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언 – 하나님 나라 1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5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 마가복음 1 : 14 – 15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마태복음 12 : 28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 마태복음 11 : 2 – 6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 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누가복음 10 : 23 – 24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 누가복음 11 : 31 – 32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이 선언은 필연적으로 오랜 미래의 예상(전망)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으로 기대했던 총체적인 종말론적 구도를 뒤집는다. 종말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기대의 영역으로부터 실현된 체험 속으로 움직였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사상의 내용을, 마치 예수가 그것을 의미했다는 식으로, 묵시문학 저자들의 상상으로부터 채워질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묵시문학 저자들은 미래의 어떤 것을 가르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환상과 관련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예수는, 적어도 한가지 측면에서, 체험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다드(C. H. Dodd)의 “하나님나라의 비유들(Parables of the Kingdom)”에서 

갈릴리 해변 마을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설교를 선포하기 시작한 예수의 첫 선언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라는 이 예수의 첫 선포는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통해 했던 모든 말씀들 곧 설교의 요약이라고 보고 아주 중요한 메세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찼다.’라는 말과 ‘가까왔다’라는 말이 ‘이미 온 것이냐’, ‘앞으로 올 것이냐’라는 시점에 대한 수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어라.’했는데 여기서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복음’이란 곧 예수인데 예수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일 아니냐? 그러니 이건 예수의 말이 아닐 것이다. 등등 수많은 연구들과 논쟁들이 넘쳐난답니다. 아마 이런 연구서들만 다 읽고자 하여도 죽을 때까지 읽어도 결코 다 섭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The Sermon on the Mount

비단 학문적 연구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머리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들과 자신들만의 믿음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제 자신 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정말 중요한 촛점은 “한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교회 뿐만 아니라 나나 당신이 속해 있는 아주 작은 단체 또는 동네에서부터 국가 나아가 인류공동체에 이르기까지)”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바른 이해이고, 실제 그 나라를 누리는 일, 그 나라를 누리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 속에서 사는 일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어 그 나라에서 살며 부활을 맛보는 일 말입니다. 

자! 이제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예수입니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첫 선포를 다시 읽어 보기로 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서 ‘찼다’, ‘왔다’라는 시제 곧 이게 현재형, 현재완료형, 미래형이냐하는 것 말고는 뜻을 모르는 말을 꼽으라면 두 개입니다. 때, 차다, 가깝다, 왔다, 회개, 믿으라는 말들은 누구라도 그냥 다 알 수 있는 말이거니와 크게 의견이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어떤 것이냐하는 것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는 말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는 아무 설명도 없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장황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지요. 혹시 한국에서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듣게 된 ‘창조경제’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지요? 만일 알고 계신다면 그 말을 누군가에게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요? 제가 잘 모르기에 드리는 말씀이랍니다. 

박근혜정부의 주요 부서가 된 미래부의 설명에  따르면 창조경제란 “국민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과학기술과  ICT에 접목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고, 기존산업을 강화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새로운 경제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실 수 있으신지요? 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말일까요? 당신이 먹고 사는 일에 어떤 영향이 있을 것인가 하는 제 물음입니다. 

창조경제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도 많고 그에 대한 설명도 많지만 실체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모호한 개념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 곧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면 공통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세상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일테면 이즈음에는 민족 공동체적인 생각이 덜하기는 하지만 “통일”이라는 말을 들을 때 한민족만이 느끼는 어떤 감정이 있듯이 말입니다.(사실 이런 감정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것이었답니다.) 

예수의 죽음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생각들과 예수의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는데, 예수는 이미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그 생각의 다름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란 어찌보면 그 생각의 다름을 좁히려는 과정일 수도 있답니다. 

이제 우리들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임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 일 것 같습니다.

미스터 허그

그의 풀 네임은”Vance A. Funk, III “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Mayor Funk”라고 불리운답니다. 누구냐고요? 제 가게 단골 손님이랍니다. 

본래 직업은 변호사인데 제 가게가 위치한 Newark시의 시장으로 2004년부터 지난 해 10월까지 일했던 양반이랍니다. 

