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이성(理性) – 영화 변호인을 보고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본 게 언제적 일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민(移民)온 이후 영화관을 찾아가 한국영화를 본 일이 이번이 처음이니 아마 족히 삼십 년은  넘은 듯 합니다. 

몇 년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가까운 필라델피아 영화관에서 김기덕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그 영화를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가 끝내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고요. 나중에 집에서 다운 받아 보고는 김기덕감독의 영화들을 두루 찾아 보기도 했었답니다. 

아무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TV 모니터로 보는 맛은 좀 다르지요. 

그러다 엊그제인 월요일 밤에 마침내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보게 되었답니다. 영화 “변호인”을 필라델피아  Warrington에 있는  Regal Cinema에 가서 보고 온 것이지요.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아야 제 맛이더라고요.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의를 두 군데 다른 모임에서 받았답니다. 한 곳은 저와 세상 보는 눈높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고, 다른 한 곳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영화상영기간(2. 21- 2. 27 딱 일주일)이 짧아서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었다는 까닭도 있었지만, 세상보는 눈이 비교적 저와 다른 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있고해서 두번 째 그룹인 신앙생활을 함께하는 이들과 영화를 같이 보았답니다. 

다들 가게들을 하고 있는 처지라 문을 닫은 후 함께  저녁식사도  한 뒤에 영화를 보기로 하고, 마지막 상영시간인 9시 50분에 시작하는 것을 택했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새벽 1시 반이 넘었답니다. 

그날 함께 영화를 본 이들의 평균 연령는 거의 육십에 가깝답니다.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일상의 일탈에서 일어난 피로가 계속되는 나이들이랍니다. 

아무튼 함께 영화를 본 아홉 명 가운데  여섯명은 이즈음 한국의 표준어가 된 듯한 경상도 말을 쓰거나  그 곳이 고향인 분들이었고요, 저도 태생은 피난지 부산에서 났으니 그렇게 따지면 일곱이 영남이 되겠네요.  굳이 정치적인 성향이나 세상보는 눈으로 따져 보자면 저와 제 아내를 빼고는 아무래도 이른바 보수쪽(?)으로 기우는 분들이었답니다. 

모두 아이들이 거의 다 컸다는 공통점도 있겠군요. 우리 부부가 이 곳 델라웨어에서 살면서 함께하는 정말 참 좋은 한국인 이웃들이랍니다. 

그렇게 영화 변호인을 보았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나이 탓도 있고, 밤 늦은 시간 탓도 있고, 함께 타고 간 ben 운전을 맡은 이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영화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답니다. 

다만 제 생각은 이 그룹과 영화를 함께 본 일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적 시각으로 영화  “변호인”을 보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가 다른 그룹인 저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면 뭐 이데올로기까지 나아갈 정도의 영화가 아니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인권문제라던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정치인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되씹음 등의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이 영화를 본 이들의 입장에서 느낌을 찾아보려고 하니 영화의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본 후 제게 크게 다가온 것은 두가지랍니다. 

주인공 송우석변호사에  대한 느낌은 이미 “느낌 아니까!”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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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중에 첫번 째는 악역을 맡은 배우들을 비롯한 조연들 곧, 검사역을 맡은 조민기배우와 고문경찰 차동영역의 곽도원배우, 판사역의 송영창배우, 사무장역의 오달수배우 등의 열연이었습니다.  그들의 연기를 보면서 “사람 일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각”이랄까, 또는 “이성(理性)”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의 한계랄까, 그것을 잘 전해주는 이른바 조연들의 열연이었답니다. 

사람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뛰어날 수 있는 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이성(理性)이라는 것이지만 그  이성이란 것이 늘 잘못될  수가 있고, 때론 그 잘못된 이성은 짐승만도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 조연들이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답니다. 

무릇 신앙이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이성 곧 사람들 생각에는 한계에 있다는 고백 끝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신앙을 마구 짓밟는 세력들은 늘 있어왔지요. 때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고문경찰 차동영의 이데올로기는 영화속 시대 상황인 1980년대가 아닌 영화를 돌리고 있는 바로 오늘 2014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세지를 전해 준 영화랍니다. 

