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5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 마가복음 1 : 14 – 15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마태복음 12 : 28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 마태복음 11 : 2 – 6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 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누가복음 10 : 23 – 24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11 : 31 – 32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이 선언은 필연적으로 오랜 미래의 예상(전망)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으로 기대했던 총체적인 종말론적 구도를 뒤집는다. 종말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기대의 영역으로부터 실현된 체험 속으로 움직였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사상의 내용을, 마치 예수가 그것을 의미했다는 식으로, 묵시문학 저자들의 상상으로부터 채워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묵시문학 저자들은 미래의 어떤 것을 가르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환상과 관련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예수는, 적어도 한가지 측면에서, 체험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다드(C. H. Dodd)의 “하나님나라의 비유들(Parables of the Kingdom)”에서
갈릴리 해변 마을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설교를 선포하기 시작한 예수의 첫 선언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라는 이 예수의 첫 선포는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통해 했던 모든 말씀들 곧 설교의 요약이라고 보고 아주 중요한 메세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다.’라는 말과 ‘가까왔다’라는 말이 ‘이미 온 것이냐’, ‘앞으로 올 것이냐’라는 시점에 대한 수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어라.’했는데 여기서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복음’이란 곧 예수인데 예수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일 아니냐? 그러니 이건 예수의 말이 아닐 것이다. 등등 수많은 연구들과 논쟁들이 넘쳐난답니다. 아마 이런 연구서들만 다 읽고자 하여도 죽을 때까지 읽어도 결코 다 섭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단 학문적 연구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머리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들과 자신들만의 믿음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제 자신 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정말 중요한 촛점은 “한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교회 뿐만 아니라 나나 당신이 속해 있는 아주 작은 단체 또는 동네에서부터 국가 나아가 인류공동체에 이르기까지)”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바른 이해이고, 실제 그 나라를 누리는 일, 그 나라를 누리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 속에서 사는 일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어 그 나라에서 살며 부활을 맛보는 일 말입니다.
자! 이제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예수입니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첫 선포를 다시 읽어 보기로 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서 ‘찼다’, ‘왔다’라는 시제 곧 이게 현재형, 현재완료형, 미래형이냐하는 것 말고는 뜻을 모르는 말을 꼽으라면 두 개입니다. 때, 차다, 가깝다, 왔다, 회개, 믿으라는 말들은 누구라도 그냥 다 알 수 있는 말이거니와 크게 의견이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어떤 것이냐하는 것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는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는 아무 설명도 없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장황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지요. 혹시 한국에서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듣게 된 ‘창조경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만일 알고 계신다면 그 말을 누군가에게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잘 모르기에 드리는 말씀이랍니다.
박근혜정부의 주요 부서가 된 미래부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경제란 “국민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과학기술과 ICT에 접목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고, 기존산업을 강화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새로운 경제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실 수 있으신지요? 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말일까요? 당신이 먹고 사는 일에 어떤 영향이 있을 것인가 하는 제 물음입니다.
창조경제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도 많고 그에 대한 설명도 많지만 실체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모호한 개념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 곧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면 공통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세상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일테면 이즈음에는 민족 공동체적인 생각이 덜하기는 하지만 “통일”이라는 말을 들을 때 한민족만이 느끼는 어떤 감정이 있듯이 말입니다.(사실 이런 감정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것이었답니다.)
예수의 죽음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생각들과 예수의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는데, 예수는 이미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그 생각의 다름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란 어찌보면 그 생각의 다름을 좁히려는 과정일 수도 있답니다.
이제 우리들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임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 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