올해 만 일흔 넷인 펑크씨는 몇 해 전 스트록이 와서 입이 돌아가고 반신을 제대로 못쓰는 병마 속에서도 끈질기게 투병하며 시정을 이끌어 온 의지의 미국인이랍니다. 

이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지난 해 시정살림을 꾸려 가기가 너무 벅찬 나머지  시장직을 스스로 내 놓았답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Mr. Hug랍니다. 만나는 이들마다 꼭 껴안아 주는 그의 모습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제 가게에 오면 저와 제 아내를 품어주는 일이 우선입니다. 다른 손님들이 아는 눈길만 보내도 먼저 안아주는 일부터 한답니다. 

그런 Funk씨가 오늘 제 가게에 들어 오셔서 푸른색 주단 상자를 내미셨답니다. “시장 일을 그만 둔 이후 이런 저런 짐들을 정리하다가 이걸 보면서 너희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들고 왔다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면서 잇는 말이 “너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설명해 주렴”하는 것이었습니다. 

푸른색 주단상자를 여니 상패처럼 만든 패였는데,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에서 만든 국보 제285호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본떠 만든 패였습니다. 

그 패를 Funk씨에게 보낸 당시 울산시장의 편지도 상자 안에 있었답니다. 

상자 안에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설명서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거기 붙은 제목이 “한민족 대표 유산”이라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오늘 처음 들어 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였답니다. 

부끄러움과 함께 한국 전통과 역사가 담긴 물건을 보며 제 가게를 생각해 주신 Mr. Hug, 언제나 제게 시장인 Funk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도 오늘 찾아 읽어 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기사 하나 소개 드립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99859.html

완장 – 갈릴리 8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4 

야훼를 너의 피난처라 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요새로 삼았으니,  어떤 불행도 너를 덮치지 못하리라. 어떤 재앙도 네 집을 가까이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여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뿌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고 가리라. – 시편 91 : 9 – 12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장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8 : 44 

마귀의 두번 째 시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입니다. 마귀가 인용한 성서는 시편 91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91편을 읽고 음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야훼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늘 함께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말짱하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으로 읽히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제 오늘날 교회들과 믿는 이들이 이렇게 주장하며 ‘아멘’ 소리를 드높히는 덕에 ‘개독교’소리를 듣기도 하거니와, 참 예수쟁이들을 확장시키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91편만 딱 떼어놓고 한번 생각해 본다면, 세상 그 어떤 종교들과 견주어 그 어떤 차이도 없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이 새벽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신앙 역시 시편 91편과 똑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특히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 앞뒤 가리지 않고 이런 시편 91편을 내세우는 신앙적 태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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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단을 대웅전 뒤에 마련해 놓고 사람들의 신앙적 한계를 적절히 포교의 수단으로 삼은 한국불교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털끝만큼의  재앙이나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선포들과 믿음이 설교 강단을 차지한 모습은 칠성단이 대웅전 뒤가 아니라 설교 강단에 차려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를 향한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전제는 바로 신앙의 전제입니다. 찬찬히 돌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일들(역사)과 오늘 날의 일들(현재)를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라는 모습들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답니다. 근세 이전 모든 권력들의 모습이거니와 오늘날에도 지역과 상황에 따라 널려 있는 모습이랍니다. 크게는 민족과 국가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요, 작게는 지역사회,  작은 집단을 비롯하여 한 개인의 영혼과 생각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차고 넘치는 일이고요. 

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인용한 성서는“마싸아에서처럼 너희 하느님 야훼를 시험하지 못한다.”라는 신명기 6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므리바의 샘물’입니다. 

하나님(신)이 부여한 권력이나 능력을 기적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나 그것을 요구하는 일은 신(하나님)을 떠보는 일이라는 선언입니다. 신의 일은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을 인간들을 설득하기 위한,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시험문제는 예수가 죽기 직전에 받았던 시험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에 사람들이 예수에게 낸 시험문제였습니다. “네가 신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당연히 네 아버지인 신이 도와 주지 않겠느냐?”는 시험 말입니다. 

