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허그

그의 풀 네임은”Vance A. Funk, III “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Mayor Funk”라고 불리운답니다. 누구냐고요? 제 가게 단골 손님이랍니다. 

본래 직업은 변호사인데 제 가게가 위치한 Newark시의 시장으로 2004년부터 지난 해 10월까지 일했던 양반이랍니다. 

올해 만 일흔 넷인 펑크씨는 몇 해 전 스트록이 와서 입이 돌아가고 반신을 제대로 못쓰는 병마 속에서도 끈질기게 투병하며 시정을 이끌어 온 의지의 미국인이랍니다. 

이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지난 해 시정살림을 꾸려 가기가 너무 벅찬 나머지  시장직을 스스로 내 놓았답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Mr. Hug랍니다. 만나는 이들마다 꼭 껴안아 주는 그의 모습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제 가게에 오면 저와 제 아내를 품어주는 일이 우선입니다. 다른 손님들이 아는 눈길만 보내도 먼저 안아주는 일부터 한답니다. 

그런 Funk씨가 오늘 제 가게에 들어 오셔서 푸른색 주단 상자를 내미셨답니다. “시장 일을 그만 둔 이후 이런 저런 짐들을 정리하다가 이걸 보면서 너희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들고 왔다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면서 잇는 말이 “너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설명해 주렴”하는 것이었습니다. 

푸른색 주단상자를 여니 상패처럼 만든 패였는데,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에서 만든 국보 제285호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본떠 만든 패였습니다. 

그 패를 Funk씨에게 보낸 당시 울산시장의 편지도 상자 안에 있었답니다. 

상자 안에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설명서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거기 붙은 제목이 “한민족 대표 유산”이라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오늘 처음 들어 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였답니다. 

부끄러움과 함께 한국 전통과 역사가 담긴 물건을 보며 제 가게를 생각해 주신 Mr. Hug, 언제나 제게 시장인 Funk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도 오늘 찾아 읽어 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기사 하나 소개 드립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99859.html

완장 – 갈릴리 8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4 

야훼를 너의 피난처라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뿌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 – 시편 91 : 9 – 12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장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8 : 44 

마귀의 두번 째 시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입니다. 마귀가 인용한 성서는 시편 91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91편을 읽고 음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늘 함께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말짱하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으로 읽히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제 오늘날 교회들과 믿는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며 ‘아멘’ 소리를 드높히는 덕에 ‘개독교’소리를 듣기도 하거니와, 참 예수쟁이들을 확장시키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91편만 딱 떼어놓고 한번 생각해 본다면, 세상 그 어떤 종교들과 견주어 그 어떤 차이도 없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이 새벽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신앙 역시 시편 91편과 똑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특히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 앞뒤 가리지 않고 이런 시편 91편을 내세우는 신앙적 태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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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단을 대웅전 뒤에 마련해 놓고 사람들의 신앙적 한계를 적절히 포교의 수단으로 삼은 한국불교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털끝만큼의  재앙이나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선포들과 믿음이 설교 강단을 차지한 모습은 칠성단이 대웅전 뒤가 아니라 설교 강단에 차려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를 향한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전제는 바로 신앙의 전제입니다. 찬찬히 돌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일들(역사)과 오늘 날의 일들(현재)를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라는 모습들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답니다. 근세 이전 모든 권력들의 모습이거니와 오늘날에도 지역과 상황에 따라 널려 있는 모습이랍니다. 크게는 민족과 국가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요, 작게는 지역사회,  작은 집단을 비롯하여 한 개인의 영혼과 생각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차고 넘치는 일이고요. 

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인용한 성서는“마싸아에서처럼 너희 하느님 야훼를 시험하지 못한다.”라는 신명기 6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므리바의 샘물’입니다. 

하나님(신)이 부여한 권력이나 능력을 기적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나 그것을 요구하는 일은 신(하나님)을 떠보는 일이라는 선언입니다. 신의 일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을 인간들을 설득하기 위한,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시험문제는 예수가 죽기 직전에 받았던 시험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에 사람들이 예수에게 낸 시험문제였습니다. “네가 신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당연히 네 아버지인 신이 도와 주지 않겠느냐?”는 시험 말입니다. 

예수는 처음 광야에서 그랬듯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적이나 표적의 징표가 신의 아들을 입증하는 일도 아니거니와 하나님 나라를 믿는 신앙의 전제가 아니라는 예수의 선포요, 시편 91편에 나오는 신앙은 인간의응답일 뿐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물론 그 응답은 신이 요구하는 것이지만 결코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놓인 마귀의 시험은 “내게 무릎을 꿇으면,  세상을  다 너에게 주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정말 차고 넘치게 보는 일들이지요. 왈 ‘완장’이라고 하지요. 크고 작은 권력 앞에서 ‘완장’차고 제 배불리며 부끄럼 모르는 이들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어느 시대건 넘쳐나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였는데 이는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 되더라도 너희는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 가면 안 된다.- 신명기 6 : 12 – 14”는 말씀에 근거를 둔 선언인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 이외에는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선언이며, 역사 이래 오늘날 까지 야훼 하나님 자리응 제것으로 착각하고 사람들을 무릎 꿇리게 하는 모든 신(권력)들은 “아니”라고 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마친 예수는 이제 갈릴리로 나갑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나머지 삶과 말씀과 행위들은 바로 이 광야에서의 선언들을 사람들의 말로 쉽게 풀어주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