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1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1 : 15 – 16, 개역개정에서
그러므로 로마에 계신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 로마서 1 : 15 – 16, 공동번역에서
신약성서는 그에게서 옛 세계를 마감하는 종말론적 사건 곧 하나님이 하신 행동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이 메세지에서 종말론적 사건은 항상 현재가 되는 것이며, 믿음에서 그것은 항상 사건으로 되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서 옛 세계는 끝났다. –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쓴 “역사와 종말론(History and Eschatology)”에서
지난 주일에 모처럼 뉴욕 맨하턴에서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답니다. 제 일정 가운데 하나였던 한인거리에 있는 책방 방문도 딸아이와 함께 였답니다. 이즈음 책을 사는 일은 인터넷 서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책방 나들이가 주는 감흥에는 또 다른 맛이 있는 것이기에 간만에 있는 도시 구경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었답니다.
서대에 꽂힌 책들을 훑다가 눈에 들어 온 책이 “사진으로 본 1954년 한국”(제가 이 책은 사오지 않아서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도 있답니다.)인가하는 사진첩이었습니다. 딱 60년 전 한국의 모습들을 담은 사진첩이었습니다.
그 사진첩의 책장들을 넘기다가 아내와 딸아이를 불렀답니다. 그리곤 우리 세 식구는 제가 태어났던 해, 한국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옛날 우리시대와 아버지 시대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딸아이는 연신 고개를 잘레잘레 흔들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고, 아내는 “맞아, 맞아”하거나 “정말 이랬나?”하며 그로부터 십수년 뒤였을 자신의 기억과 짝을 맞추던 것이었습니다.
지난간 육십 년의 경험들은 비단 저에게만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함께한 우리 아버지의 경험과 할아버지의 경험 나아가 증조 할아버지의 경험과 아들과 손주와 증손주들이 함께 이어져 경험한 세월입니다.
무릇 모든 기록이란 그렇게 세월의 경험들을 담는 것입니다. 그 기록에 자신이나 공동체의 믿음을 담아내는 일이 신앙고백서이고, 그 고백들을 모아 경전화한 것이 바로 성서라는 게 제가 이해하는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성서입니다.
“성서형성사”를 담아 낸 책들만해도 수도 없거니와, 제가 새롭게 쓴다하여도 제법 길게 쓸 수 있을만큼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성서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아니면 나중에 교회사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성서형성사에 대한 것들은 보충하기로 하고요, 오늘은 아주 간략하게 광야의 세례요한을 만나러 가기 위해 놓여진 이야기만 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성서의 사도행전말고 도마행전, 안드레행전, 빌립행전, 베드로행전, 요한행전, 바울행전, 데 클라 행전이라는 책들이 있다는 말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애굽인의 복음, 도마 복음, 마띠아 복음, 바돌로메 복음, 12사도의 복음, 바실리데스 복음, 아벨레스 복음 이라는 이름들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계시록이 요한계시록 뿐만 아니라 베드로계시록, 바울계시록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 있었다고 전해지거나 실제 오늘날 발견되어진 책들도 많고요, 도마복음서 등은 한국어 번역으로도 이미 많이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랍니다.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 약 20-30년 후에 쓰여진 바울서신들을 비롯하여 마태,마가,누가,요한을 비롯한 복음서들 말고도 이렇게 이름만으로도 많은 기록들이 쓰여진 것은 기원 후 50년에서 150년 사이의 일입니다.
예수이후 처음 기록들이 생기기까지는 구약성서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성서였고, 바울서신들이 쓰여지고, 예수와 함께 했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이 마구 문서화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무렵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답니다. 유대라는 나라는 멸망을 했고, 유대의 종교적 경험을 일부 이어받은 신흥종교인 기독교는 로마가 닦아 놓은 길을 타고 헬라(그리스)정신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무렵 쏟아져 나온 많은 책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오늘날 우리들이보는 신약성서 27권 안에 들어갔고 어떤 것들은 잊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서신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바울서신들을 이야기할 때 드리기로 하고요, 우선 4복음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백년전인 17세기까지 사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순으로 쓰여졌다고 믿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성서는 하나님이 주신 영감에 따라 기록된 것이라고들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역사비판이라는 새로운 연구 잣대를 들이대고 성서를 연구하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복음서가 오늘날처럼 만들어진 이유들을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답니다.
처음 나온 이론은 원복음가설(1794년 아이히홀른의 주장)로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복음서의 원 자료가 되는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는 주장이었는데 이건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이론이고요.
그 후에 구전설, 단편설, 마가복음 원전설, 두 자료설(마가복음과 Q자료), 네 자료설(마가복음과 Q자료, M자료, L자료) 등의 이론들이 있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복음서에 대한 학문적인 결과들이므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면 또 새로운 학설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지요.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지금 우리들이 읽고 보고 있는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는 역사물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 하는 신앙고백서라는 점입니다. 이게 바로 진실인 것이지요.
그리고 누가 어떤 환경에서 이런 믿음의 고백서들을 만들어 놓았느냐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는 바른 판단의 근거를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이쯤 변죽 울리는 일을 마치고 이천년 전 세례요한이 서 있었던 광야로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