예수는 처음 광야에서 그랬듯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적이나 표적의 징표가 신의 아들을 입증하는 일도 아니거니와 하나님 나라를 믿는 신앙의 전제가 아니라는 예수의 선포요, 시편 91편에 나오는 신앙은 인간의응답일 뿐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물론 그 응답은 신이 요구하는 것이지만 결코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놓인 마귀의 시험은 “내게 무릎을 꿇으면,  세상을  다 너에게 주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정말 차고 넘치게 보는 일들이지요. 왈 ‘완장’이라고 하지요. 크고 작은 권력 앞에서 ‘완장’차고 제 배불리며 부끄럼 모르는 이들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어느 시대건 넘쳐나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였는데 이는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리 되더라도 너희는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 가면 안 된다.- 신명기 6 : 12 – 14”는 말씀에 근거를 둔 선언인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 이외에는 무릎 꿇을 수 없다는 선언이며, 역사 이래 오늘날 까지 야훼 하나님 자리응 제것으로 착각하고 사람들을 무릎 꿇리게 하는 모든 신(권력)들은 “아니”라고 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마친 예수는 이제 갈릴리로 나갑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나머지 삶과 말씀과 행위들은 바로 이 광야에서의 선언들을 사람들의 말로 쉽게 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복권– 갈릴리 7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3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 신명기 8 : 2 – 3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 오너라. 나일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들었다고 해서 이 고장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하며 야훼를 시험했다고 해서 마싸아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 출애굽기 17 : 4 – 7 

그리 되더라도 너희는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 가면 안 된다. – 신명기 6 : 12 – 14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 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온다. 또한 에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어라.” – 출애굽기 3 : 7 – 10 

예수의 종교적 핵심은 토라가 전혀 배제된 것도 아니고 내적 영성을 촉진시킬 수 있음에도 토라 자체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에식상의 그리고 도덕적인 순결을 추구함도 아니다.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와 기도생활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자기 성화도 아니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축구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의 형제들을 향한 헌신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늘의 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이다. – 게자 버미스(Geza Vermes)의 유대인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 the Jew)에서 

이제 광야에서 있었던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응답과 뜻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위에서 인용한 성서(구약) 구절들과 게자 버미스가 한 말들을 찬찬히 음미하며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인용된 성서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합니다. 혹시 복권을 사보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복권 한번 사봐야지 하는 생각을 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미국에서 팔리는 Powerball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파워볼에 당첨될 확율이란 벼락맞아 죽을 확율보다 낮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벼락맞아 죽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듯이 거액의 복권 당첨자에 대한 뉴스를 종종 볼 수 있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거나 사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실제 그 누군가는 당첨이 되곤 한다는 것이지요. 

powerball billboard

파워볼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주 작은 돈을 투자해서 한순간에 수 억, 수십 억배를 얻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지요. 이런 마음을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는 요행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 글에서 마귀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들에 대해 “그래 내가 하지”라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건 넘쳐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그렇게 마귀에게 응답하는 이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꾀는 경우도 숱하게 많은 법입니다. 때론 복권이 당첨되듯 실제 돌을 떡으로 만들거나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리거나, 온 세상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요행수가 맞아 복권이 당첨된 사람들의 끝이 좋지 않을 확율이 높듯이 어쩌다 수많은 가짜들 중에 진짜인듯한 ‘능력자들’ 역시 역사적 경험으로 본다면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이제 예수의 응답을 보도록 하지요. 예수의 응답을 요약하자면 첫째 시대를 넘나들어도 언제나 동일한 사람들의 요구와 한계에 대한 응답이요, 둘째 신 곧 하나님과 사람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짓는 응답이요, 마지막으로 철저히 성서적(구약, 유대전통적)인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응답은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응답은 신명기 8장에 나와있는 성서 구절을 인용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내용을 잘 보시면 이미 야훼 하나님은 먼저 돌로 떡을 만드신 기적을 보이신 후에 그 기적을 보여주신 뜻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배고픔에 굶주려 아우성치던 히브리 백성들에게 광야 들판을 만나로 뒤덮히게 하셨던 기적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쳐준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와 맥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바로 “빵으로만…”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는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써 생존해야하는 기본 양식은 준비되어 있는 세상이 예수가 생각한 야훼 하나님 세상이었습니다. 그 기본에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꿈꾸고 이루고자 하는 세상보다 먼저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예수가 내린 첫번 째 응답의 핵심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히브리족의 먹을거리였던 만나의 의미는 “누구나 동등하게 똑같이 하루의 양식을 나누어 먹는 사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준 기적이요, 인간들이 어느 사회이건 준수해야 마땅한 신명기 정신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에게 있어 마귀의 시험은 이 기본을 넘어서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이루어 보라는 요구였던 것이고, 예수의 응답은 “기본에 대한 해결이 먼저이고 그것이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이 공용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복권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누구나가 하루 일용할 양식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세상이 먼저인데, 여기까지는 신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의 응답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선택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을 위해 마땅히 우선하는 신의 영역을 먼저 정의하는 예수를 제가 구세주로 믿는 까닭입니다. 

