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크기 –광야 2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0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또는 교묘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베드로후서 3 : 15 – 16, 개역개정판에서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로가 하느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아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바울로는 어느 편지에서나 이런 말을 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불러 들이고 있읍니다.  – 베드로후서 3 : 15 – 16,공동번역에서 

Don’t forget that the Lord is patient because he wants people to be saved. This is also what our dear friend Paul said when he wrote you with the wisdom that God had given him.  Paul talks about these same things in all his letters, but part of what he says is hard to understand. Some ignorant and unsteady people even destroy themselves by twisting what he said. They do the same thing with other Scriptures too. – 2 Peter  3 : 15 – 16,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공통화제(話題)가 있게 마련입니다.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부터, 공통 관심사나 공통의 경험들,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각자의 의견들까지 이야기거리들이 있는 것이지요. 

모인 이들의 연령, 성별, 취미, 교육, 직업, 경제, 정치, 종교적인 입장에 따라 그 공통화제들은 더욱 다양해 질 수도 있거니와, 구성원들의 수준에 따라 그 화제의 격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이런 저런 모임에 나가는 일들이 줄어드는 까닭은 여러가지들이 있겠지만 제 경우엔 이런 공통화제 속에 쉽게 제가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선이랍니다. 일테면 우선 제가 골프를 치지 않는다거나 아직 손주를 보지 못했다거나하는 이유로 제 또래들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주화제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은 참을만한 것이랍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 이야기, 종교 이야기,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지면 거의 제가 외톨이가 된답니다. 

이제 제 의견을 내세워 논쟁을 주도할 나이도 아니거니와 서로가 다 머리가 굳을대로 굳은 사람들 끼리 모여 자기 먹고 사는 일과 부대끼는 일도 아닌 화제에 시간과 열정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우선하게 되면서 애초 그런 모임에 나가는 일을 줄여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십수년 전에 제가 동네 일을 한답시고 초랑이 방정을 떨며 동네를 휘젖고 다니던 때가 있었답니다. 그 무렵 워낙 입성에 관심없는 제가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개량한복을 좀 입고 다녔답니다. 그 무렵 동네 양반 한 분이 조심스럽게 제게 건넨 말이랍니다. “누가 그러는데… 당신 고향이 전라도고, 약간 빨갱이랍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낌은 그저 황당함이었습니다. 그래 제가 물었답니다. “왜요?” 라는 제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서는 정말 쓴 맛으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서울 신촌내기인 저를 전라도로 바꾸어 놓고  민주주의 신봉자이자 예수쟁이이 저를 두고 ‘약간 빨갱이’로 생각한 사람의 수준과 발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든 다른 생각이었지요. 도대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전라도는 어떤 곳이고, ‘약간 빨갱이’란 어떤 사람일까? 

아무튼 그 까닭이란 첫째 제가 개량한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과 둘째 당시 제가 한인신문에 컬럼을 쓰면서 교회를 비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답니다. 

1-14

그리고 오늘, 뉴욕 타임즈가 ”Politicians and Textbooks(정치가들과 교과서들)”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고  이 사설에 있는 한 문장인 “박씨의 아버지인 박정희는 일제시대시대 때 일본 제국 군대의 장교였고,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남한의 독재였다. Ms. Park’s father, Park Chung-hee, was an Imperial Japanese Army officer during the colonial era and South Korea’s military dictator from 1962 to 1979.”라는 문구에 대한 이런 저런 뉴스들과 그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랍니다. 

역사 이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믿고  사느냐”가 바로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뉴욕 타임즈 사설을 보는 관점들은 저마다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때문에 그 신문이 하필 이 싯점에서 그런 글을 실었느냐는 원인 분석에서부터, 단순한 찬반 양론까지 그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여러 생각과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외교부가 직접 유감을 표현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든 제 첫번 째 느낌은 “아! 이 어쩔 수 없는 국내용이라니”라는 것이었답니다. 

NY Times 사설이 황당함으로 다가온 축들은 아마 친미(親美) 일변도의 생각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진실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생각의 크기에 달린 것일겝니다. 

이쯤 제 이야기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나 읽고 계시는 당신이나, 이천 년전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이 이름도 순전히 한국 이름이지만)라고 이름부르는 한 사내가 살다 간 것은 일단 믿고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가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과거 언제냐고요?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천년전인 기원 후 100년에서 150년 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느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답니다. 

이른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자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구원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종교적 발상이 전제 되는 것인데(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모든 이야기의 바탕은 바로 믿음이랍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구원이란 어떤 “비밀스러운 앎 곧 영지(靈知gnosis)”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었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첫번 째 이단으로 알려진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이고, 그들이 역사 속에서 패배한 것은 예수가 사람이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기록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답니다. 

바울이 남긴 편지를 놓고 내 생각이 옳다, 아니 그르다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아직 성경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수백년 전인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고작 몇 십년이 지난 무렵이었습니다. 

예수의 사역 이전에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요한의 참 모습을 찾는 길은 바로 이런 “기록”이 이루어진 일들을 짚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