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主)떠난 주일아침

주일 아침입니다. 아니 일요일 아침입니다. 이즈음 주(主)가 떠난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청운효자동이 아침에 “자식이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그걸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울분에 찬 목소리를 전하는 뉴스를 봅니다.  137일 째 이어지고 있는 한 서린 목소리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그들의 목소리는 열흘째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어릴 적 그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까닭으로  6년 동안을 걸어 지나 다니던 동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동네의 상징이었던 곳입니다. 단지 평온한 세월이었을 때 말입니다.

1960년 4월 민(民)을 향해 첫 총알이 날아간 곳이 그 동네 거리였으며, 6-70년대 툭하면 쳐지던 군대의 바리케이트와 탱크, 자동화기 등이 가장 먼저 포진했던 곳도 바로 그 동네였습니다.

청운 효자동은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인 동네입니다.

2014년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그 곳에 갇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입니다. 애써 듣지 않으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거니와 그 소리를 죽이고 차단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소리를 비틀어 왜곡하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 소리와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갇힌채 새어 나오는 한맺힌 소리를 듣는 교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는것은  비단 오늘이 주일아침 -제 입에 달린 말이라 스스로 나오는 主(주)입니다.-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137일 동안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거기에 생각이 닿으면 실망과 분노를 넘어 거의 체념에 이르게 됩니다. 과연 2014년 이 지점에서 한국(인)교회에 구원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체념 말입니다. 물론 제가 개신교인이므로 개신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잠잠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입니다. 마치 “가만 있으라!”라는 어떤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듯한 모습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나마 “정의”라는 화두를 던지고 간 천주교황의 행위에서 종교적 위로를 느낀 시간들이있긴 했습니다.

필리핀 빈민 선교에 헌신한 비브 그릭 선교사는 그의 책 “가난한 자들의 친구”에서 정의를 이루는 네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관계에서(곧 일대 일의 사람 사이에서) 정의를 이루는 일 둘째는 쌍방간에(곧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화평과 화해를 이루어 정의를 이루는 일 세번째는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의 운동 단체를 설립하여 정의를 확산 시키는 일 네번 째로는 사회 상류층(사회 모든 분야의 기득권 계층)들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여 정의를 이루는 일이 바로 그가 말한 네 단계입니다.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든 정의(正義)는 사람 사이에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사이에서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한 신(神)은 그저 공허할 뿐입니다. 신의 뜻, 신의 개입이란 바로 사람들의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브 그릭 선교사는 이 지점에서 <만인을 위한 정의>를 외친 존 퍼킨스 목사를 인용합니다.

존 퍼킨스는 보안관 총에 맞아 죽어가는 형을 부뚱켜 안으며 “정의”에 대한 화두를 풀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존 퍼킨스의 말입니다.

“우리의 권리요구는 우리가 희망했던 것처럼 백인공동체를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백인 공동체는 굳게 반대했다. 침대 위에 누워서, 백인들에 대해 적의를 갖고 맞서는 것은 전쟁만 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그것은 사랑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역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아니 적어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또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써의 행위를 성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 에스겔 45: 9, 공동번역

바로 권력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일인 동시에 갇히고 한 맺힌 이들의 목소리를 포악스럽게 짓누르고 한맺힌 소리의 뜻을 왜곡시켜 겁탈하려는 통치자들을 바르게 세워 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이 그리운 일요일 아침입니다.

40 그리고 믿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40일 동안 낮과 밤을 연속해 비를 내렸다. – 노아의 홍수

하나님은 히브리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케 했다. – 출애굽 이야기

모세는 야훼 하나님에게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지냈다.  – 십계명 이야기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천사가 주는 음식(아마도 물과 소금이었을 듯)만 먹고 40일을 보냈다. – 엘리야 이야기

에스겔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을 벌을 상징하는 뜻으로 40일 동안 옆으로 누워 지냈다. – 에스겔 이야기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하였다. – 예수 이야기

예수는 부활 후 40일 만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 예수 승천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하고  일년 교회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순절(四旬節) – 바로 40일입니다.

유대교, 유대인들의 전통과 오늘날 천주교와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그 뜻이 깊습니다.

