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 들어가는 글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점검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답니다. 

‘예수’라는 말이 당신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기독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교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교회’란 어떤 곳인지요? 교회와 기독교 그리고 예수는 어떤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요? 

아니 그런 어려운 말들 다 접고요. 

당신에 있어서 예수란? 교회란? 기독교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요. 

일테면 이런 질문으로 다시 바꾸어 물어보지요. 

이즈음 한국방송에서 연예 또는 스포츠 스타들에게  상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에서 상을 받는 이들이 하는 인사말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요?   

그래요, 이게 제일 간단한 점검일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당신의 느낌 말입니다. 

그럴 때 제 느낌은 어떤 것이냐구요?  예, 저는 “쯔쯔쯔…” 혀를 찬답니다. 물론 그 말을 한 이를 경멸한다거나 우습게 본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그저 조금만 더 생각 깊게 믿으면 안될까 하는 마음으로 뱉는 탄식이랍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 졌던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번 째는 1907년 길선주 목사의 “내가 바로 아간입니다”라는 회개로 시작된 평양 대부흥사건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는 1973년 여의도광장에 백만명이 넘게 모였던 빌리그래함 집회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건과 길선주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경험했던 일이 아니므로 기록과 이야기를 통해 알고 이해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1973년 빌리그래함 여의도 집회는 제 직접 경험이었고, 그 시대를 신앙적으로 깊이 고민하며 살았던 시절이므로 제 나름으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순간 가운데 하나랍니다. 

1960대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약 6 – 7년 동안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사회는 아주 새로운 경험들을 몇 가지 겪게 된답니다. 

당시만해도 한반도 북쪽이 남쪽보다 조금 잘 살던 시절이었답니다. 

김신조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나고, 남북은 극단 대결국면으로 접어 들던 무렵 다가온 선거에서 삼선개헌을 밀어부쳤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당선이 됩니다. 그리고 10월 유신이 일어났던 해가 1972년이었습니다. 

이 무렵 기독교계에서 일어났던 세가지 운동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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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리(사영리)로 잘 알려진 김준곤목사의 CCC (한국 대학생 선교회)운동과 삼박자 축복으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조용기목사의 순복음운동과 일부 카톨릭과 민중신학을 바탕으로한 기독교 사회참여 운동이 바로 그 세가지였습니다. 

당시에 친구들이나 선후배 가운데,  만나는 이들에게 손바닥만한 작은 책자를 보여주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있었답니다. 사영리 전도 책자가 대학가의 유행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영리란 성경66권에 나타난 구원의 원리를 네가지로 축약 시켜놓은 것입니다. 첫째 원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원리는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고 영원한 형벌에 놓여 있다. 세째 원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다. 네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원리입니다. 

이 사영리가 만들어진 것은 1958년 미국 CCC  수련회에서 당시 총재였던 빌 브라이트이 만든 것이랍니다. 만든 동기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답니다. 당시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된 이는 세일즈맨으로 거부가 된 사람이었는데 세일즈맨으로써 그가 성공한 이유를 당시 이렇게 설명했답니다.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는 지름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짧고 알기쉬운 그러나 눈에 띄는  선전 문구를 사용해야 한다. 고객에게 항상 기본적으로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그것을 잘 전할수록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빌 브라이트총재가 만든 것이 바로 사영리 전도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영리전도지를 당시 젊은이들의 손에 쥐어 준 사람은 한국 CCC 총재인 김준곤목사입니다. 1960년대 말 지금의 정동 및 신문로 일대에는 판자집들이 즐비했습니다. 신문로일대는 중국인들이 촌을 이루어 살기도 했고요.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일대를 개발하기 위해 판자집 철거를 하고 철거민들을 지금의 홍은동 일대로 소개시켰답니다. 홍은동 일대에는 천막촌이 들어선 것이지요. 

당시 정동의 구 러시아 공관 일대 헐어버린 판자집 터 위에 높은 빌딩이 우뚝 세워지는데 바로 CCC회관 건물이었습니다. 

이 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긴 이는1970년대에 일본 도쿄의 외신기자 클럽에 소속한 미국 언론인 짐 스탠츨(Jim Stentzel)입니다. 다음의 그의 기록입니다. 

“서울시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서울에 있는 전 러시아대사관 부지 일부를 대학생선교회에 제공하였다.(무상 제공되었다고 전해진다). 미대사관저 근처에 자리한 이 대사관 부지는 대한민국이 소련과의 관계를 끊은 이후로 판자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1968년 경찰이 밀려들어가 수 시간에 걸친 혈투 끝에 판잣집들을 제거하였다. 그 피가 마르자마자 고층 건물이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그 건물에 오늘날 한국대학생선교회 전국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 

1년 후 박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고려하고 있을 때 김준곤은 청와대를 방문하여 삼선개헌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충고하였다. 1971년과 1972년 억압이 강화되고 기독교회의 반응이 묵종(침묵속의 복종)과 대결로 양극화되기 시작하자 박은 또 다시 김을 신임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네 가지의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1) 한국 군대를 기독교인화하기 위한 선교단체와 친정부 보수교회들의 계획을 정부가 전적으로 지원한다. 2) 닉슨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본 뜬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기 위한 일련의 계획을 강력히 지원한다. 3) 새로운 헌법이 제정된 후 조속한 시일 내에 빌리 그래함 선교단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추진한다. 4) 그래함 선교단에 뒤이어 대학생선교회 자체의 친정부적 대작품을 서울에서 선보인다. “

 1973년 여의도 빌리그래함 대전도집회는 당시 사영리를 손에 쥐고 다니던 모든 친구들의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동에 살고 있었던 얼굴이 동글던 제 친구는 홍은동 천막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난민촌이었답니다. 천막안에 땅을 파고 연탄화덕을 놓고 베니아판을 깔고 살았습니다. 그 천막촌에 뿌려졌던 전단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물질과 건강까지 얻는다.” 는  서대문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삼박자 축복 전도지였습니다. 

사영리와 삼박자축복 교리는 1973년 여의도 빌리그래함 전도 대집회와  이듬해인 1974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EXPLO’74’대회를 시발로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와 교회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신이 됩니다. 

‘EXPLO’74’란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예수혁명-성령의 제3폭발’과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를 표어로 하여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었던 행사입니다.  엿새 동안 열린 이 행사에 연인원 655만명이 참여하였고  17일 하루 동안은 약 20만명이 길거리 전도에 나서 27만 여명의 새신자를 얻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이 행사에서 눈여겨 볼 대목하나는 한국기독교에 깊게 심어진  반공주의의 한 단면입니다. 

이 행사 둘째날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행사의 기도 제목과 내용은 쾌유를 비는 통성기도로 바뀌고 , 끝내 육영수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추모기도를 바쳤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튿날 집회에는 추모와 분노가 뒤섞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당시 목사들의 기도 내용들은 “북괴의 간악한 도발에 맞서 한국을 이끌어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용기와 지혜를 불어넣어 달라”,  “공산당의 악랄한 만행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시기를”  등 이었습니다. 

천막교회에서 시작하여 서대문 성전 시대를 거쳐 여의도 순복음 성전이 삼박자 축복에 맞추어  성장해 오듯 한국 교회는 약 사십여 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물론 교회만 성장해 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회, 한국인, 한국 역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홍은동 천막집에서 국수를 끓여 나누어 먹던 그 친구 역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터입니다. 

이제 시작하려는 제가 만나고 이해한 예수 이야기는 이런 사영리와 삼박자 축복과 민중신학이라는 제 경험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제 이천년 전 갈릴리 호수가로 가보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