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당(熱心黨) – 전야(前夜)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5 

헤롯이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하였다.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복음 2 : 19- 23, 표준 새번역에서 

헤롯 1세가 죽고 그의 세 아들이 아비가 다스리던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게 됩니다. 첫째인 아켈라오스(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에돔) 지역을, 둘째인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세째인 필립포스(빌립보)는 북요르단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헤롯 1세처럼 왕으로 불리우거나 대접 받지는 못합니다. 로마가 승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아켈라오스를 민족지도자로 나머지 안티파스와 필립보스는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인 분봉(分封)지도자로 대우했습니다. 

첫째 아들 아켈라오스는 약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방을 다스리다가 로마에 의해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심한 악정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에 삼천 명 넘는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되어 약 8천명의 사절단이 로마황제를 찾아가서 아켈라오스를 탄핵합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탄원을 받아드려 아켈라오스를 추방하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을 “유대주”로 하고 로마 총독이 직접 관할하여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내막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실력자들 곧 사회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층들이 자기 땅과 재산을 유지 증식시키려는 속셈과  직접통치로 더 많은 것을 거두어 갈 수 있는 로마의 잇속이 서로 맞아 떨어진 속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원후 6년부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및 이두메는 로마 총독 관할령이 되었고 갈릴리의 안티파스와 가이사랴 지역의 필립보스는 이 총독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에 대한 성서의 기록으로 누가복음 2장을 보기로 하지요.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동네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인구조사가 있었고, 바로 그 무렵 예수가 탄생했다는 누가의 기록입니다. 이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아주 분분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무렵 유대의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인구조사 곧 호적조사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두세(人頭稅, 주민세)와 토지세 등의 직접세와 이동세와 시장세 등의 간접세를 잘 거두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 문제는 민심을 자극하는 직접적이고도 자극적 요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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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구조사에 항거하는 민중 반란이 일어난답니다. 더더군다나 자기 나라 정부도 아닌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실시되는 호구조사에 반대하는 운동은 민족주의 열망이 더하여져서 아주 탄력을 받는답니다. 이 때 생긴 집단으로 젤롯당(the Zealous)이라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열심당(熱心黨)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들 가운데 아주 극렬한 사람들로 “단검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린 시카리파(Sicarians)도 있습니다. 

이 반란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갈릴리 지역을 다스렸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예수도 그를 “여우”로 불렀듯이 헤롯 안티파스는 아주 교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관할지 백성이 아니라 식민지 주인인 로마의 환심을 사는 것이 늘 우선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고, 예루살렘과 달리 사회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많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종교적 측면에서는 예루살렘 못지않게 유대적인 것을 고수하는 지방이었습니다. 로마의 인구조사에 반발하여 일어난 젤롯당의 반란의 진원지는 바로 갈릴리의 세포리스였습니다. 

이 반란의 결과로 세포리스시는 폐허가 되고  세포리스시 입구에는 반란 유대인들을 매달은 십자가가 2000여개가 세워졌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포리스시는 예수가 자란  나사렛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였고(약 8km 거리), 이 사건은 바로 예수 탄생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요새화합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반란을 대비한 요새화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을 갈릴리의 수도로 삼았다가 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디베리아) 시를 건설하고 그 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시절의 갈릴리, 그리고 그의 동생  필립보스가 다스리던 지역 가이샤라를 중심으로 같은 시대에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했던 이가 바로 예수입니다. 

헤롯 1세의 셋째인 필립보스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기의 영지를 다스리다가 기원 후 37년에 죽고, 그  영지를 물려받는 이가 조카인 아그리빠입니다. 이 아그리빠에 의해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는 유배를 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그리빠 대왕, 카이자르의 친구, 로마의 믿을만한 친구”로 불리우기를 즐겼던 아그리빠왕 시절에 기독교 첫 순교자 스테반이 죽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처형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그리빠는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상류층으로부터는 진실한 야훼 하나님의 신앙인이자 유대 전통의 수호자로 대접받은 인물입니다. 이는 곧, 당시 유대 상류층들이 이미 썩을대로 썩은 “부(富)”에 정신을 팔렸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탄생했던 무렵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관할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총독의 권한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경제, 사형권 들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화폐 발행권에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시대를 전후한 로마 총독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 당시 시대상을 간략히 훑어 본 후 세례요한으로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