성서를 중심으로한 사고 체게에 있어 상징적인 숫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일신의 1이라는 숫자, 삼위 일체의 3이라는 숫자, 십계명의 10, 이스라엘 부족과 신약의 예수 제자들의 숫자인 12,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숫자 40, 하나 더 첨부하자면 예수의 나이 33  등등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숫자들의 개념을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개념과 똑같이 이해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영역입니다.

일테면 40일 동안 누가 무엇을 했고, 40년 동안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하는 이야기들에서 실제로 오늘날 우리들이  지내는 시간과 동일한 기간을 뜻한다고 믿는 것, 바로 믿음입니다.

뭐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기에 말입니다. 그래 “믿음”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징입니다. 숫자가 어떤 상징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징을 엉뚱하게 해석하다 보면 이른바 삼천포로 빠져 사교(邪敎)에 귀의(歸依)하기 십상이지만>

그런데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나 민족 고유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숫자들이란 대부분 어떤 상징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고대의 시간관념이라는 것이 오늘날 처럼 정교한 것이 아니어서 실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느낌이라는 관념의 숫자일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이야기한다고 하여도 믿음에 크게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일테면 성서에서 말하는 숫자와 시간의 개념들 가운데  40이라는 숫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의 개념 안에서 아주 긴 시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기 힘든 정도로 오랜 시간의 개념으로 40이라는 숫자가 쓰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상징하는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쓰여진 숫자가 바로 40이라는 숫자입니다. 옛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온다, 아니 왔다라는 뜻을 지닌 숫자가 40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세월호 집단 생수장사건의 한 피해자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40일을 견디어 내다 끝내 쓰러졌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원컨데 무엇보다 김영오라는 한 생명이 꺼져가서는 안된다는 소망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믿음은 곧 “고백”입니다.

일천번 아니 일만번의 기적을 보여 준다한들 고백이 이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 한순간 찰라적인 현상을 단 한 사람이 느꼇다 하더라도 그 고백을 세월따라 자자손손 이어지는 것을 통해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의 전통, 유대교의 전통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에 나오는 40의 의미도 그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40이제 김영오의 40일은 믿음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김영오의 40일이 한국인들의 역사를 가름하는 일대 상징이 되느냐 마느냐는 오늘을 사는 한인들의 선택입니다.

그의 안녕을 빌며.

마법사 전성시대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 못하는 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나 고대 중국 문헌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하며 혀차는 일이 어느 특정한 시대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종종 제가 이해 못하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건 세대나 나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세상” 특히 “한인 사회 – 딱 한국이라고 특정짓지 않는 까닭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에 만연한 어떤 풍습입니다.

바로 세상사는 방법을 재는 잣대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고, 가정, 집단, 지역사회 크게는 국가나 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고 부르든, 집단 이익이라고 부르든 모든 판단 기준이 “나와 우리가 얼마나 차지하고 누리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돈과 권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단  이틀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졌던 화두(話頭)  “정의(正義, justice)” 는 언제적 이야기인지 다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는 방법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즈음에는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한 때 한국에서 정치평론가라는 직업을 내세운 이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직업군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철들어 한국 땅에서 산 세월보다  이민의 세월이 길다보니 낯설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거기도 그런 세월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자못 기쁜 마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내 실망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이들이 평론을 펼치는 잣대야말로 “돈과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수, 진보 또는 여, 야 아니면 친미, 종북 –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그 평론가들이 어떤 블럭에 속해있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잣대는 똑같이 “돈과 권력”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오늘도 열을 올리고 핏대를 세우고 마치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양 싸우고 다투는 척을 합니다.

거짓에 둘려 쌓여, 아니 스스로 쳐 놓은 거짓의 거미줄을 자신들의 밥상으로 여기며 말입니다.

저라고 뭐 별반 다를게 있겠습니까만 그저 느낌 하나 적어보자는 생각이랍니다.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크리스티안 안코비치( Christian Ankowitsch)가 쓰고 박정미가 번역한  리더스 북 발행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제 밥그릇을 더챙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먹고 사는 일에 무슨 도움이 좀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 책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마법>이라는 소제목에 있는 내용입니다.

