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구이언 – 말씀 1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6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읍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2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마태복음 19 : 29 

가령,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말씀을 인간 공동생활의 토대였으리라고 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공동체 삶의 한 정황이라는 양식사의 한 전제를 문제삼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극단주의 때문에 예수의 말씀은 일상의 행동을 규정하기에는 아주 부적합하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러한 말씀을 30년 동안이나 구전으로 전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누가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en)의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 말씀에 대한 문학사회학적 고찰”에서 

이즈음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으되 “일구이언이면 이부지자라(一口二言 二父之子)”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입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가 둘인 사람이다라는 말이지요. 후레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상황에 따라 자기가 한 말을 뒤집기 일쑤인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지요. 특히 여기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판에서 먹고 사는 이들이 주로 듣고사는 말일겝니다. 

애비가 둘이다는 말은 욕이지요. 이즈음은 세상이 하도 급변해서 애비 두 서넛, 애미 두 서넛 되어도 욕은 될 수 없지요. 솔직히 저는 실제 그런 사람들을 욕되게 할 뜻이 전혀 없답니다. 그런 상황은 전혀 본인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고,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일지라도 제가 믿는 신인 야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의미있는 삶인 까닭입니다. 

아무튼 이부지자(二父之子)  곧 애비가 둘이라는 말은  예전에는 큰 욕이었답니다.  후레자식이었지요. 후레자식이란 호래자식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지요.  호(胡)와 래(來)에서 온 말입니다. 오랑캐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다고요? 바로 한 입으로 딴 소리하는 사람을 일컬어 그리 불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말에 약속에 책임지지 않고 말을 바꾸는 사람은 오랑캐의 자식이란 말이지요.

운보 김기창

예수가 딱 그 짝이라고 제가 말한다면 아마 저를 미친놈으로 몰아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지만 예수가 한 말씀들을 찬찬히 놓고보면 영락없이 딱 그 짝이랍니다.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밥먹듯이 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는 기적을 통해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을 즐겨했습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똑같은 입으로 “가족을 버리라!”고 명령을 한답니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족을 버려라.”, “가족을 떠나라.”, “가족을 잊어라”, “가족을 돌아보지 마라”는 명령을 한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의 일구이언(一口二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라는 말도 있지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지요. 귀걸이 코걸이는 옛말이지요. 요즈음엔 피어싱(Piercing)이라고 하지요. 입술,  혓바닥, 배꼽 등등 몸 아무데나 제 맘대로 장신구들을 달곤 하는 일 알입니다. 

일구이언이 이현령 비현령으로 아무 때나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만병통치가 되는 오늘날의 교회, 이른바 넘쳐나는 설교들은 때론 그저 성황당이 되곤 하지요. 

이게 누구 때문일까요? 일구이언한 예수 때문이라구요? 그런 답에는 그냥 웃고요. 

그럼 교회나 설교자들 때문이라고요? 어느 정도의 탓을 만드는 요인이 되겠지만 주된 요인은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 탓이냐고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탓이랍니다. 

자! 이제부터 예수의 말씀을 통해 그 까닭을 알아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