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8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 마가복음 1 : 4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 마태복음 4 : 17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 마가복음 1 : 15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느낌들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세례요한도 제자들을 두고 있었고, 예수도 제자들과 함께 였습니다. 서로 무리를 지어서 지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얼핏 두 무리들 간에 경쟁이 있었던 것 같은 성서의 기록들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이야기했던 주기도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런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과 4장에는 세례에 두고 두 무리들 간에 경쟁하는 듯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지방으로 가셔서 그 곳에 머무르시면서 세례를 베푸셨다. 한편 살림에서 가까운 애논이라는 곳에 물이 많아서 요한은 거기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의 일이었다. – 요한복음 3 : 22- 24”
그리고 요한은 이런 기록도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 갔다. – 요한복음 4 : 1”
동시에 서로 다른 곳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세례요한에게도 사람들이 많이 갔지만 예수에게 더 많이 몰렸다는 이 기록의 상황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경쟁 관계에 있는 집단간에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가 세례를 준 사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 세 개의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없거니와 요한복음도 4장 2절에 바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다. 요한복음 4 : 2”라고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을 통해서, 또는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수 있는 사실은 요한이 예수보다 조금 먼저였고,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얼마간 요한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 : 4” 라는 선포는 광야의 세례요한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 : 15” 는 선포는 갈릴리에서 행한 예수의 선포입니다.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이 두 메세지야말로 세례요한과 예수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선포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회개”는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마태복음 3 : 10” 운명에 처할 심판을 받게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나(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 받겠지만, 이제 오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데(마태복음 3 : 11),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쭉정이)은 “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 마태복음 3 :12”는 심판을 하실 것 이라고 경고였습니다.
세례요한의 회개는 무서운 심판이 따르는 두려움과 불안이 전제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회개”는 세례요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회개”는 심판 우선이 아니라 “기쁨”과 “구원” 이 우선하는 회개였습니다.
이 차이는 요한과 예수가 살았던 모습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1 : 18 – 19”
세례요한과 예수는 인간적으로 보자면 둘 다 똑같이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세례요한은 목이 잘리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다 빼고 죽습니다. 한 사람은 그저 사람이었지만 또 한 사람은 저나 믿는 이들에게는 신이 됩니다. 그 둘의 명확한 차이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두번 째 차이는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심판은 “오실 이”가 행하실 미래의 일이었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왔다”라는 지금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 진 일입니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은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확인해 나갈 것입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차이는 세례요한이 서 있던 삶의 자리는 “광야”였지만, 예수의 삶의 자리는 “갈릴리”였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사는 자리가 아니였습니다. 어떤 목적, 일테면 반역이든 혁명이든 같은 생각으로 뭉치기 위한 곳이었기도 하고, 일상을 떠나 기도로 신을 만나기 위한 장소였기도 합니다. 아니면 도피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만나러 가려면 목적을 가지고 찾아 가야만 하는 곳에 요한은 서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갈릴리로 갔습니다. 갈릴리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는 먼저 사람들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곳으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먼저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가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가롯유다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 합니다.)
이제 갈릴리 예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