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전
미처 구순(九旬)을 못 채우고 떠난
어머니가
못내 아팟던
이제 곧 칠순(七旬)이 될 사내가 남긴 말.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제 육순(六旬)이 된 내가 들으며 하는 말.
“참 된 사내구먼!”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
나흘 전
미처 구순(九旬)을 못 채우고 떠난
어머니가
못내 아팟던
이제 곧 칠순(七旬)이 될 사내가 남긴 말.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제 육순(六旬)이 된 내가 들으며 하는 말.
“참 된 사내구먼!”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5
(세례)요한 당시에 유대인들이 합법적으로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으며, 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새롭고, 값싸며, 누구나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제사의식을 도입한 것은 요한의 위대한 창안이었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그의 경고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즉 예언자들은 그 이전에 800년 동안 그런 심판을 경고해 왔다. 새로운 점은 대격변을 일으키며 오는 심판(그 나라)에 대해 보통사람들도 쉽게 준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 모턴 스미스(Morton Smith)의 비밀복음서(The Secret Gospel)에서 <미국 콜롬비아 대학 고고 역사학자인 스미스는 베들레헴 동쪽에 있는 미르 사바에서 마가의 비밀 복음서를 포함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서신 사본을 발견한 사람>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인 사가랴라고 적시해서 기록한 것은 누가입니다. (누가복음 1 : 5 – 9) 누가에 따른 요한 아버지 사가랴의 모습으로 보아서 그는 하위직에 있는 사제였을 것입니다. 어떤 반(班)에 속해서 제비를 뽑아 자기 순번이 정해지는 자리란 바로 당시 풍습으로 하위직급 제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사회는 소수 최고위층의 제사장들을 제외하고는 종교적 자리의 높고 낮음이 사회적으로 부를 누리느냐 못누리느냐와는 별로 상관이 없던 때였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하위 제사장 직분에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아주 하층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비록 가문이 제사장가문에 속해 있었지만 세례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한 적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자기들만의 의식과 전통을 이어가며 폐쇄집단을 이루어 살던 에세네파 사람들의 주류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소외된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당시 상황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광야에서 활동한 세례요한 역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세력들을 비판하는 편에 섰던 것 같습니다. 그의 설교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분명히 제자를 거느리고 자기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가복음 2 :18>라는 마가의 기록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이 모이면 즐겨 사용하는 주기도문이 처음 생긴 때의 일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누가복음 11 :1>
‘요한의 무리들도 하는데 우리도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 우리들도 기도문 하나 가져봅시다.’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가 그럼 이렇게 하라면서 가르쳐 준 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요한은 제자들을 두고 있었으며 금식으로 훈련도 시키고, 자기들만이 사용하는 기도문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구체적인 생활지침들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직업이 세리인 사람들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직업이 군인인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 누가복음 3 : 10 -16>등의 구체적인 생활지침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 가운데는 그를 구세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기록한 이들이 본 관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는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마태복음 3 : 7)”라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많았다고 전합니다. 나아가 세례요한의 설교는 그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 마가복음 1 : 5”라면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부 유대 지방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누가는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누가복음 3 : 7”라고 기록하며 그들을 무리 곧 군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세례요한을 찾아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한 해석들이 왜 이렇게 다르게 기록되었을까요? 기록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적절할 것입니다.
먼저 마태의 경우를 보면, 마태복음이 기록된 때를 대략 기원후 80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 무렵은 초대교회가 막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유대의 완전한 멸망으로 인해 랍비종교인 유대교가 막 성립되어 가는 시기기도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유대교의 주류는 바로 바리새파였습니다. 기독교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하던 때에 마태복음아 기록된 것입니다. 마태가 자기 기록을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들 곧 마케팅의 대상이었던 주독자층은 바로 유대인 출신 기독교도들이 였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마태가 본 세례요한의 설교대상은 당연히 바리새인들이 되어야 했던 것 아닐까요?
두번 째 마가의 경우입니다. 마가의 주된 관심 가운데 하나는 갈릴리였습니다. 마가가 전하고자 했던 예수는 철저히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났었고, 예루살렘 세력에 의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가 향한 곳도 갈릴리라고 전한 사람이 마가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마가가 본 세례요한의 설교대상은 당연히 예루살렘 중심의 남부 유대인들이어야 했던 것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누가입니다. 누가가 원했던 주 독자층은 온 누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온 로마로 예수를 전하려고 그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쁜 소식” 으로 예수의 복음을 요약합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나오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출생 이야기는 모두 “기쁨”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이제 나중에 더 깊이 이야기되겠지만 예수의 삶 자체가 “기쁨”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누가는 전합니다. 결정적으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고 마지막 떠나시는 모습을 기록한 누가의 마지막 기록 역시 “기쁨”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누가복음 24 : 50 – 53”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누가가 본 세례요한의 설교대상은 당시 삶의 기쁨을 잃어 버리고 살던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자들, 여자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 곧 군중이어야 했던 것 아닐까요?
이런 누가가 본 무리들 곧 군중에 대해 마태도 동의하는 구절이 있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1 : 31”라고 말입니다.
세례요한을 따르거나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었던,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던, 아니면 가난하고 소외된 무리들(군중)들이었던, 세례요한 주변에 모였던 바로 그 사람들 때문에 세례요한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