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GO) –기적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35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마가  1 : 44)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마가 2 : 11)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마가 5 : 19)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마가 5 : 34)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 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마가 8 : 26)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가 10 : 52)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누가  7 : 15)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누가 17 : 19)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요한 5 : 9)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요한 9 : 7)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7 : 44)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 학습에 있어 이런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그 차이들을 그대로 받아드리는(외우는) 방법이 학습효과를 높이기도 합니다. 

우리말 “오다”와 “가다”인 영어의 “come”과 “go”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come

제 직업은 세탁업이지요.  세탁소에 손님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 카운터는 가게 뒤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카운터는 손님을 향해 “I’m coming.”하면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카운터로 움직입니다. 

이 때 “I’m coming.”을 “내가 옵니다.”라고 하지 않지요. “제가 갑니다.”가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고 자란 제 두 아이들은 비교적 한국말을 잘 하는 축에 속합니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두나라 말을 구사하는데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모두 종종 헷갈리게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 역시 바로  이 “오다”와 “가다”입니다. 

집에 오기로 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어디냐?, 언제오냐?” 그러면 아이들의 대답이지요. “지금 올께” 또는 “지금 오고 있어.” 바로 “I’m coming”을 한국식으로 표현한 말이랍니다. 

뭐 이 정도야 서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이 come과 go, 곧 오다와 가다를 헷갈리면 정말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가 있답니다. 

예수는 치유기적을 행한 이후  치료받은 이들을 향해 “가라”로 명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라고 했습니까? 바로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네가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라고 하거나, “내가 네 병을 고쳐 주었으니 세상 끝까지 돌아 다니면서 이를 알려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병을 고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찾아갔던 사람들의 본래 소망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남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서 떳떳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시대 당시의 나병환자를 비롯하여 병자나 신체불구자들은 사회로 부터 차단되어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가라”, “네가 그렇게 원했던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깊게 살펴볼 지점이 하나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실로암못에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눈이 뜨여 세상을 다시 보게된 전에 소경이었던 사람을 향해 예수는 “가라”고 명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이 눈이 다시 뜨인 사람에 대한 후기가 이어집니다.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한 9 : 34) – 눈을 뜬 전에 소경었던 사람을 맞이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를 다시 내 쫓아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고 “가라”고 명했습니다만, 그가 “가는” 곳의 환경을 바꾸는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길게 보면 “환경이 바뀐 기적들”을 확인할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만든 이들은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예수의 기적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답니다. 

이에 관련된 글 하나 함께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몇 해전에 쓴 것인데  제 이해를 함께 하시는데 도움이 좀 될 것입니다.

가라(GO)! – go and sin no more (링크)

아내와 샴푸

이제 제발 샴푸를 쓰라는 아내의 성화에 샴푸로 머리를 감았답니다. 물론 샴푸를 사용한 것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다만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말씀입지요. 

그냥 세수비누를 사용해 왔지요.  한 삼십년 된 듯 합니다.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은 세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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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빨래비누를 사용했었지요. 거의 서른 나이까지 제가 머리감을  때 즐겨쓰던 비누였답니다. 누런색 사각 덩어리 빨래 비누였답니다.  그 놈으로 머리를 감고 나면 머리속까지 시원했답니다. 

그 빨래비누를 구할 수 없어서 사용한 것이 세수비누랍니다. 

샴푸는 영 제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답니다. 아내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약간의 세치라고 할만한 흰머리카락은 있지만 아직 검고 윤기있는 머리털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나이 육십에 이제 샴푸로 머리를 감습니다. 

저는 이게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내의 말은 듣는 게 편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랍니다. 

누구는 새로 시작하는 나이라지만, 늙어가는 나이이기도 한 탓입니다.

죄인 – 기적 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4 

“최근 일주일 사이 네 가정이 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버렸다. 이들은 행복했던 서민층 가정이었으나 병마와 실직으로 졸지에 ‘틈새 빈곤층’이 됐다. 그중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 아니어서 일반적인 정부 지원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신설된 복지제도에 따라 긴급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배제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 2014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추정소득 180만원 ‘송파 세 모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없었다.” 

“정부는 국민들의 복지 체감을 높이겠다며 오는 10월부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최저생계비를 없애고 별도의 소득 기준으로 생계·주거·교육급여를 따로 지급하는 맞춤형 급여제도를 설계했다. 서울 송파구의 세 모녀가 살아있었다면 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도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까다로운 조건들 탓에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 2014년 3월 5일자 국민일보 인터넷판 사회면 

“그 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 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마가복음 2 : 3 – 12 

“예수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상류층의 사람들에 의해 경멸받고 벌받고 경원시 당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가령 하급 재정관리, 즉 강제로 로마 수비군에 협력했던 세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으로인해 양심적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불리웠던 사람들 모두를 말한다. ‘죄인’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과 공동의 도덕을 수립했던 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붙여준 상표임이 분명하다.” – Georges Casalis의 가난한 자들의 복음에서 

1970년대 까지만해도 동아일보 이름값 좀 했었답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이신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도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이시지요. 