두번째 질문과 응답으로 넘어갑니다. 

시험문제 – 갈릴리 6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2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 마태복음 4장 5 – 6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라지.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다.” – 마태복음 27 : 42 

이민생활이 오래되면서 점점 잊혀지고 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이 되어가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한국 전통명절입니다. 설날이나 한가위같은 명절들 말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한인들끼리 마주치는 경우조차 흔치않은 시골에서 사는 저같은 경우에는 한국 명절은 그저 평범한 하루가 되기 십상이랍니다. 

그렇게 2014년 설날이 다가온답니다. 갑오년(甲午年)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쯤 아주 엉뚱한 상상을 하나 해보기로 하지요. 120년 전에 전라도 고부나 충청도 보은에 살앗던 사람들이, 아니 그 당시 한반도 어디서 살았건 그 때 살았던 사람들이 2014년 오늘의 세상을 다시 살아서 본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좀 더 올라가 보기로 할까요. 이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서 오늘날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온통 기적과 이적들이 넘쳐나는 세상으로 보지 않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기절해 다시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 살던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람이긴 다 마찬가지이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즈음 풍습에 맞추어 살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살다가 이번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에 또 다시 놀라 자빠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본답니다. 

그날 그날 먹고사는 걱정에서부터, 더 좋은 것 더 많이 먹으려는 욕심, 크기와 상관없이 권력을 갖기 위해 안달들을 하며 사는 모습들, 그런 욕심과 욕망을 채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안변했을까?”하고 놀라 자빠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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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은 시험 세가지는 바로 천지창조 이래 사람사는 모습들이 엄청나게 바뀌어 왔지만 결코 변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마.귀의 이 세가지 시험이야말로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응답하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또한 창조 이래, 또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생긴 이래 이런 물음과 시험에 대해 “내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거나 “바로 내가 그 모든 시험을 잘 풀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차고 넘쳤거니와 오늘날도 도처에 널려 있답니다. 

첫번 째 시험인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은 배고픔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더 많이 더 잘 먹고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두번 째 시험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라는 것은 절대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권력을 부여 받았느냐는 질문으로 권력에 대한 욕구와 두려움 앞에 선 사람들의 모습을 향한 물음이었습니다. 세번 째 시험인 ‘내게 절하면 내가 너에게 주겠다’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일과 나아가 자기가 속한 작은 집단에서부터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권력을 쥐는 주체가 되기위한 방법을 알려줄테니 나를 따르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예수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오늘날까지 예수가 받았던 이 세가지 시험문제에 “예! 내가 합니다.”라고 선언하고 사람들 앞에 선 이른바 영웅호걸, 황제, 대왕, 왕, 메시야에서부터 오늘날 숱한 정치가들, 종교인들, 경제인들 차고 넘쳐난다는 이야기랍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인용했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숱한 가짜 예언자들, 거짓 메시야들이 예수시대에 넘쳐 났지만 결국 그들을 쫓던 사람들(백성, 민중, 무리) 모두를 죽음의 길로 인도했을 뿐이었지요. 

