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39
아직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이른 싯점입니다. 제 이야기의 흐름상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가 죽음에 이르게 된 까닭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또 제가 이글을 이어가면서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오늘은 한국정치 이야기도 한마디 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전에 잠시 훑어 본 한국정치 관련 기사 가운데 두 가지가 제 눈에 들어왔답니다.
한가지는 김한길과 안철수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 이른바 새정치연합의 정강정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6.15, 10.4 남북공동선언을 존중 승계한다는 내용을 빼겠다는 보도내용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유정아 신임 노무현 시민학교장의 취임 소식입니다.
첫번 째 것인 이른바 새정치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접으려합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 생각들이 다를 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제가 목매고 제 나머지 인생을 걸고 나서서 논쟁을 벌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번 째 눈에 뜨인 유정아 신임 노무현 시민 학교장의 말 한마디는 곱씹어 보고자 합니다. 그녀의 말입니다. –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관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난 친노”
그녀의 당찬 “친노”라는 말의 정의에 따른다면 저 역시 영락없는 친노입니다. 나아가 성서를 제대로 읽고 예수를 제재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친노”여야 맞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이란 ‘인간학’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예수를 믿는 첫번 째 이유는 “’나’라고 하는 한 사람”에서 시작하여 “’너’라고 하는 상대”와 “’그’라고 하는 이웃”들에 대한 존중이 통하는 세상을 그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이라는 신을 존중하고 높힌다는 고백은 바로 야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인 나와 당신과 이웃들이 똑같이 서로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고백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지요.
만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친노의 가치관이라면 친노란 이미 종교적인 셈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친노’라는 말이 ‘종북 좌빨’로 이어지고, 척결의 대상으로 매도되곤 하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해석들과 주장들이 난무하지요.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2001년 12월 10일 제16대 대통령 민주당후보 국민경선 출마를 공식선언 하던 그의 연설에서 그 까닭을 찾아 읽는답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고, 비록 그 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 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 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여러모로 다릅니다.
노무현은 분명 돌연변이였습니다. 이조 600년 이래 까지는 아니라도 동학 농민혁명 이래 120년을 따져 보면 그는 분명 돌연변이였습니다.
그 오랜 세월 정권을 움켜쥐고 있었던 세력들의 눈으로 본다면 끔직한 사건이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았으되 실제 유권자들의 선택에 의해 권력이 넘어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뭐, 수많은 말들과 원인 분석들이 넘쳐 나지만 제가 볼 때는 바로 이 경험 즉 “유권자들이 권력을 대행하는 주체를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은 오랜 기간 정권을 자기 손에 넣고 주무르던 세력들에게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악몽이었습니다. 이점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은 아주 다릅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마다 첨부합니다. 이는 노무현의 정치적 행보와 그 결과의 옳고 그름 또는 성과의 크기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노무현의 죽음은 이미 그 때 예견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역사의 반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큰 흐름이자, 인간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지는 더불어 함께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지만 믿음으로 눈으로 보면 세상은 분명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답니다.
이제 예수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그가 사람들에게 한 두 가지 명령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바로 지난 이야기에서 소개 드렸던 “가족에게 돌아가라”는 귀환명령과 “가족을 버려라”는 이탈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개의 다른 명령은 예수 당시의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기본 축을 뒤흔드는 외침이었습니다.
소외된 자들, 죄인들이라고 일컬어지는 문둥병자, 장애인, 귀신들린 자, 율법을 어긴 자 등등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고, 그렇게 그들을 격리해야만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사회를 지탱해주던 암묵적인 버팀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담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당시 율법학자들의 주류를 이루었던 바리새파를 비롯한 소시민 계층들을 향해 “가족을 떠나라”고 하는 이탈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시 사회의 기본 구성요인이었던 가족제도를 허물고 그 터 위에서 유지되었던 권력의 기반을 흔들어 엎는 반사회적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정치적 사형 방식인 십자가를 당시 사회에서 피해갈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