 더챙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먹고 사는 일에 무슨 도움이 좀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 책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마법>이라는 소제목에 있는 내용입니다.

 

“마케팅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명확한 경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정반대의 내용으로 바뀌는 문제를 연구했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곧바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실험결과 피험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주장이 엄연한 사실로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경고를 덧붙였는데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머릿속에 사실로 새겨지는 현상은 중년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기억이 장난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근거 없음!’이라는 경고보다 더 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메시지는 대부분 기억 속에 아무 문제없이 저장되는 반면 메시지의 앞뒤 맥락, 즉 경고에 대한 기억은 소실되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녹인다는 주장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튼 주장을 의심스러운 홈페이지나 허접한 잡지에서 읽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

이 글을 읽다가 제가 무릎을 쳤답니다.

아하! 우리는 지금 마법에 걸려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답니다.

그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데 능숙한 마법사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그래 제가 예수를 믿는답니다.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살 수 있는 힘이 그 믿음에서 나오므로.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요즈음 젊은 것들은….” 혀를 하며 나무랄 용기 역시 솟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