두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고 송우석을 변호하려고 그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송우석의 정신”을 변호하려고 했을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들 모두가  “변호사”라는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변호가 아닌 “송우석의 정신”을 변호했거나 그렇게 노력해 왔다면 오늘 한국사회는 정말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으로… 

모처럼 즐긴 문화생활을 돌아보며…

아버지의 88년

아주 조촐한 잔치를 마쳤답니다. 

아버님의 출판기념회 겸 어머님, 아버님의 미수연(米壽宴) 겸 막내동생 생일까지 몰아서 치룬 잔치치고는 정말 조촐한 자리였답니다. 

아버님을 생각하며 준비했고, 오늘 잔치자리에서 나눈 동영상입니다. 

이 영상은 공개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러분과 함께 잔치자리를 나누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아바타 – 기적 4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1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젖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은 새벽 네시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를 보고 모두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시며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마가복음 6 : 48 -51 

어떤 보도를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는다고 해서 역사적인 진실이 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죠지 워싱톤이 실제로 은화 1달러를 포토맥 강 너머로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믿는 쪽을 택하겠다.  하지만 이런 나의 믿음은 실제로 그가 그랬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의 묹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예수가 실제로 이런 일들을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질문도 그와 같다. 그가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그가 그렇게 했는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역사적인 질문을 신념이나 믿음으로 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예수의 귀신축출행위나 치유행위를 제외한 권세있는 다른 행동들은 “역사적 미결 보도”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비록 예수전기의 일부분인 이 이야기들이 불확실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예수에 대한 교회의 이야기 일부분으로서 이런 이야기들이 지닌 의미는 명확하다. 그 시대의 연관성을 가지고 비유적 표현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이야기들은 초대교회가 경험한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험과 악에서 구하시며 광야에서 먹여 주시고 죽움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임을 확실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예수 새로보기(Jesus! A New Vision)’에서(김기석 번역)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은 예수 이야기,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마태 3:16)” 내려 앉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 :17)”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 갑자기 모습이 변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마침내 예수가 부활해서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와 함께 길을 걷는 이야기 등을 읽거나 듣는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요?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거나 행해졌던 기적 이야기들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답니다. 첫째는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기적들입니다. 곧 치유의 기적 유형입니다. 두번 째는 풍랑이 일어 사나운 바다를 잔잔케 한다거나 베테랑 어부들도 빈 손일 정도로 조황이 안좋은 환경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게 했다는 이야기, 오천명을 먹인 이야기 등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든 여러 예들처럼 하나님 곧 신이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신의 현현(顯現) 기적 유형입니다. 영어로는Epiphany라고 하는 신의 현현은 신이 직접 나타나 사람들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나타나는 현상을 발합니다. Incarnation(화신化身)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예수 그 자체가 신의 현현이라는 말할 때 이 말을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꼭 알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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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지요. 흥행기록을 세운 3D 영화로 유명한 영화 말입니다. 바로 그 아바타(Avatar)라는 말이 힌두교에서 쓰는 아바타라(Avatāra)의 영어식 표현인데요, 그 뜻이 신의 화신(神의 化身, incarnation of God)이랍니다. 신이 사람세계에 드러난 모습을 아바타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힌두교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잊고  악과 부정(不正)에 빠져있을 때,  진리를 가르쳐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신(브라만)의 대리자로서 아바타가 나타난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런 신의 화신은 불교에서도 나타난답니다. 이른바 불교의 삼신설(三身說)이 그것입니다. 삼신이란 첫째  법신(法身)  둘째 보신(報身)  셋째가 바로 화신(化身)인데, 화신이란  진리를  이미 깨달은 붓다가  일반 사람(중생)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일을 하는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현현 곧 신이 나타나는 기적은 딱히 예수에게만 나타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비단 예를 든 고등종교 뿐만이 아니라 원시종교에서도 신의 현현 기적 이야기들은 넘쳐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신이 나타나는 기적을 인정하고 믿되, 거기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랍니다. 