 

“마케팅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명확한 경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정반대의 내용으로 바뀌는 문제를 연구했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곧바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실험결과 피험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주장이 엄연한 사실로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경고를 덧붙였는데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머릿속에 사실로 새겨지는 현상은 중년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기억이 장난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근거 없음!’이라는 경고보다 더 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메시지는 대부분 기억 속에 아무 문제없이 저장되는 반면 메시지의 앞뒤 맥락, 즉 경고에 대한 기억은 소실되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녹인다는 주장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튼 주장을 의심스러운 홈페이지나 허접한 잡지에서 읽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

이 글을 읽다가 제가 무릎을 쳤답니다.

아하! 우리는 지금 마법에 걸려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답니다.

그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데 능숙한 마법사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그래 제가 예수를 믿는답니다.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살 수 있는 힘이 그 믿음에서 나오므로.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요즈음 젊은 것들은….” 혀를 하며 나무랄 용기 역시 솟는 것입니다.

잔치 그리고 숙제 – 평화

마치 잔치가 끝난 듯한 분위기입니다. 약  100시간에 달했다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방한 이후의 한국언론들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교황이 남긴 말씀들의 의미를 꼽는 기사들도 차고 넘치거니와 말씀들이 누구를 향한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들도 넘쳐납니다.

짧은 한국방문 기간동안 보여주었던 교황의 언행을 보고 들으며 저마다 자기 생각 한자락쯤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혀 관심 밖이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터이고, 애써 무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교황의 방한과 그의 언행들이 행여 자기 밥그릇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를 저울질하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들의 맺힌 한과 숨통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자로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터입니다.

날라리 기독교인(개신교)인 저는 어제 주일을 맞아 모처럼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두어 달만의 일인 듯 싶습니다.

예배순서가 거의 마칠무렵에 찬송을 부르다가 문득 프란치스코교황이 방한 중에 하셨다는 말씀 하나가 머리 속에 뱅뱅 돌았답니다. 그 연유로 잔치가 끝난 마당을 돌아보며 제 생각 한 자락 풀어 놓습니다.

먼저 어제 제가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의 내용이랍니다. 교회생활 조금 하신 분들이면 익히 잘 아는 찬송입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평화있어 주 예수가 주신평화/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아 과연 귀하다 나의 평화/ 주 항상 계시네 내 맘속에 주 가 항상 계셔 아 기뻐라/ 주 내 맘속에 계셔 위로 하신다 /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이런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람 일반이 종교에 귀의하여 의지하고자하는 일차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가사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당연히 귀의한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과 평화를 보장합니다. 적어도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종교들 일반의 모습입니다. 원시종교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비록 날라리일지언정 기독교인인 저는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로서 제게 평안과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정말 자랑스럽게 어느 자리,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거나 주장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일에 시간과 정열을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답니다.

아무튼 “주 예수가 내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찬송을 부르는 일은 신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 믿음에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제 저는 그 찬송을 읊조리며 영 편편치 못한 제 마음 한구석을 다스릴 수가 없었답니다. 바로 교황이 던진 평화에 대한 뜻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  <평화란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해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교황이 남긴 말씀들입니다.

교황과 김용오그가 말한 평화는 신과 나와의 관계가 아닌 나와 이웃간의 관계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신과 나와의 관계란  믿음의단계에 있어 아주 깊은 곳에 이를 수도 있는 관계설정일 수가 있는 동시에 가장 저급하고 천박한 신앙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신을 쫓아가면 신앙의 깊이는 깊어질수 있지만 신이 나를 쫓게 만들면 천박하기 그지없는 장사속  종교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나와 이웃간의 관계 설정에서 신의 존재를 묻는 물음은 자못 경건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시작이고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바로 그 지점에서의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바로 정의가 세워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  우리와 너희 사이에 정의가 이루어 진 결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민주적으로 풀어나가라는 조언을 덧붙인 것입니다.

대다수의 언론들이나 글쟁이들이 이런 언행을 풀고 간 프란치스코교황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들을 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잔치가 끝났습니다.

이제 교황이 말씀하신 평화에 대한 참된 뜻을 제대로 알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서 있는 자리를 바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툭 떨어져 2014년 8월 한반도 남쪽에 현현했던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교황이 2014년 8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반도를 향해 평화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최근 천주교 반세기사(50여년)의 고뇌와 교황 개인이 걸어 온  77년사라는  고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 전(1962년 10월 –  1965년 9월)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있었던  천주교의 일대 회개운동이 없었다면,  그의 신앙을 키워낸 아르헨티나라는 척박한 환경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정의의 결과물로 얻을 수 있는 평화”란 잔치 끝마당에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앞으로 50년이 더 걸릴지라도 한국민들이 노력해 얻어야만하는 숙제라는 것입니다.