송선생님께서 동아일보를 그만 두시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연구에 정열을 쏟으시던 무렵에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일제시대에 자란 나는 경성제국대학이 꿈이었다. 해방이 되서 서울대학으로 바뀐 경성제국대학 법대에 입학하였다. 언론에 관심이 있어 그 길로 들어섰고, 조선 동아 등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사회 엘리트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리며 큰 고민없이 편집국장 자리까지 갔었다. 1975년 동아투위 사태이후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한국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면서 내가 누려온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서울대를 다니고 사회 엘리트로써 승승장구 하며 살아오는 동안 내 동족들이 앓고 있던 터무니 없는 아픔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 동족의 아픔을 거름 삼아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송건호선생님이 일한던 곳, 동아일보의 오늘자 신문 기사를 보면서 “참 망가져도 더럽게 망가졌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책임을 죽은 이에게 돌리는 뻔뻔스런 모습은 비단 동아일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겝니다. 

삶의 모든 궁극의 목표나 가치 판단의 사회적 기준이 “돈”이 된 일은 박정희시대의 “잘 살아 보세” 깃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다만 “더불어 함께 잘살아 보는” 고민과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잠시 그런 과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이 바로 그런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름도 문제도 아닙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은 분명 “사회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해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핏값을 치루기도 합니다. 또 어떤 민족은 이미 조상들이 치룬 피값과 오랜 경험을 토대로 토론과 흥정을 통해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민족은  이런 “더불어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역사가 짧습니다. 이런 문제로 피흘려 본 경험도 일천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그래 이런 이야기를 제 나이에 맞게 옛날 화롯가에서 이야기해 주시던 할아버지 흉내내며 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쟁이, 예수로 세상보기”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이런 저런 일들로 이즈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답니다.) 

아무튼 “돈” 뿐만 아니라 “실리”, “권력” 등을 손에 쥐는 것만이 “승리”하는 것이라는 이즈음 잘 쓰는 “공학적” 사고들을 성서적 관점, 예수의 기적행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이즈음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또는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고 이끄는 언론과 경제주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겝니다. 

그래 아파야합니다. 이 세대를 한글을 사용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특히 성서를 읽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아파해야만 합니다. 그게 기독교인의 바른 길입니다. 

신문기사

 

이제 성서로 돌아갑니다. 

예수가 기적을 통해 고쳐준 사람들이 앓고 있던 병이란 당시 사람들에게는 병일 뿐만 아니라 죄였습니다. 

뭐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이즈음은 그런대로 많이 좋아져서 장애우니 장애인이니 하는 말을 쓰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병신”이라는 말로 아픈 사람들을 욕보이게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예수시대에는 병(문둥병, 맹인, 농아, 앉은뱅이, 광인 등등)은 곧 사회에서 격리되어야먄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런 병에 걸렸느냐는 것입니다. 과중한 세금, 불공평한 나눔은 가난한 이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며 영양실조에서부터 각종 질병 나아가 불구자가 되는 곳으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정치적 또는 종교적 지배계층들은 과중한 세금이나 불공평한 나눔 같은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향해 죄인이라는  팻말을  걸게하고는 그들을 희생삼아 자기 뱃속을 채웠던 것입니다. 

마치 2014년 오늘날 동아일보와 그 세력처럼 말입니다. 

예수의 치유기적은 바로 “아니다! 지금 아픈 너희는 단연코  죄인이 아니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이웃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반성서적인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서 입다물고 있는 교회는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헛것입니다. 

물음 – 기적 6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3 

“생활고 때문에 세 모녀가 사망한 데 이어 30대 주부가 또 극심한 빈곤에 4살배기 아들을 안고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경기 동두천경찰서는 지난 2일 오후 7시 45분쯤 동두천시 상패동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윤모(37·여)씨와 아들(4)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3일 밝혔다. 윤씨의 옷에서는 ‘미안하다’는 등의 글씨가 적힌 세금 고지서가 발견됐다.”  – 2014. 3. 3. 서울신문 인터넷판 사회면 기사 

“서울에 살던 세 모녀가 지난 2월 26일 저녁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12년 전 아버지가 떠난 뒤 이들 모녀는 어머니의 식당 노동과 작은 딸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왔다. 35세, 32세였던 두 딸은 어려운 생활과 지병으로 신용 불량자가 되어 있었고,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조차 포기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60세 어머니는 지난 1월 팔을 다친 뒤 식당 일조차 하지 못해왔다. 이런 상황에 빠져 있었지만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후의 안전망,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고인이 된 세 모녀가 남기고 간 짧은 글에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등장했다.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이토록 강한 염치였다는 것이 우리 사회를 여러 번 울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죄송해야 할 것은 세 모녀를 방치한 이 나라의 복지와 사회일 것이다.”  –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4년 3월 3일자 김윤영컬럼 중 