이런 신 현현 기적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전제로 삼는 믿음만으로는 참다운 예수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만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기적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전제가 아니라 신앙의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거저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기적이야기를 하면서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첫번 째 기적 유형인 치유기적에 대한 것이랍니다. 

자!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세 가지 기적의 유형들 가운데 두번째,  세번째인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의 현현 기적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고 치유 기적으로 넘어갑니다.

간절함 – 기적 3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0

악령의 발작으로 그 아이는 불 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였읍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읍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이 말에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 마가복음 9 : 22 – 24

개인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처리해야 할 들이 있어 한 주간 글쓰기를 쉬었답니다. 게다가 하루 걸러 내리는 눈이  일상의 시간들을 마구 헝클어뜨린 탓도 한 몫했답니다. 아무튼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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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도 지나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엔 해마다 음력 정초이면 시장바닥이나 역광장이나  정류장 부근에 자리를 깔고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의 토정비결을 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토정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고  기지, 예언, 술수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조선시대(1517-1578)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보는 책 토정비결을 쓴 점술가 정도로 토정선생을 생각하지만, 그는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낸 목민관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관내에 있는 굶주린 백성, 아픈 백성, 노인들을 돌본 일들에서 이즈음 사회적 화두인 “복지”를 실현한 선각자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포천, 아산 두 고을 현감으로 있으면서 나라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서는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적어 올리며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는 백성 사랑하는 관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라는 비결서를 그가 썻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후대 사람들이 만든 비결서에 토정 행했던 여러 기행의 힘을 빌리고자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답니다.

아무튼 알수없는 내일에 대한 길흉의 점괘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또는 행운이나 길운을 꿈꾸며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토정이 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뭐 하늘의 이치를 알아서 사람들의 신수를 말하겠소. 하두 졸라서 보아준 게지. 또 그네들은 내가 신수를 안보아 주면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다른 데 가서라도 기어이 신수를 보아야만 마음 편해질 것이니, 내나름대로 그들 사정을 들어 이리 저리 이야기하여 준 것 뿐이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했다고 전해오는 말이랍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함께  예수의 기록을 자신이 쓴 역사책에 남긴 사람으로 알려진 로마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기원후56년 – 117년)는 그의 책 <역사>에서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적을 행한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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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시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엎드려 한숨을 쉬며 자신의 눈을 고쳐줄 것을 간청했다.  – 중략 – 그가 청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침을 자기의 뺨과 눈거풀에 문질러 달라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도 같은 신(세라피스 신)의 명령에 따라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서 자신의 손을 발로 밟아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일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병자들이 집요하게 매달리자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  – 중략 – 환자들의 간절한 바람도 있고 아부꾼들의 환호도 있어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보기로 했다. – 중략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행운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다하여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 앞에 섰다. 문제의 그 손은 금방 정상으로 돌와왔고, 앞을 못보던 사람에게도 새로이 광명을 찾아왔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서는 이들을 볼 수 없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그 때 그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이 두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나 로마 베스파시아누스황제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비결을 받고,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어떤 기원(祈願)과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이야기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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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보다 먼저 광야에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했던 요한이나, 당시 갈릴리를 근거로 해서 일어났던 갈릴리 유다의 반로마 봉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깊히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을 찾아 나섰거나 갈릴리 유다와 함께 반로마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함께 할만한 여건”들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싶거나, 반로마 항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지라도, 그 길이 원천 봉쇄된 처지로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나병환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환자 등 각종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나 귀먹고 눈이 멀었거나 신체 이상이 있는 장애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었고, 그것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 규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원 곧 소망은 병이 낫고, 장애로 부터 해방되어 자신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정상인으로서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줄 당시의 의술(醫術)은 그들이 기댈 곳이 못되었습니다. 값비싼 의약품들과 의술은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의 몫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댈 곳은 오직 ‘기적’뿐 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향해 나아간 것이고, 또한 그들이 찾은 이가 바로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고, 그 기적을 본 사람, 베품을 받은 사람, 전해들은 이들의 반응들은 어떠했으며, 기적을 행한 후 예수가 보인 모습들을 두루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포용 – 기적 – 2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은 법> – 29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 마가복음 9 : 38 – 41 