그 숱한 가짜들의 공통점들은 “내가 (신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고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선전을 한다는 것이고 그 가짜들에게 언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의 속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 두가지는 세상 끝나는 날까지 결단코 변하지 않을 사람사는 세상 모습이라는 믿음이 바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첫걸음입니다.(이것은 델라웨어 촌구석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소리이므로 믿거나 말거나, 뜻을 같이 하거나 말거나…그저 제 주장이랍니다.)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지요.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물음은 두가지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실제 당시 그 시점에서 배가 고팟을(금식중이었으므로) 예수 자신을 향한 것, 두번 째는 당시 사람들의 정말 절실한 배고픔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했다는 사실은 믿음의 영역을 넘어서라도 실제적인 배고픔의 고통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정말 평범하게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성서의 첫 자료들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상황을 누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사도행전 11 : 27 – 30” 

이런 흉년으로 인한 배고픔 뿐만 아니라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일상적인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는 것은 나중에 우리들이 이야기할 주기도문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백성, 군중, 무리, 민중들을 규합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기적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당시 숱한 가짜들이 내건 기적 행위들이었고, 오늘날에도 이런 기적들을 이야기합니다. 

두번 째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보아라라는 시험문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을 때 거의 똑같이 받았던 시험문제이었습니다. 한계가 있는 사람에게 모든 족쇄를 채워 놓고 결과가 빤한 일에 도전해 볼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전이 성공하면 신이 존재를 믿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역시 두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권력은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만능 요술주머니라는 생각입니다. 역사이래 권력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백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교훈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놈들아! 나는 진시황이다.”라는 이들이 넘쳐나는 현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두번 째는 만일 그 권력을 신이 주신 것이라면 권력으로 뭔 짓을 하던 신이 알아서 돌보아 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역사 이래 이렇게 착각하다가 목이 잘려 나간 권력자들의 이름들을 대자면 한이 없답니다. 

마지막 세번 째 시험문제는 정말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물음입니다. 배고픔에 대한 해결,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는 마귀의 선언이고 그 선언을 쫓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랍니다. 힘있는 자에게 고게 숙이고 언제나 자기 생각없이 딸랑 딸란 쫓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역사이래 차고 넘쳐나는 예들이 있는 사람살이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게 “아니오!”라고 선언한 것이 바로 예수의 응답입니다. 

이제 그의 응답의 뜻을 알아보려 합니다. 그를 구세주로 믿는 다음 단계의 고백입니다.

그림 하나

어제 오늘 블로그를 새로 꾸민다고 시간을 좀 썻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 온 그림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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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1951, 109.5 x 209.5 cm)이라는 그림입니다.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을 그린  게르니카(Gernica, 1937, 349 cm × 776 cm)외 함께 전쟁의 아픔과 참혹함을 그린 유명한 작품입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1950년 10월17일부터 12월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신천대학살’ 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피카소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쪽 아시아의 끝에서 전해진 참상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려낸 것이지요. 

신천대학살이란 당시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1인 3만5383명이 희생된 끔찍한 사건으로, 미군의 소행으로 알려져 전세계 좌익이나 진보 운동 진영의 공분을 샀던 사건이랍니다. 

피카소는 1944년부터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공산당의 평화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으로 1950년엔 스탈린 평화훈장까지 받은 사람이고 보면 이즈음 한국적 분위기로 보아서는 종북정도가 아니라 빨개도 아주 새빨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 또한 한반도에서의 학살에 미군이 개입되어있다고 믿고 있던 프랑스 공산당이 제안한 것이었으니 이 그림에서 총칼을 겨누는 군인은 당연히 미군을 암시하는 것이었을 겝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탱크로 밀고 들어왔을 때,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거리에 이 그림을 들고 나가 소련제 탱크에 숨진 동료 시민들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는 것이지요. 

전쟁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라는 피카소의 생각이 담긴 그림이라고 합니다. 실제 그림을 보면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갈리는 것입니다. 

무릇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없는 세상이겠지요. 

