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6
헤롯 안티파스는 새로운 도시 티베리아를 묘지 위에 지음으로써 정결법을 어겼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운동은 바로 이러한 정황과, 상류층의 헬라적 삶에 의해 고유의 문화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부정한 것에 의해 위협 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세례에 대한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의 역사적 예수에서
세례요한이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체포되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요세푸스의 기록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대왕과 그의 후궁 출신 어머니인 사마리아 여인 말다케(Malthake) 사이에서 태어난 헤롯왕의 다섯번 째 아들입니다.헤롯대왕은 첫 부인 도리스와 왕후인 미르얌이 나은 두 아들은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아들에게 그의 왕국을 나누어 주고 죽습니다.
그렇게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물려받은 안티파스는 어린 시절을 로마에서 보냈습니다. 아버지 헤롯대왕이 그를 인질로 로마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반쪽 유대인(에돔출신)이었고 자신은 사마리아의 피도 섞였고 게다가 로마식으로 자란 안티파스는 집권을 하자 곧 실행한 것이 도시를 정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까지 유명한 티베리아스입니다. 당시 갈릴리의 수도였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안티파스가 당시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명명한 것입니다.
안티파스의 첫 부인은 나바테아국의 공주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방 에돔 출신, 어머니는 사마리아 출신, 아내는 이방 여자였던 헤롯 안타파스가 느꼈을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에 대해 조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곳은 유대 갈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정통 유대 하스몬 왕가 출신인 헤로디아와 재혼이었습니다. 헤로디아 역시 제 나름의 욕심이 있었던 여자였습니다. 헤로디아의 첫 남편은 바로 안티파스의 이복동생 빌립이었는데 같은 왕자 출신이지만 안티파스처럼 다스리는 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디아의 욕심이란 왕비가 되는 것이였을 겝니다.
그렇게 두 남녀의 배포가 맞아결합한 일이었지만 두 가지 이들의 장애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의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자기의 형제의 처와 결혼하지 못한다(레위기 18 : 16, 20 : 21 )는 율법을 어긴 일입니다. 두번 째는 첫부인의 아버지 나바테아국의 왕 아레다였습니다. 딸을 버린 장인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의 파멸은 이 장인의 노함에서 비롯된답니다.
아무튼 이 무렵 세례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방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성서가 몇 군데 있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 마태복음 14 : 5”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이 무서워서 ‘모르겠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마가복음 11 : 32 – 33”
“모든 백성들은 물론 세리들까지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 들였으나… – 누가복음 7 : 29”
물론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율법에 어긋난 결혼에 대해 잘못된 일이라는 예언자적 사명을 행한 일은 사실일 것입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지적을 하면 국가를 비방한 일로 치부하여 그 당사자를 죽이거나 벌하는 왈 다스리는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이 괘심죄로 죽게 되었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성서의 기록들이 전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보다 진실에 가깝게 잘 정리한 것은 요세푸스가 아닐까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요한에게 몰려들자, 요한의 영향력이 커진 것을 본 분봉왕 헤롯은 혹시 요한이 기고 만장하여 반역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요한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8권”
이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국가반란 예비 음모죄 정도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죽었다는 말이지요.
자, 이렇게 죽어 간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우선 복음서의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가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닦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마가복음 1 : 1 – 8) 마태는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마가보다 더 깊고 긴밀한 관계로 설정해서 이야기합니다. 곧 예수를 예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선포의 내용도 엇비슷하고(마태복음 3 : 2), 세례요한을 이미 예수가 선포하는 새 시대의 인물로 간주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복음 11 : 12)
그러나 누가는 이와 다른 입장으로 요한의 자리를 설정합니다. 세례요한은 옛시대의 막내일 뿐이라고 못박는 것입니다.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려고 애쓰고 있다. – 누가복음 16 : 16)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의 위치를 더욱 아래로 떨어뜨려 놓습니다. 단지 예수가 구세주임을 증언하는 역할(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 요한복음 1 :36)을 할 뿐이고, 예수가 일할 수 있는 디딤돌에 불과하다(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요한복음 3 : 30)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록 연대와 저자들의 입장에 따라 세레요한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다만 확실한 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을 예수가 세례요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한때 세례요한 집단에서 함께 생활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답니다. 아, 물론 학문적 연구의 내용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이제 그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예수는 세례요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