완전한 환상가(visionary)와 신비가(mystic)는 자신과 같은 환상가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영향은 곧 전해진다. 실천적 지혜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만 민첩하며, 단지 머리에만 영향을 미칠 뿐 가슴에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신비적 신앙에 실천적 분별력이 동반될 때만, 강력하고 지속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나사렛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 또한 그 추종자들을 통해 그 다음세대들에게 끼친 영향이 바로 이런 성격의 것이었다.  – 죠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의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에서 

예수의 첫 사역으로 기적을 베풀자 떠돈 소문이 “미쳤다”는 것이었고, 그 소문에 놀라 예수를 찾으러 온  그의 가족들을 향해 “누가 내 가족(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되물었던 예수의 모습을 그린 마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마가복음 3: 31 – 35) 

가족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인 발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과격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0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비단 유대인들의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직도 우리들 실생활과 생각을 깊게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거의 인간말종 수준의 선언인 것입니다. 

딱 예수의 말이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으로 받을 일이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나 당신 주변의 사람 누군가가, 아니면 당신이 참으로 신실한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아무개가 만일 제 부모가 죽었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한다고  종로거리에 나가 “예수 천당”을 외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제정신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며 가족들을 심히 미워해서 전혀 돌보지않고, 자신마저 학대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으로서 할 일이겠습니까? 

가족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그야말로 가족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깨부수는 혁명적 선언이자 가히 급진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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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꼼꼼히 다시 예수의 선포를 들여다보면 예수가 그의 선포를 통해 방점을 찍은 가족의 의미는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범위를 끝없이 넓혀 확대한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 가족은 핏줄 곧 혈연관계로 얽힌 관계가 아닌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로 영역을 확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가 찾아나섰던 갈릴리 마을의 살았던 사람들, 문둥병자를 비롯한 환자, 눈 멀고 귀먼 장애인들, 여자, 어린이, 사마리아인, 심지어 원수들 까지 예수의 가족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인, 헤롯일가, 제사장들, 레위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를 비롯하여 부자와 권력자들까지 예수의 가족일수 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이러한 가족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예수는 비록 급진적, 혁명적 언사와 선언으로 가족을 정의했지만 그는 누구나 모두가 가족이 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말씀이 바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마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가족에 대한 선언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폭넓고 깊이있게 하나님 나라를 만나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인 셈입니다. 또한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비단 신앙적인 판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진보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한반도의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 한반도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 살던 한민족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곱씹어야할 예수의 가르침이랍니다. 

제 아무리 생각이 급진적이고, 제 잘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포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구원을 받는 전제가 바로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제대로 받아드리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가족 – 기적 1

<하나님 나라=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8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출애굽기 20 :12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 27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35 

오늘은 시 하나 읽고 시작하지요. 

식구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다 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박제영시인의 시집 <식구>에 실린 시랍니다. 그가 바라 본 식구들의 모습들 두어 개 더 보기로 하지요. 

뻘짓 

나가 시방 일흔인디 그기 다 헛으로 묵은 기라 돈 법네 시 씁네 바꺁으로만 사십 년을 나댕겨 부렀잖여 마누레고 자석이고 평생을 생과부로  생고아로 살았응께 타박을 받아도 싼 기라 그라도 남편이라꼬 애비라꼬 쪼까내지 안능 것만도 고맙제 

취한 노시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찌나 얼얼하던지요 집에 와서 잠든 아내와 딸을 와락 깨워, 이리 쪽 저리 쪼옥, 뽀뽀를 한참 해대고 나서야 얼얼한 게 조금 풀리더라구요 

거룩한 계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데우리 집 가계 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식구나 가족의 모습들도 많이 변했거니와, 가족이나 식구를 바라보고 느끼는 생각들도 많이 달라져가고 있습니다. 가족이지만 식구는 아닌 경우도 비일비재 하거니와 그 반대의 경우도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 구성의 결합형태를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와 게젤샤프트(Gesellshaft)라는 말로 정의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önnies)입니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란 공동사회(Community)라는 말로써  인간의 본질의지(Wesenswille) 곧 타고난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합니다. 가족이라는 최소단위의 사회로부터 시작해서, 지역적으로는 우리 마을, 우리 나라로 커져가고, 정신적으로는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 박제영이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들이야말로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의 원형일 것입니다.  