1951년부터 따져도 지금 몇 년째 인가요? 

지난 일을 잊지않되 어떻게 간직하느냐가 내일을 설정해 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증오의 편가름을 이어가는 일들은 지난 전쟁보다 더욱 나쁘다는 생각입니다.

준비 – 갈릴리 5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1 

비록 기독교의 기원이 갈릴리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운동의 중심은 곧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보다 후대에 속한 신약 성서 책들은 실제적으로 갈릴리에서의 기독교의 존재와 그 운명을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무시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실로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 엘리옷 빈즈(Elliott- Binns)의 갈릴리 기독교(Galilean Christianity)에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후(세례요한과 결별한 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나가시기 전에 예수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행보를 마태, 마가, 누가는 한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비교적 짧게 이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그 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가복음 1 : 12 – 13 

반면 마태와 누가는 광야에서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마귀의 세가지 유혹 곧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의 예수

세 복음서가 똑같이 전하는 사실은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40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군데 등장합니다. 인생을 40년 단위로 살았던(왕자 40년, 유목생활 40년, 히브리 지도자 40년) 모세가 히브리백성들과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에서 지낸 세월이 40년입니다. 또한 모세는 40일 동안 금식으로 지내기도 하였습니다.(출애굽기 34 : 28) 

엘리야 역시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열왕기상 19 : 1 – 8) 그리고 교회사시대에 이르러 지키게 되는 사순절기의 40일이 있고,  오늘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광야 생활 40일이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40일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전(前)과 후(後)의 상황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40년 단위 인생은 그 때마다 매번 그의 삶의 방향과 목적, 의미 등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었습니다. 특히 모세의 40일 금식 사건의 전과 후 사이에는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백성 간에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십계명을 부여받는 시기였습니다. 히브리백성의 40년 전후 상황은 노예상태로 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상태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엘리야의 40일은 도망자 신세에서 야훼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전진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고난과 수난, 처절한 패배인 듯한 상황에서 부활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예수의 광야 40일 준비기간은 옛 세상이 새 세상으로 바뀌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40이라는 상징적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과 후가 완전히 뒤바뀌는, 노예에서 누구나 신 앞에서 홀로 서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독립된 인격으로, 절망적인 도망자 신세에서 삶의 충만한 의미와 의욕으로 넘쳐나는 활기찬 삶으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아픔과 한계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는 삶에서 죽음까지도 이기고 부활하는 기적을 맛보는 그 뒤바뀜 현장의 의미를 되새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굶주린 가운데 마귀에게 받은 세가지 시험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 요세푸스가 전하는 1세기 곧 예수 전후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사건들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파두스(Fadus)가 유대총독으로 있을 때(기원 후 45-46년 경) 튜다스(Theudas)라는 한 마법사가 수많은 군중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튜타스는 자신이 선지자라고 무리들을 속이면서 명령 한 마디로 요단강을 갈라 걸어서 강을 건너게 해줕테니까 모두 요단강으로 모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에 많은 무리들이 그의 말에 현혹되어 요단강으로 모여 들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5장 1” 

“한편 유대인이 처한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유대 전체가 강도와 사기가 들끓는 범죄의 소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벨릭스 총독은 매일 수많은 강도들과 사기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8장 3” 

“이 강도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온갖 악과 불의로 가득차게  되었다. 게다가 사기꾼들과 협잡꾼들은 자기들이 직접 이적과 표적을 행할 터이니 광야로 나가자고 백성들을 현혹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20권 8장 6” 

요세푸스가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에 강도떼들과 사기꾼들이 들끓고, 각종 기적과 이적들을 행한다는 가짜 예언자난 거짓 메시야들이 넘쳐 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시대는 바로 신약성서들 곧 바울서신들을 필두로 하여 복음서들이 막 쓰여지던 때였습니다. 

요세푸스가 강도나 도둑이라고 적시한 사람들은 거의 열심당(젤롯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요세푸스는 로마로 귀화한 유대인입니다.) 특별히 주시해야 할 것은 가짜 예언자들, 거짓 메시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종 기적과 이적들을 미끼로 하여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의 독립을 갈망하던 백성들을 광야로 모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참혹한 죽음 뿐이었습니다. 

