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역설(The paradox of our time)

우리 시대의 역설은…(The paradox of our time in history is that …)         – 제프 딕슨 (Jeff Di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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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높아졌지만 성정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We have taller buildings but shorter tempers, wider freeways, but narrower viewpoints 

소비는 늘고 소유는 줄었다. 더 많이 사지만 기쁨은 줄었다

We spend more, but have less. We buy more, but enjoy less.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줄었고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We have bigger houses and smaller families, more conveniences, but less time.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줄었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줄었고,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더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We have more degrees but less sense, more knowledge, but less judgment, more experts, yet more problems, more medicine, but less wellness. 

술은 더 많이 마시고, 담배는 더 피우고, 분별없이 지나치게 지출하고, 웃음은 너무 적고, 너무 빨리 운전하며, 성급히 화내고, 아주 늦게까지 자지 않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일어나며, 책은 거의 읽지 않고, 텔레비죤을 보는 길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We drink too much, smoke too much, spend too recklessly, laugh too little, drive too fast, get too angry, stay up too late, get up too tired, read too little, watch TV too much, and pray too seldom. 

가진 것은 몇 배나 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하지만 미워하기는 자주한다.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배웠지만, 살아가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수명은 연장했지만, 세월 속 삶의 의미를 깨닫는 방법은 잃었다

We have multiplied our possessions, but reduced our values. We talk too much, love too seldom, and hate too often. We’ve learned how to make a living, but not a life. We’ve added years to life not life to years. 

저 멀리 달에 갔다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우주는 정복했지만 우리안의 정신세계는 다스리지조차 못한다. 대기는 정화시켰지만, 영혼은 오염시켰다. 원자는 정복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했다.

We’ve been all the way to the moon and back, but have trouble crossing the street to meet a new neighbor. We conquered outer space but not inner space. We’ve done larger things, but not better things. We’ve cleaned up the air, but polluted the soul. We’ve conquered the atom, but not our prejudice. 

글은 더 많이 쓰지만, 더 적게 배운다. 이루는 것은 적다. 돌진하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것은 배우지 않았다.

We write more, but learn less. We accomplish less. We’ve learned to rush, but not to wait.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수많은 사본을 생산하는 컴퓨터는 더 많이 만들었지만, 소통은 점점 더 줄인다.

We build more computers to hold more information, to produce more copies than ever, but we communicate less and less. 

인스턴트 음식과 더딘 소화, 큰 체격과 편협한 성품, 엄청난 수익과 피상적 관계의 시대, 그것이 바로 지금이다.

These are the times of fast foods and slow digestion, big men and small character, steep profits and shallow relationships. 

부부 둘이서 벌지만 이혼은 늘고, 멋진 집 그러나 결손 가정의 시대,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시대이다. 빠른 여행과, 일회용 기저귀, 일회용품 도덕성, 순간적 사랑, 비만, 기운 북돋우게 하는 것에서, 가라앉게 하고, 죽이는 것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하는 약품의 시대,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이다.

These are the days of two incomes but more divorce, fancier houses, but broken homes. These are days of quick trips, disposable diapers, throwaway morality, one night stands, overweight bodies, and pills that do everything from cheer, to quiet, to kill. 

전시실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저장실에는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이다. 테크놀로지가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달할 때, 이 식견을 공유하거나 혹은 ‘삭제’ 버튼을 누룰 지 선택할 시간이다.

It is a time when there is much in the showroom window and nothing in the stockroom. A time when technology can bring this letter to you, and a time when you can choose either to share this insight, or to just hit delete.

봄나물

지난 해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일찌감치 은퇴생활을 즐기는 줄 알았던 벗이 보낸 봄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릅, 부추, 취나물 등 그가 키워 거둔 봄나물들이었습니다.

봄나물

한국에서 오랜기간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온 이 벗에게 이민생활 초기는 그리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다 십 수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집 뒤뜰 텃밭 농사를 제법 규모있게 지었답니다.

펜실베니아 시골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휴대폰도 잘 안터진답니다. 그 뒤뜰에 제법 훌륭한 비닐하우스를 짓고 각종 푸성귀 농사를 지었답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면 봄맛을 보곤 했었답니다.

그의 손길로 이룬 기름진 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들로 식탁이 풍성해지는만큼 벗의 이민생활도 웃음 가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아들 하나 잘 키워 예쁜 며느리도 들인 후, 미련없이 사업체를 딱 정리한 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도 듣곤 하였지만 직접 연락은 두절한 상태로 지냈답니다.