조선민국9 – 민란2

프랑스혁명은 인류사에 있어 분명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거니와 그 과정을 통해 사회 질서의 커다란 변화도 겪었고, 혁명의 결과에 따라 세계사의 물결이 커다랗게 출렁이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1789.7.14 – 1794.7.27)을 전후로 한 한 세기 동안의 유럽과 프랑스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혁명의 주요 원인과 결과 가운데 한가지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혁명의 큰 원동력 가운데 한 축은 “배고파 이대로는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문맹자들이었고, 좋게 말해서 평민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를 떠바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숫자로는 당시 전체 인구의약  90%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주류였습니다. 그들의 노동과 세금으로 국가가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스혁명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과 과정에서 아주 주요한 한 축이였거니와 민란의 주인공이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실, 제1 계급(카톨릭 고위성직자), 제2계급(귀족), 제3계급(평민 귀족, 브르조아 신흥 귀족) 등이 주인공인 듯 그려집니다. 그들의 숫자라야 다 합해도 인구의 10분의 일을 넘지 않았으며, 특히 왕실 및 제 1, 2급 귀족들의 숫자는 2% 미만이었습니다.( 이숫자는 후에 이야기할 한반도 조선 말기 양반 숫자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혁명 과정을 통해 약 17만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배고파 못살겠다고” 외치던 좋게 말해 평민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혁명이 끝난 후 채택된 이른바 프랑스 인권선언문에 나오는 “자유와 소유권, 안전과 억압에 대한 저항권” 곧 자유, 평등, 박애(권리)라는 위대한 선언에는 사실 90%에 이르는 평민들을 제외된 선언이었습니다. 왕실과 제1, 2, 3 계급의 귀족들 곧 10% 미만의 사람들만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인간 곧 사람에 대한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부르짖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 되어 있다고들 평가하지만 분명 거기에는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론들과 신봉자들이 기세를 드는 형국으로 변화는 이어집니다.

오늘 뉴스에  세월호 집단 생수장 학살사건에 대한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프랑스 대혁명 시절 이야기가 연상되어 몇 자 적어 봅니다.

조선민국 8 – 민란1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기였다. 농민항쟁은 19세기 이전부터 봉건적 사회모순이 첨예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항쟁과정이 잘 들어나지 않은 소극적 경제투쟁에서부터 폭력적 봉기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은 끊임없이 봉건지배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 한국역사연구회 편 <한국사강의> 208쪽 

천명(天明, 1781-1788)의 대기근에 이은 대판과 강호의 식량폭동(1787), 천보(天保, 1830-1843)의 대기근에 이어 1837년 대판에서 일어난 오오시오의 반란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백성의  반란이든 기근이든 도시의 파괴소동이든 결국은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사회경제상황의 발전에 뒤져 낡은 전례나 자연경제에 매달리는 이외에 아무런 방책도 가지지 못한 탓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한길사편 <일본 현대사의 구조> 162 쪽 

중국의 토양개조, 사회구조의 변혁을 말하면 누구나 농민전쟁을 연상할 것이다. 특히 소작료 인하를 목표로 한 항조운동(抗租運動: 조세 거부 운동)이 농민의 밑바닥으로부터 일어났던 세상을 바로잡자는 행동임은 분명하다. 물론 농민들에게 변혁의 이상(理想)이 있었을 리는 없고 그 운동은 지주나 관료들에 의해 곧 진압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것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것은 남송(南宋), 명대(明代) 중기 이후, 청대의 건륭(乾隆, 1736 – 1795) 말년 이후였다. – 한길사편 <중국현대사> 10쪽 

세계사의 흐름을 보면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은 이른바 민란(民亂) 전성시대였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를 관통하는 일대 유행이었습니다.

이즈음 유행은 서울, 동경, 북경, 파리, 뉴욕을 비롯한 내노라하는 도시는 거의 동시에 퍼지고 누리는 세상입니다.