로마군들은 위에 튜다스의 말에 속아 요단강가로 모여든 유대백성들을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여 몰살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튜다스를 전후해서 등장했던 여러 가짜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를 중심으로 모였던 유대인들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짜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들은 당시 백성들의 절실한 요구와 바램을 자신들이 들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다며 기적과 이적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번번히 속았고, 그들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들은 바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절실했던 문제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바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예언이었으며, 그 예언의 성취자가 자신이라고 하는 자기확신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그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 갈릴리 4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0 

그 동안 베드로는 바깥 뜰에 앉아 있었는데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 와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 마태 복음 26 : 69 – 70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을 또다시 부인하였다. 얼마 뒤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시 “당신은 갈릴리 사람이니 틀림없이 예수와 한 패일 거요” 하고 말하였다. – 마가복음 14 : 70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 가시는 동안 그들은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갈릴리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 사도행전 1 : 11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리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 사도행전 10 : 37 – 38 

예수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일컬어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했다는 기록들은 성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승천한 이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시기와 장소를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사도행전 11 : 25 – 26

그러므로 예수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예수가 떠난 후 믿음으로 함께했던 무리들은  한동안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리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의 최초 이름이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갈릴리는 어떤 곳이었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Map-Galilee-Northern-Palestine

요세푸스는 갈릴리땅이 너무나 비옥해서 게으름뱅이들까지도 그 땅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그 곳으로 이주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말에 좀 과장이 섞여있다 하더라도 갈릴리일대는 남부 유대지방에 비해 비옥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은 곧 갈릴리 거주인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습니다. 자기 농토를 경작한다고 하여도  영세농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로마와 예루살렘 종교권력에게 내는 과다한 세금으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농지의 실소유주는 예루살렘에 있고, 갈릴리 거주민들은 부재지주의 땅을 일구는 소작농이 주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어업은 갈릴리 사람들의 주요 직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갈릴리호수에서 낚은 고기들은 염장처리되어 예루살렘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로마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갈릴리일대는 우리나라로 친다면 함경도나 만주의 간도 일대쯤을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역사적 환경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 땅도 되었다가 중국을 비롯한 오랑캐의 땅도 되었다가 했던 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중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땅 갈릴리라고 불렀던 까닭입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부 유대에 비해 다른 나라들의 문화를 많이 받아 들인 곳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못지 않게 야훼 하나님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갈릴리가 유대 독립 봉기의 진원지가 된 것은 바로 그런 신앙 전통을 수호코자 하는 정신이 그 주민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던 열심당(젤롯당)의 본거지가 바로 갈릴리라고 했을 만큼 예루살렘보다 더 유대적이기더 했던 곳입니다. 

이방인들의 땅이자 유태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반란의 땅이라는 이중성이 공존한 곳이 바로 갈릴리였던 것입니다. 

이쯤 갈릴리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소개드립니다. 

“갈릴리는 광활한 지역이며 수많은 이방 나라들로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언제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강력하게 저항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갈릴리인들은 어려서부터 전쟁에 익숙해졌으며 인구도 수없이 많았다. 갈릴리에는 용맹한 자들이 끊어진 적이 없었으며 땅은 전체가 비옥하고 풍요하였으며 온갖 종류의 나무들로 가득차 있었다. 

어찌난 소출이 풍부하였던지 천하의 게으름꾼들도 갈릴리에 오면 부지런히 경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따라서 갈릴리 지역은 노는 땅이 없었으며 그 주민들도 빈둥거리며 노는 자가 없었다. 

