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 – 광야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9 

주변은 고요하다. 세례자가 나타나 외친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잠시 후 예수가 와서, 자신이 오실 ‘사람의 아들’임을 알고, 이 세상의 수레바퀴를 돌려, 정상적인 모든 역사를 끝장낼 마지막 혁명으로 굴러가도록 만든다, 그 수레바퀴가 굴러가기를 거부하자, 그 분은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러자 그것이 굴러가 그 분을 깔아 뭉갠다. 그 분은 종말론적 조건들을 초래하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시켰다.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 자신을 인류의 영적 지배자라고 생각하고 역사를 자신의 목적대로 바꾸려 했을 만큼 충분히 강했던,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인간의 깔아 뭉개진 몸은 그 바퀴 위에 매달려 있다. 이것이 그 분의 승리이며 그 분의 통치이다. –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쓴 책 “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에서 

이즈음 한국 뉴스들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로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과 이해는  “지난 일을 제대로 정리해 본 경험이 없는 공동체가 겪는 아픔의 하나로써 정리되어야 마땅한 세력들의 마지막 총공세”라는 것인데, 제 바램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후세들에게 가르칠 것이냐하는 문제에 있어 자기 이익을 결부시키는 세력들이야 제 배 부르자는 도둑 심보로 그리한다고 하여도, 이도 저도 아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어떤 매체를 통해 그 뉴스를 접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고 있는 사실일지라도 어떤 매체가 어떤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전하고 듣느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과서문제만 보더라도 수천년 전의 이야기나 수백 년 전의 이야기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길어야 고작 백년에서 바로 지난 해에 이르는 기간 중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진실 여부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사진, 동영상들을 비롯한 숱한 기록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두 눈 뜨고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실임에도 전혀 상반된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국가나 공동체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개인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겪은 일이라도 시간이 흐른 뒤 지난 사실을 전혀 다른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일들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개인사던 적고 큰 공동체나 국가의 역사던 어떤 역사적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지금 내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진실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는 진실의 결과가 미래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_땅에_쓰신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는 스스로 글 한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글에 대한 기록으로 유일한 것은 간음한 여인을 두고 군중들에게 한 말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를 말을 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썻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릅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졌다고 알려져 있는 데살로니가서 부터 일련의 바울서신들은 바울이 남긴 것임으로 그의 생각과 사상, 신앙, 의도 등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기록들과 행위들은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문자화된 기록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수많은 불경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석가모니가 기록한 것들은 없습니다. 심지어 공자의 경우도 논어를 비롯한 어떤 경전도 공자 스스로 써서 남긴 기록은 없습니다. 무하마드 역시 그가 코란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변명’도 그가 스스로 썻다고 하지 않는답니다. 

모두 후대의 제자들이나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불경이나 유교 경전등에 비해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구전(이야기 전승)을 기록화하는 기간이 짧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주고 부활한 후 승천했다고 생각되는 시기는 대략 기원 후 30년경 전후입니다. 그리고 바울서신등이 기록되어진 것이 기원후 50년경 부터이고, 이른바 공관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들이 기원후 70년에서 100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고 제일 늦은 연대라고 해도 기원 후 150년을 넘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제일 빠르게 기록화된 바울서신들이 예수가 떠난 뒤거의 한세대 뒤에야 이루어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크게 두가지 이유들을 들고 있답니다. 첫째는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예수가 행한 행위들과 말씀들이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둘째 직접적인 원인인데 당시 예수 이야기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초대교회 사람들은 세상 끝날이 곧 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종말이 눈 앞에 이르렀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바울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유대의 종말은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로마에 의해 파괴되고, 73년에 마사다요새에서 항거하던 유대인들이 모든 자결함으로 현실화되었지만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소위유대독립전쟁 또는 제1차 유대 로마 독립전쟁에는 열심당파들은 물론이요,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파벌에  상관없이 전 유대인들이 나섰고,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방전에서만 죽은 유대인들이 110만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유대인들은 로마의 노예가 되거나 디아스포라가 된 것이고요. 다만 이 전쟁에 기독교 초대 교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답니다. 

종말은 오지 않았으나 삶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문서화되고 기록되는 일들이 봇물 터지듯 일어납니다. 

이 때의 일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에 남깁니다. 

“존경하는 데오필로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그 일들을 글로 엮는 데 손을 댄 사람들이 여럿 있었읍니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각하께 써 보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러하오니 이 글을 보시고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 누가복음 1 : 1- 4, 공동번역에서 

이제 우리들이 이야기할 세례요한과 예수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기록된 사복음서와  기원후 9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는 요세푸스의 역사서 ‘유대고대사’를 바탕으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