반면에 게젤샤프트(Gesellshaft)란 이익사회(Society)라는 말로써 인간의 선택의지(Kürwille) 곧 후천적 욕심에 따라 이루어진 사회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틀입니다. 바로 이익추구를 위한 계약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최우선인 사회입니다. 

퇴니스(F. Tönnies)는 인류의 사회 발전은 공동사회 곧 게마인샤프트에서 이익사회 곧 게젤샤프트로 진행되어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독과 소외, 단절 등의 아픔을 겪게 됨으로 이 두 개념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는 전망을 했답니다. 

그리고 작고하신 한국의 리영희선생은 그의 책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원리는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유의 ‘물신 숭배’ 신앙으로 물적 생산과 낭비와 파괴를 인간 행복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그 대신 물질적 획득과 소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적 요소들은 손상되고 무시되고 파괴되는 위험도 정비례적으로 커집니다.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그렇고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요. 법률이나 종교가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유럽의 사회체제는 소련의 체제보다 훨씬 나은데다, 미국사회의 속성인 이기주의·폭력주의·극심한 빈부격차·범죄·타락을 상당한 정도까지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된 인간 생활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어요. ” – 리영희의 ‘대화’에서 

자!  다시 예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 뿐만 아니라 당시 예언자나 메시야를 자칭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서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로 사람들을 불렀던 것처럼 어떤 이는 요단강가로, 어떤 이는 예루살렘성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소리를 외치며, 때론 기적을 말하며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the poor

스스로 사람들이 있는 곳,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특히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각종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자들을 가까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핸디캡 곧 장애나 각종 질환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사회법이 적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사람들은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보통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 곧 자신들의 가족과도 격리된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살 수 있으니 이곳으로 오라!”고 목청껏 외쳐도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가 기본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곁으로 나아갔습니다.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간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기적을 베풉니다. 

그러자 떠돈 소문이 바로 “미친 놈”이었답니다. (마가복음 3 : 21) 

정작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에 놀란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를 찾아 집으로 끌고 올 요량으로 그를 찾아 나섭니다. 

이 때의 일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 – 35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 신념과 믿음을 뒤집어 엎는 반란이요, 신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미치지 않고 서는 감히 뱉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의 제 오계명을 송두리째 뒤엎는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광인(狂人) – 하나님 나라 3

<하나님 나라-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7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을 불러서 주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 누가복음 7 : 18 – 19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 마가복음 3 : 21 – 22 

1991년 10월 30일 열린 한국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제 19차 임시 총회에서는 홍정수목사에 대한 교단축출 및 교수자격 박탈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에는 감신대 학장을 지낸 변선환목사의 교단 축출 및 교수직 박탈을 결정한 현대판 종교재판이 있었습니다. 

홍정수는 <베짜는 하나님 : 이단자를 위한 한국신학>이라는 그의 책을 통해 이른바 상생신학이라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변선환은 그의 논문 <불타(佛陀, Buddha)와 그리스도> 등의 글을 통해 다원주의신학을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변선환은 그의 서서 10주기 행사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복권선언을 받습니다.