한 두어 주전에 어느 식사자리에서 제법 도인(道人)이 된 그를 만났답니다. 머리를 길러 꽁지머리를 묶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농사짓고, 도기(陶器) 굽고, 분재(盆栽)를 키우며 살고파하던 그의 꿈들을 이루며 사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봄나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주일 아침입니다. 농사짓는 벗 덕분에 어머니와 장모에게 봄소식 선물을 드릴 수 있어 참 좋은 아침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두 어머니에게 봄나물 드리는 일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조선민국 4 – 사교(邪敎)

세월호 참사에 연관된 뉴스들을 듣거나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치미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분노의 크기가 절정에 다다른 소리(이건 뉴스도 아니고 그저 소리, 개소리랄까, 아니 개에게 비유하는 것이 모든 개들에게 미안할 정도인 소리)는 바로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라는 소리입니다. 

물론 이 소리는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말씀’이 될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가 들은 소리들은 그 소리를 뱉어 개만도 못한 사람들의 소리들입니다. 

적어도 정치인, 관리, 종교인들이 그 직위 고하,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소리를 지꺼리는 일은 정말 개만도 못한 일입니다. 

이건 바로 “빨리 잊으라”는 개소리이고, “적어도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은 영원히 책임질 일이 없다”는 발뺌으로 내뱉는 여우새끼같은 소리입니다. 

적어도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가 명확하게 누군인지 그 모두의 각자와 집단이 질 책임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 댓가를 치룰 준비가 있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럴 땐 이 말이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 “대한민국”에 시민이나 국민이 없고,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 인민이 없는 2014년 현재의 모습을 바로 보기 위해서 우리 한민족이 걸어 온 최근세사 약 250여년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래 정조임금과 박지원의 ‘양반전’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 바 있습니다.  

지난 2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바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 이젠 잊자.”라는 말에 속고 또 속아 온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곱씹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덧붙어 꼼꼼히 더듬어 볼 일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 아니 종교라기 보다는 사교(邪敎)입니다. 

사교이번 세월호 사건에 등장하는 ‘구원파’라는 이단종교(? 저는 이 종파가 정말 이단인지 삼단인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것이 이번 참사의 민족사적 의미와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넋들을 위로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에 그 종파에 대해 알고싶은 까닭이 없답니다.)가 문제가 아니라, 진실로 진실로 고민하고깊게 돌아보아야 할 일은 바로 ‘사교집단화(邪敎集團化)’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라는 것입니다. 

사교나 이단 종교의 특성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구원 또는 새 생명이나 부활 등”의 달콤한 유혹으로 그 유혹에 매달린 이들의 등을 쳐먹는 브로커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브로커들이 만들어 놓은 신(神)이거나 때론 브로커 스스로 신이라고 참칭하거나 하여 절박한 이들의 등을 쳐 먹는 것입니다. 

그 절박함이란 많은 경우에 질병, 가난, 고통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고, 때론 부귀 영화 장수 등의 허영된 비나리일수도 있습니다. 

그 절박한 사람들의 바램을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등을 쳐먹는 일이 바로 사교집단들의 특성인 것입니다. 

‘백두혈통’이라는 북의 종교 브러커나 “민생과 종북” 깃발로 멀쩡한 시민들과 국민들 찜져 먹는 남의 종교 브러커들이 판치는 세상은 분명 이미 사교집단화(邪敎集團化)된 모습입니다. 

역사를 바로 보는 일도 사교(邪敎)의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일도 “우리 모두”도 아니고 “그 누구도”아니라 “바로 나 자신” 또는 “바로 당신 자신”부터 나서서 해야 할 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떤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해야하는 일이 아니라 늘 밥먹고 물 마시듯 일상적인 삶에서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역사 – 잊으면 집니다. 세월호 – 잊으면 내 일이 됩니다. 

종교 – ‘브로커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저는 예수쟁이이고, 예수가 그 일을 하다 죽고 부활했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 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브로커들을 거부하는 인민, 시민, 국민의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따로이던 합해 하나가 되던 그런 세상이 꿈이어야 합니다. 

이제 역사로 돌아갑니다. 양반이야기 말입니다.

가자! 광장(廣場)으로

광장을 찾아 헤매다 끝내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 이명준.

단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를 드나들던 명준은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 버린” 남쪽에 구토를 느끼며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오직 “복창만 강요하는 구호”만 있을 뿐 북에도 광장은 없었다.

명준은 ‘광장’이 없는 조국 한반도를 등지고 중립국 인도로 향해 가던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린다.

1961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그렇게 죽는다.

우리에게 축제의 광장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1960년 4월(당시에는 4월에 학기를 시작했었다), 나는 왼쪽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달고(이즈음 아이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당시엔 아이들이 코를 줄줄 흘리고 다녔으므로 손수건을 가슴에 달게 하였다) “서둘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한 채 오후반 등교길에 나섰다. (당시 전후-戰後:한국전쟁- 첫 세대인 우리에게 교실은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통상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때로는 삼부제 수업을 하곤 하였다.)