지리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유행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뉴욕에서 150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가 사는 촌동네는 유행에서 벗겨나 있는 곳입니다. 서울과 뉴욕이 동시패션을 구가하지만 제가 사는 촌동네는 90년대 쯤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 쪽이 좋은지(유행에 민감한 대도시 쪽 또는 유행에는 별반 관심없이 사는 촌동네 쪽)는 개개인들의 선호에 달린 일이기도 하겠거니와 때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뉴욕이나 서울에 가면 빨리 이 촌동네로 돌아오고 싶답니다.

아무튼 그건 이즈음 세상이야기이지만, 어찌보면 약 이백 여년 전 민란전성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들이 살았던 땅에서 역사의 일원이 되어 살았을 것입니다.

이즈음이야 중동 가자지구에서 밤에 일어난 일들도 실시간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가거니와, 부산 해운대 앞바다 실시간 영상을 보고자한다면 이곳 미국 촌동네에서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 볼 수 있는 세상이어서 동시간에 유행을 탄다는 게 전혀 신기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점은 지금으로 200-300여년 전 아직 동양과 서양이 서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던 시절인데 이 민란만큼은 거의 동시대에 일대 유행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란이 유행하게 된 원인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았다는 사실인데요, 바로 먹고 살겠다고 일어난 반란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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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먹고 살겠다고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겠고, 그 난리를 유발한 난리 이전에 “자기들 끼리 배불렸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 무렵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잘 알려진 말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인 바로 “배불렸던” 한 쪽 축입니다. 구체제(舊體制)입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싯점은 바로 이런 구체제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무리들의 일대 충돌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 하는 역사적 경험들이 20세기 이후에 보는 각나라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외면한 채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들만 들여다보면 그 시절 양반의 뒤를 잇는 소수의 앙시앙 레짐들이 오늘날에도 사회 엘리트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민족성이 게으르고…”운운하는 사기꾼들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게되는 것입니다.

자! 프랑스 혁명부터 이야기하지요. 뭐 거창하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처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저 배고파서 일어난 난리였답니다. 언놈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언놈들은 세금 한푼 안내고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이 더러워서 일어난 난리였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배고파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기조차 힘든 지경에 빠져있는 사람들 뿐이었다면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배부르고 가진 게 있지만 구체제는 싫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배고픈 이들과 손을 잡고 난리를 일을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 소식과 쓰러질 듯한 사내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잊지말아야

이즈음 국제 무법자 행세를 하는 이스라엘민족의 조상신 야훼는 자기 민족 곧 히브리족과 계약을 맺습니다. 이른바 십계명조약입니다.

십계명조약에 근거가 된 조건은 히브리족은 노예에서 풀려난 자유민족이고 그렇게 된 것은 바로   해방자인 야훼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상호 이해였습니다.

히브리가 이스라엘로, 유대로 바뀌였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바뀌는 수천년의 과정을 통해 그 민족이 걸어온 수난과 영욕의 세월들은 많은 이들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그들이 결코 잊지 않고 자자손손 이어온 것은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다는 것과 해방자 야훼신이 그때 함께하여 자유민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기들만의 정체성를 근거로  오늘날 국제 무법자 행세를 정당화하는 발상을 세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종족출신으로 똑같은 고백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야훼 하나님을 선포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노예였던 아픔을 결코 잊지 않되 자유민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특정한 민족, 특정한 족속,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사는 누구라도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선포를 한 사람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랑인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이스라엘족과 똑같이 “잊지 말아야 할 것” – 곧 노예(죄인)였던 사실을 잊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랑이 되는 세상으로 가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간직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2014년 오늘을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으로 바뀌는 세상으로 가려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힘있는 모든 분야의 권력자들, 돈 꽤나 거머쥔 부유한 이들, 지식 꽤나 머리에 이고 산다는 이들, 글줄 말질 꽤나 한다는 이들, 하나님 예수 부처 마호멧 공맹자 하다못해 자기 주먹 꽤나 내세우는 이들이 모두 잊는다해도 진정 사람이 사랑으로 바뀌는 세상을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세월호 입니다.

사람을 돈과 권력의 노예로 만든 사건이고,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잊지 말아야합니다. 잊지 않아야 새 세상이 열립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가수 김장훈씨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에 함께 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가 참 예수쟁이입니다.

잊지 말아야 새 세상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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