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 기적 1

<하나님 나라=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8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출애굽기 20 :12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 27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35 

오늘은 시 하나 읽고 시작하지요. 

식구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다 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박제영시인의 시집 <식구>에 실린 시랍니다. 그가 바라 본 식구들의 모습들 두어 개 더 보기로 하지요. 

뻘짓 

나가 시방 일흔인디 그기 다 헛으로 묵은 기라 돈 법네 시 씁네 바꺁으로만 사십 년을 나댕겨 부렀잖여 마누레고 자석이고 평생을 생과부로  생고아로 살았응께 타박을 받아도 싼 기라 그라도 남편이라꼬 애비라꼬 쪼까내지 안능 것만도 고맙제 

취한 노시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찌나 얼얼하던지요 집에 와서 잠든 아내와 딸을 와락 깨워, 이리 쪽 저리 쪼옥, 뽀뽀를 한참 해대고 나서야 얼얼한 게 조금 풀리더라구요 

거룩한 계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데우리 집 가계 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식구나 가족의 모습들도 많이 변했거니와, 가족이나 식구를 바라보고 느끼는 생각들도 많이 달라져가고 있습니다. 가족이지만 식구는 아닌 경우도 비일비재 하거니와 그 반대의 경우도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 구성의 결합형태를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와 게젤샤프트(Gesellshaft)라는 말로 정의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önnies)입니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란 공동사회(Community)라는 말로써  인간의 본질의지(Wesenswille) 곧 타고난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합니다. 가족이라는 최소단위의 사회로부터 시작해서, 지역적으로는 우리 마을, 우리 나라로 커져가고, 정신적으로는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 박제영이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들이야말로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의 원형일 것입니다.  

반면에 게젤샤프트(Gesellshaft)란 이익사회(Society)라는 말로써 인간의 선택의지(Kürwille) 곧 후천적 욕심에 따라 이루어진 사회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틀입니다. 바로 이익추구를 위한 계약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최우선인 사회입니다. 

퇴니스(F. Tönnies)는 인류의 사회 발전은 공동사회 곧 게마인샤프트에서 이익사회 곧 게젤샤프트로 진행되어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독과 소외, 단절 등의 아픔을 겪게 됨으로 이 두 개념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는 전망을 했답니다. 

그리고 작고하신 한국의 리영희선생은 그의 책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원리는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유의 ‘물신 숭배’ 신앙으로 물적 생산과 낭비와 파괴를 인간 행복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그 대신 물질적 획득과 소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적 요소들은 손상되고 무시되고 파괴되는 위험도 정비례적으로 커집니다.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그렇고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요. 법률이나 종교가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유럽의 사회체제는 소련의 체제보다 훨씬 나은데다, 미국사회의 속성인 이기주의·폭력주의·극심한 빈부격차·범죄·타락을 상당한 정도까지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된 인간 생활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어요. ” – 리영희의 ‘대화’에서 

자!  다시 예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 뿐만 아니라 당시 예언자나 메시야를 자칭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서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로 사람들을 불렀던 것처럼 어떤 이는 요단강가로, 어떤 이는 예루살렘성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소리를 외치며, 때론 기적을 말하며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the poor

스스로 사람들이 있는 곳,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특히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각종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자들을 가까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핸디캡 곧 장애나 각종 질환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사회법이 적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사람들은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보통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 곧 자신들의 가족과도 격리된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살 수 있으니 이곳으로 오라!”고 목청껏 외쳐도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가 기본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곁으로 나아갔습니다.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간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기적을 베풉니다. 

그러자 떠돈 소문이 바로 “미친 놈”이었답니다. (마가복음 3 : 21) 

정작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에 놀란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를 찾아 집으로 끌고 올 요량으로 그를 찾아 나섭니다. 

이 때의 일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 – 35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 신념과 믿음을 뒤집어 엎는 반란이요, 신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미치지 않고 서는 감히 뱉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의 제 오계명을 송두리째 뒤엎는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