그날은 두어 주간 동안 운동장에서 있었던 유희와 이즈음으로 말하면 집단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는 첫 날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채근은 대단하였다. 서둘러 나선 등교길, 신촌 노타리를 가로 지르는 길목에서 나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집 앞에서부터 들었던 함성이 이제 바로 내 앞에서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걸이를 한 대학생들은 “문(門)안으로, 문안으로(당시 우리는 광화문이나 시청을 문안이라고 불렀었다. 사대문안이라는 뜻으로.)” 노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시청과 광화문 ‘광장’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경무대(청와대)로 향했던 1960년 4월 19일이었다.

그 저녁, “총소리… 피…. 죽음…” 등등의 어른들 말사이로 이웃집 형이 끝내 돌어오지 않았다는 흉흉한 소리를 들으며 우리 코흘리개들은 여느 날처럼 “다방구와 술래잡기”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우리도 시청앞으로 광화문으로 내달리곤 했다. 그 광장을 향해 달리다 더러는 징역을 살았고, 더러는 군대에 끌려 갔으며, 더러는 목로주점에서 얻은 취기로 골방에서 악을 쓰고는 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 악을 쓰고 모였고, 효창운동장에 군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이 돌던 밤, 우리들은 ‘밀실’에 갇혀 모진 매를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해 오월, 마침내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붉은 피, 총소리, 군화소리, 죽음 –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은 우리시대 ‘광장’의 극명한 모습이었다.

오누이 월남하여 홀로되신 장모와 함께 평안도 정주출신을 찾아 여의도 만남의 광장을 헤맨던 일을 몇 해 뒷 일이었다.

ggg최루탄에 맞아 한 젊은이가 죽고, 광장은 만장과 항쟁의 깃발을 든 시민들로 들끓었다. 1987년 6월 10일이었다. 나는 그 광장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밤, 이민 보따리를 꾸렸다.

그랬다. 우리에게 광장은 분노와 항거와 저항의 분수대였다. 그곳은 끝내 눈물이었고 패배의 아픔 뿐이었다. 그곳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오직 관제(官製)이었다.

워싱톤 광장과 서너 블럭 뒤에 빈민 우범지대의 공존이 더는 낯설지 않은 이민(移民)의 세월을 보내며, 더러는 아슬아슬하지만 내가 살던 때보다는 나은 축제의 광장을 누리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오롯이 삼 사십년, 아니 최인훈의 광장 오십년을 넘어 백 이십여년 전 고부장터의 원성이 고스라니 다시 살아 울리는 소리 들리는데,  2014년 내 모국의 광장에는 다시 관제(官製)의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으니 어찌하리!

가자! 다시 광장으로!

환갑(還) 젊은 나이로 자유의 광장으로 나서나니, 젊은이들이여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도청앞으로 광장으로 나설진저.

더는 바다에 떠도는 그 숱한 이명준의 넋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니 이명준처럼 자기 길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다만 “가만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한 그 숱한 넋들을 위하여…

가자, 광장으로!

 

조선민국(朝鮮民國) 3 – 양반(兩班)

개인의 삶이나 집단 또는 민족이나 국가의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아이고, 그 때 왜 그랬을까?’라거나 “만일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시점이나 순간들을 돌아보는 관점과 생각들은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집단, 민족, 국가 구성원들 그리고 그 전체의 의사결정 방법이나 문화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런 지나간 순간들을 어떻게 뒤돌아보느냐에 따라 또한 지나간 그 사건이나 상황들을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 곱씹고 해석하며 오늘의 선택을 결정하는데 참고하느냐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 민족, 국가의 미래가 결정지어지곤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남으로는 대한민국으로 나누어져 있고 약 700만명에 다다르는 숫자가 중화인민공화국, 미합중국, 일본국 등을 비롯한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은 나라이름에 걸맞지 않게 민주주의도 아니거니와 인민이 주인인 나라는 더더우기 아닙니다. 남 역시 나라이름에 걸맞지 않게 크지도 않거니와 민(民) 곧 시민이나 국민이 주인은 아닌 듯합니다. 유엔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나라들(단, 일본은 표면상 북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국가로 인정하는 듯한 관계이지만)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지만 남과 북만은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두 나라는 서로 정식국호의 영문표기로 Republic of Korea(남),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북) 라고 남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지만 세계인들은 그저 South Korea(남한), North Korea(북한)으로 부를 뿐입니다. 

남한인구가 약 오천만, 북한인구가 약 이천 오백만이라고 하고 재외동포수가 칠백만을 넘으니 약 1/10의 인구가 세계 다른 나라에 나가사는 셈입니다. 