더우기 갈릴리 지역은 마을들이 수없이 많아 어딜 가든지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이는 다 땅이 비옥한 덕분인데 가장 작은 마을도 15,000여면 이상의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 시대의 고통과 고민들이 넘쳐 나던 곳, 삶의 활력과 고통들이 뒤섞여 있던 곳,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동정녀 – 갈릴리 3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19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이사야 7 :14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 누가복음 1 : 34 – 3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읍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읍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읍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5 : 45 – 49 

갈릴리로 향하는 예수의 발걸음을 뒤쫓기 전에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 이야기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어린시절에 관한 기록은 성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도마의 유년기 복음이나 야보고의 유년기 복음과 같은 성서외적인 기록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참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요한이 잡히자 바로 갈릴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시작됩니다. 당연히 예수 탄생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 1 : 14)”고 기록하므로써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른바 선재설(先在說)이라고 합니다. 물론 요한복음도 그 이외에 어떤 탄생 이야기나 어릴 적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마태와 누가에 나타난 예수 탄생이야기에도 같은 점과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같은 점은 예수가 헤롯대왕 때 탄생했다는 것,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것, 고향은 나사렛이었다는 것, 아버지는 요셉이었는데 다윗의 후손이었다는 것, 천사들이 탄생을 미리 알렸다는 것, 예수가 후에 구세주가 된다는 것, 무엇보다도 두 복음서의 일치되게 전하는 것은 마리아는 동정녀였다는 것 등입니다. 

반면에 서로 다른 점을 꼽자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마태복음에는 없다는 것, 동방박사 이야기는누가복음에는 없다는 것, 세레요한의 출생과 천사의 알림 등등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보통 예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 즈음에 우리들이 생각하고 나누는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이 두 복음서 이야기를 합친 것이 됩니다. 

숫처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 안믿느냐를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교회의 힘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성서가 쓰여지던 당시 고대에 유행하던 영웅탄생 설화를 기반으로 한, 복음서 기록자들의 신학적 상상력으로 나온 결과라는 학설이 오래전에 이른바 종교사학파라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습니다. 

또한 기독교 교파에 따라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생물학적인 기적이나 진실을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 초대 교회 사람들의 신앙적 고백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지만 오늘날 기독교 장로회와 한국신학대학교가 설립된 배경을 보면, 당시(1947년에서 1953년 사이) 한국 기독교의 보수세력들이 장공 김재준목사를 이단으로 몰고 목사직을 박탈하면서 이루어진 일인데, 장공 김재준목사를 공격한 보수세력들이 내세웠던 무기가 바로 성서무오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리 해석차였답니다. 물론 보수세력들이 내세운 논리가 그럴 뿐이고 뒷 이야기는 길답니다. 나중 한국교회사 이야기로 다룰 수 있다면 또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퓨 리서치 - 동정녀

이쯤 아주 최근에 있었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조사결과를 하나 소개 드립니다. 지난해 년말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18일에 Pew Research Center에서 성탄절 풍습, 어제와 오늘(Celebrating Christmas and the Holidays, Then and Now) 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답니다. 

그 조사 항목 가운데 “예수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라는 것이 있었고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응답 결과랍니다.(옆에 도표 참조) 

약 ¾인 73%의 미국인들은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답을 했답니다. 그 가운데 남성은 69%가 여성은 78%가 그렇게 믿는다고 답했답니다. 백인의 경우는 71%, 흑인의 경우는 90%가 그렇게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87%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은 크게 놀랄 것은 없는데, 개신교나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도 약 1/3가 그렇게 믿는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잇는다고 하자면 꽤 길게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죽자고 이 문제에 매달려 있는 분들도 정말 많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많은 이정표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저는 이 문제에 크게 믿음의 에너지를 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천주교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교회가 이즈음까지 주요한 신앙고백문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사도신경을 보도록 하지요.(사도신경은 기원 후 400년을 전후한 시대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기위해 정말 중요한 과정이 이 사도신경에는 빠져 있습니다. 바로”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와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이에 있는 예수가 하신 말씀들과 행위들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교리에 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는 완전한 신(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인간 예수)임을 고백하는 아주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로 초대교회가 고백했던 신앙이 바로 동정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에 있어 신자와 아니냐를 가르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도 미련한 일일 뿐더러, 이 신앙고백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는 일도 미련한 일이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함께 할 갈릴리 예수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충분히 이런 잣대나 걸림돌은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