“선생님의 신학을 이단으로 정죄해 출교시킨 후 과연 감리교회는 성장하고 풍성해졌나. 이제 사람들은 최고 심판관으로 변신한 교회가 무섭다고 한다. 종교는 무섭지 않은데 한국교회가 겁이 난다고 한다. 신학자들도 글 쓰거나 강연할 때 교회 눈치 살펴야 할 지경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기본적인 세상의 합리성과 상식이나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다음은 현재 LA 한아름교회에서 목회하는 홍정수목사가 최근에 한 말이다,

“언젠가 한번 지인들의 소개로 큰 부흥회를 가본적이 있다. 그 날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그리고 축복만 강조하지 예수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번 붙잡고 물어봤다. 당신은 왜 예수를 말하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만 얘기하냐고. 그랬더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 사람 말인 즉, 하루 종일 지치고 힘들어 부흥집회를 와서 은혜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겪으신 예수 이야기를 하면 받을 은혜도 까먹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그 만큼 한국교회는 하나님은 찬양 할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예수 하면 저마다 고개를 돌려 꺼려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말해도 마치 공식 처럼 ‘예수= 대속사건’이란 교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미신적인 신앙관에 안주하기에 십자가의 깊은 의미 그리고 부활에 대해선 일절 언급을 꺼려한다.” 

먼저 왜 이런 일들이 감리교단에서 일어났을까요? 감리교는 한국내 개신교 교단 가운데 세번 째로 큰 교단(장로교 합동, 장로교 통합, 감리교…순)입니다. 

감리교는 칼빈의 예정설을 기반으로 한번의 거듭남(예수를 구세주 곧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장로교와는 교리의 차이가 있답니다. 장로교가 예정설을 강조하는 반면 감리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에 따른 행위와 훈련의 과정을 통해 구원의 깊이가 깊어지고, 더욱 더 하나님 앞으로 완전하게 나갈 수 있다는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만 보자면 장로교와 캐톨릭의 중간쯤에 있다고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는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기보다는 전통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국 감리교단에 속한 개교회들 – 특히 대형교회들은-은 거의 장로교, 특히 보수를 자칭하는 장로교회들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만큼 이상하리만큼 보수적(?)이랍니다. 이들이 교단을 장악하고 있기도 하고요. 변선환목사의 축출과정을 보면 그 배후에 명성(이즈음 아이들 인터넷 글쓰기를 흉내내자면 – 명성이라고 쓰고 악명으로 읽어야 하는) 드높은 김홍도같은 인물이 있답니다. 

제 삶의 반은 장로교 통합에 속한 교회에서 보냈고, 이민와서 인생의 반은 미국연합감리교단에 속한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한 교회, 이민와서 한 교회입니다. 제 경우에는 교회 뿐만 아니라 교단이 제가 예수쟁이로 사는데는 별반 주요한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연합감리교단에 속한 한인교회들 역시 한국내 감리교단과 마찬가지로 장로교단과 큰 차이가 없답니다. 한인교회에서 교리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징표이기도 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 복음주의(근본주의) 신앙 전통과 유교적 한국인들의 사회인식이 접목된 한국이나 미국 이민사회 한인교회들의 독특함은 따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하튼 홍정수목사와 변선환목사는 교단의 권세가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받은 바 있거니와, 깊은 물정이나 속내에 관심없는 이들에겐 “미친 놈”취급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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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이쯤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인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성서의 말씀들 가운데 이사야서가 있습니다. 두 군데를 찾아 읽어 보도록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 – 이사야 9 : 5 –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 이사야 52 : 6 – 7” 

새로올 메시야의 모습과 그의 오심을 갈망하는 유대인들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 헤롯왕가를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이 주인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특히나 갈릴리인들 가운데는 무력투쟁을 통해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들을 몰아내고 유대왕국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열심당(젤롯당)의 근거지가 갈릴리에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향한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분이냐?”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은 비단 세례요한만의 질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가 이야기한 하나님나라 탐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서 마가는 예수가 본격적으로 그의 선교를 시작하려던 무렵 먼저 “미쳤다”는 소문에 휩싸이게 되었고, 가족들이 미친 예수를 붙들러 나섰던 사실을 전하고 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 마가복음 3 : 21 – 22” 

예수는 왜 그의 일을 시작하자마자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요? 이제 그 까닭을 찾아 함께 나서 보기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