중국에는 조선족, 일본에는 재일동포, 러시아에는 고려인, 미국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등으로 살고 있거니와 최근들어 호주 캐나다를 비롯한 남미나 유럽 등지 아프리카 오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 팔천만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지난 사월 대한민국(남한)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 소식을 뉴스 보도를 통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남북을 비롯한 보도 통제나 왜곡보도가 심한 지역에 살고 있거나 정보 통신이 두절된 지역에 살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사건 보도와 처리 과정을 접한 한국인들이라면 2014년 4월 현재의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에 던져진 곧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이 물음,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은 어느 민족 어느 국가나 늘 고민하고 씨름해 온 물음입니다. 그 물음으로 각 나라와 민족들의 역사가 발전해 왔거니와 인류사가 바르고 건강한 쪽으로 발전해 온 것이고, 그렇게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4년 5월 현재, “한반도 남쪽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과연 진짜 나라일까?”라는 물음은 아주 건강하고 바람직한 질문인 동시에 같은 물음은 똑같이 북쪽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유효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저는 약 250년 전의 일부터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250년전 결코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양팔 주욱 뻐으면 손 끝에 닿을 저쪽 이야기일 뿐입니다.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일 뿐입니다. 

“아이고 그 때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을 시작해보는 첫 시점입니다. 약 250여년 전만 해도 다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중국(청나라), 일본(에도 막부), 미국(나라가 막 시작할 때), 유럽으로 따지면 문맹자가 80-90% 였던 때이고, 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시달리던 때였으니 세계의 이른바 문명국들이 다 고만고만 했을 무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조선왕국에 이산(李祘)이라는 이가 임금으로 있었답니다. 바로 정조(正祖)입니다. 

조선임금 27명 가운데 임금같은 임금 둘로 세종과 정조를 꼽지만 정조는 “아쉬움”이 많은 인물이랍니다. 바로 그 시절이 오늘날 세월호 참사의 한과 아쉬움의 시작이라 하여도 물의 근원을 그리 멀리 잡는 것도 아니랍니다. 

그 시절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구가 둥굴게 생겼고, 지구가 돈다는 주장을 한 첫번 째 한국인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조선인들은 땅은 평평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니 시대의 돌아이였던 셈입니다. 

그가 쓴 소설들 가운데 양반전(兩班傳)이 있습니다. 그 양반전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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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훌륭한 남인(南人)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해쓱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되는 법니다. 방안에서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을 쌓아 학을 기른다. 

(비록 그렇지 못해서)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

조선민국 2 – 세월에

ribon이즈음엔 점포 이름이나 상품 이름에서부터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웬만하면 외래어나 외국어로 짓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입니다. 심지어 아이들 이름까지 외국식 이름으로 지어 부른다는 뉴스도 본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하필 ‘세월’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 배에 말입니다. 그조차 한국말이 아닌 외국말의 차음 표기는 아니겠지요. 

왜 하필 세월호일까요? 

“세월따라 이 또한 잊혀질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리 지었을까요? 아니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예견으로 그리 지었을까요? 

무릇 모든 사건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개인이나 집단이나 단체나 국가를 막론하고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들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크건 작건, 목숨을 살리는 일이건 앗아가는 일이건 따져보면 엇비슷한 일들이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일어난 사건들과 일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뒤돌아 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곱씹어 보는냐에 따라 개인사나 집단, 민족, 국가의 특성을 이루게 되고 흥망의 역사 원천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실종자란 곧 사망자”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며 단 한 명의 목숨도 살리지 못한 채 세월호 사고의 달 사월이 이제 지난 세월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세월이 가면 또 잊혀질 일”이라며 오월을 맞을  것이고, 누군가는 “세월이 갈수록 깊이 새길 것”이라고 다짐을 하며 다가오는 세월을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견하고 짐작할 수 있었듯이 “차마 사람으로서 하지 못할 말들과 생각들”을 “국가”. 또는 “애국”의 이름으로 마구 내뱉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4월 23일) 영국 The Financial Times는 “페리 (세월호) 참사는 나쁜 문화가 아니라 나쁜 정책이 불러온 일 Bad policy caused the ferry disaster, not bad culture”이라는 컬럼에서 “Korea Inc”라는 표현을 썻답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말이지요. 

주식회사 대한민국과 국가와 애국이라는 말이 한데 어우러져 잘 굴러 가는 것만 같은 모습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하는 약이 될 터이지만, “내 애비는 노예였다”라는 고백을 수천년 세월 동안 잊지 않고 곱씹는 유태인들 처럼 “2014년 4월 그 때,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애국을 말하는 자들이…… 우리 아이들의 ….. 목숨을……” 곱씹는 이들에게 세월은 모든 것이 새로와지는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 뜻으로 이제 역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역사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조선의 역사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