“기적신앙은 무엇보다도 낮은 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주후 3세기 동안에 비로소 상류층에 까지 비교적 널리 침투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몇가지 간접적인 증거들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도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여인은 열 두해동안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모든 소유를 헛되이 없앤 후에 예수에게로 왔다. 이전의 사회경제적인 신분(status)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비합리적인 기적신앙에 매달린다. 돈이 있을 때 의사에게 갈 수 있었고, 돈이 없을 때 생명을 다루는 다른 방책에 의존했다.” –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en)의 공관복음서의 기적이야기에서 

“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먼저 못에 들어 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삼십 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갔다.” – 요한복음 5 : 2 – 9 

세모녀

그들은 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을까요?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 그들이 남긴 그 미안함과 죄송함을 받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염치없는 사회에게 던진 이들의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성서의 눈높이로 고민해야 마땅한 신앙인들은 이런 사회적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들을 안고 예수가 행한 기적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보도록 합니다. 

예수가  행한 기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앓았던 병명들을 보면 이들의 당시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자, 혈루증 환자, 눈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병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습니다. 반사회적인 병인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호를 받기는 커녕 종교의 이름으로 철저히 버려질 수 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병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철저히 버림받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과 환경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므로 경제적은 측면으로 보자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더우기 문둥병자에 이르면 주검 곧 시체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환자들이었습니다. 문둥병을 고쳤다는 말은 거의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예수가 치유 기적을 행해 고쳐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가 치유기적을 행한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밟힌 기록은 한번 뿐입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마가복음 5 : 22 – 23,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야이로를 제외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들을 보면, 여인들, 아이들, 거지, 종 등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예수 기적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없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정상적인 보통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조차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기 직전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말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을 향해 반사회적(때로는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몰아세우는 “염치없는”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예수가 무엇때문에 왜 치유 기적을 행했었는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합리적 의심 – 천안함 프로젝트

폭풍 전야라고 하던가요.

아주 조용한 주일 오후입니다. 오늘밤부터 시작된다는 겨울 눈폭풍의 이름은  Titan이라고 한답니다. 적게는 7인치에서 많게는 12인치까지 내린다고 합니다. 기온도 뚝 떨어진다고 하고요.

전기나 물이 끊길 우려도 있다는 뉴스에 만일을 위해  휴대용 부탄가스 버너와 장작 등도 준비해 놓았답니다.

그리고 즐긴 다큐멘타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입니다.

오늘 오전에 지인이 한번 꼭 보라는 메세지와 함께 보내준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합리적 의심”이 원천 봉쇄되거나 “무조건적 믿음”이 애국이나 신앙으로 치부되는 사회는  불안한 사회입니다. 왜냐하면 폭풍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유할 수 있는 영상임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LFB2IW8Zmg#t=4438

주인공 – 기적 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2 

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 마가복음 1 : 23- 28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이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요한복음 20 : 30 – 31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갈릴리로 나아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로 한 일들은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귀신들린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 열병, 중풍 등등의 각종 질병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마가 1 :28)”졌거나,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마가 1 : 33)”었고,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마가 1 : 45)”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마가 2 : 4)”거니와,  “예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마가 3 : 9)”시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든 첫 번째 이유가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데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에 이르면 미처 기록하지 못한 기적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치유의 기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을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바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 : 31)”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의 치유기적 사건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행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기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당연하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Pool at Bethesda

그런데 약 삼백 여년 전부터 성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적 이야기들을 전하는 자료들과 성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연구를 통해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은 다큐멘타리 같은 기록 영화같은 것이 아니고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겨지기까지 여러 전승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테면 똑같은 예수의 기적이야기라 할지라도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와 마가의 이야기 그리고 누가가 기록한 이야기들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서 군중을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 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 마가복음 5 : 25 -34 

“마침 그 때에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 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 마태복음 9 : 20 -22 

혈루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의 기적을 전하는 마가와 마태와의 차이입니다. 기적사건을 전하는 이런 마태, 마가, 누가의 차이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떤 모습이 가장 예수가 했던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약 200백년간에 걸친 이런 연구들을 한군데 모아 집대성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쳐입니다. 그의 책 “ 예수의 생애 연구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성서학자들이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유형들과 그 연구의 변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으로, 이런 연구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소개드리는 것으로 줄이고요, 아주 획일적으로 이렇다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대충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의 변천에 대한 큰 틀에서의 같은 생각들이 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 내용들을 보면 기적이야기의 주도권이 예수에게 있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를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고침을 받은 사람의 선교 이야기가 이어지고, 고침받은 사람의 신앙이 강조되는 것들 <아라이 사사꾸(荒井 獻)의 예수의 행태> 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의 기적이야기로 가까이 시간을 돌려보면 예수는 누군가에게 요청을 받고 기적을 행하며 기적행위의 주도권을 쥐지도 않고, 메시아나 그리스도의 호칭도 없습니다.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크고, 고침을 받은 자의 신앙이 전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이 원래 병들기 전에 그들이 있던 곳, 곧 그들의 가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기적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기적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 보도록하겠습니다. 이들을 만나보는 일이야말로 에수의 기적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