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화덕 – 말씀 3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8 

어느 날 예수께서는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많았는데 그 중 여럿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이며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대답하셨다. – 마가복음 2 : 15 -17 

페이스북 친구 한분이 올린 사진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댓글을 달았었답니다. 제가 단 댓글에 그 분은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선운산으로 유명한 전북 고창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 몇 장이었습니다. 내 눈길이 꽂혔던 사진은 고창 여행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장어구이였습니다. 

사실 그 장어구이보다는 장어를 굽는 연탄불에 제 눈길이 꽂혔었답니다. 제 눈에는 영락없는 연탄불이었답니다.

연탄화덕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연탄화덕에 둘러앉아 돼지갈비와 동태찌게에 막소주나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던 시절과 그 때에 함께 했던 얼굴들을 추억했었답니다. 돼지갈비나 삼겹살, 매운탕 등은 그나마 주머니 사정들이 넉넉할 때 그 화덕 위에 올려졌을 터이고, 많은 경우에 동태찌게 한 뚝배기를 연탄화덕 위에 올려놓고 물 붓고 고추장 풀고를 거듭하며 막걸리동이나 제법 비우던 시절이었답니다. 

이젠 추억이 된 연탄화덕과 함께 했던 시절들을 떠올리게 했던 사진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올린 페친의 설명을 듣고서는 세월의 간격이 제 추억속의 시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그 페친의 사진 설명이랍니다. “야자수로 만든 불이랍니다. 킬로에 65,000원이고요. 셀프로 구워 먹는 곳입니다.”

연탄화덕1

이런 친절한 사진 설명에도 불구하고 저는 장어를 굽고 있는 사진 속의 화덕은 연탄화덕이라고 믿기로 했답니다.

 자! 사진을 찍고 사진을 소개하는 사람이 야자수로 만든 불이라고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연탄불로 생각하고 믿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연탄화덕에 동태찌게를 올려놓고 물붓고 고추장 풀고를 거듭해가며 막소주를 들이키던 시절은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난이라고 하지만 절대 빈곤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술집 연탄화덕에 둘러 앉을 수 있었다는 말은 절대 빈곤과는 거리가 먼 그저 그 시절 소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에 비교적 가까운 것입니다. 

아마 그 시절 함께 했던 많은 친구들에게  2014년 오늘에  “야자수로 만든 불에 킬로에 65,000원하는 장어를 셀프로 구워먹는”  일들은 그리 고민하지 않아도 선택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2014년 한국사회 소시민들이 맘 한번 먹으면 즐길 수 있는 일일겝니다. 

그런데 연탁화덕에 동태찌게를 끓여먹던 1960, 70년대나 야자수로 만든 불에 장어를 구어먹는 2014년 오늘이나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인 이웃들은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말하는 “절대 빈곤”이라는 말은 경제적인 문제만 국한해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 노동, 정치, 종교 등의 모든 사람들이 살며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모든 분야에서의 절대빈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는 절대빈곤층들(예수 시대에 죄인으로 불리우던 사람들)을 향해 치유와 용서의  기적을 배푼 후에는 “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른바 귀환명령입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네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물론 돌아갈 수 있는 상태로 기적을 베푼 후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제가 이야기했듯 그들이 돌아갈 곳, 곧 가족들이 있는 세상을 바꾸는 일의 몫은 돌아간 사람(치유받은 죄인들)들이 풀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가 “가족을 떠나라.”, “가족을 잊어라.”, “가족을 버려라.”라고 명하는 사람들은 예수 시대에 소시민계층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연탄화덕에 동태찌게를 우려 먹던 사람들, 야자수로 만든 불에 장어구이를 구어 먹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드는 구절들을 읽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소시민 계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찌보면 선한 구석이 있는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성경(구약 특히 오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며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 이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절대빈곤층(소외된 자들, 죄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더불어 함께 살려 하지 않고, 당시의 사회 종교 지배층들을 떠바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추억했던 소정(小丁) 이문영(李文永)선생님께서는 이런 소시민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절대로 절대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고, 소수의 가진 그룹 곧 사회 상류층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가 이른바 이탈명령, 곧 가족을 버리라고하는 명령하시는 지점입니다. 

얼핏 전혀 다른 명령인 것 같은 “가족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과 “가족을 버려라”고 하는 명령 사이에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똑같은 내용의 명령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내린  이 두가지 다른 명령으로 하여 예수는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