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20 : 1- 16
인용성서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럴 때 성서 한번 다시 읽어보자는 뜻으로 길게 인용을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 가운데 꽤 널리 알려진 대목입니다.
예수가 한 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이 비유에 대해 이제껏 당신이들어 본 설교나 성서공부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 곱씹는다면 어떤 해석과 신앙고백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자!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최근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하나 먼저 소개를 드립니다.
제 또래의 한 사내가 지난해에 한국을 다녀왔답니다. 큰 맘 먹고 나선 십수년 만에 고국방문이었답니다. 이 사내는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제법 유수한 회사의 직원으로 있다가 해외파견 근무 형식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여기 눌러 앉게 되었고, 작지만 제법잘 나가던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그만 통째 말아먹고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십 수년 만에 자녀들도 다 시집 장가를 들이고, 부부가 그저 하루 밥 먹고 살며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만큼 살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치부를 해서 쌓인 재산이 있거나 한 형편은 아니었답니다.
십 수년을 그렇게 고생을 하며 다시 일군 삶을 돌아보며 큰 맘 먹고 고국에를 다녀왔다는 것이지요. 짧은 모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 사내가 하던 말이었답니다. “이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을겝니다. 너무 많이 변했어요. 모든 판단의 기준이 그저 돈이더라고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돈이더라니까요.”
이어지는 그의 말입니다. “만나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가 얼마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짜리 차를 타고 다니는지? 뭐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글쎄, 그 사내의 말을 100%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즈음 한국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 인 것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어떤 특정 분야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 규칙은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로 돌아갑니다.
저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0장의 기록에서 아주 유명한 16절의 말씀,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이야기 곧 그가 첨가한 부분이다라는 것이 학자들 사이의 주된 의견이랍니다.
16절을 빼 놓고 본다면 이 비유의 촛점은바로 15절에 있습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라는 말입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주인이 “네가 뭔데?”라며 꾸짖는 상대는 바로 아침 일찍부터 온종일 일하고도 한 시간 남짓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런 임금지불 방식을 고수하는 고용주가 있다면 각종 송사로 재산을 날리는 일은 고사하고 아마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상식을 뒤엎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식을 뒤엎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을까요?
귀가 열린 척, 눈이 뜨인 척이라도 해 가면서 비유를 곱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십수년만에 모국방문을 하고 돌아온 사내가 본 오늘날의 한국사회나 지금 저와 그 사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이나 이천년전 예수가 숨쉬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유대사회나 전혀 다르지 않은 사실이 한가지 있답니다.
법이나 율법, 아니 나아가 상식이 우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까지도 지킬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것이고,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제 배불리는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늘 있어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그건 아니다!”라는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람 곧 인간은 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율법의 잣대에 올려져 있었고, 제 또래의 한 사내가 본 오늘날 한국사회(한국말을 사용하는 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돈에 올려져 있다는 것은 모두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다 평등한 자리에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