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과 만세

지난 주일 오후에 정말 잠시 한순간,  그야말로 채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았던 책의 표지와 목차들이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답니다. 

필라에서 아는 이들끼리 저녁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답니다.(이 모임은 제법  뜻이 있다는 생각이라 언젠가는 따로 소개드리려 한답니다.) 

아무튼 그 모임이 끝나고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다가 문득 제 눈길을 끈 책이었답니다. 모임의 멤버 가운데 인쇄업을 하는 벗이 만든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쓴 이는 필라 지역 사람들이라면 한두번 쯤은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을 만큼 제법 지역사회에서는 알려진 이름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순간 하품을 할만큼 딱하게 생각했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그 책이 “김수영 문학상”에 출품하기 위해 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김수영그  책을 쓴 이의 평소 글로 보아 도대체 김수영시인하고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공화당 티파티(Tea Party)에 속한 이가 오바마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격이랄까, 아니면 만년 새누리당 지지자가 진보당 이정희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그런 참 맞지 않는 그림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이가 과연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쓴 사람인 줄은 알고 있는지,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수영시인이었다는 것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런게 두루 궁금하더란 말이지요. 

세월따라 세상은 바뀌게 마련이지만, 1960년대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뒷걸음친 모습으로 변한 한국사회(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갈수록 점점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모습을 바로 비추어 보자는 생각으로 김수영시인의 글을 소개합니다. 

첫번째는1960년 9월 20일에 쓴 그의 일기이고, 두번 째는 그의 유고시 “김일성 만세”입니다. 

1.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2.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