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 중간사 6

(당신의 천국 – 일흔 한 번 째 이야기) 

셀류코스가 죽고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가 그 왕위를 계승했을 때에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수단으로 대사제직을 손에 넣었다.   야손은 왕을 알현하고 은 삼백 육십 달란트와 또 다른 수입원에서 팔십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왕이 자기에게 경기장을 건축할 권한과 청년훈련소를 세울 권한과 예루살렘에 안티오쿠스 청년단을 결성할 권한을 준다면 백 오십 달란트를 더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왕은 이것을 승낙하였다. 야손은 왕의 승낙을 받아 직권을 쥐자마자 자기 동족들의 생활을 그리이스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 마케베오 하 4 : 7 – 11, 공동번역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식민지배가 이어오는 동안 유대인들이 식민지배를 참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정통치권을 인정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 의식과 전통을 인정한 식민지배 제국과 적절한 타협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셀류커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신앙과 전통이 깡그리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리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자리로 변하였고,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은 그리스 제우스 신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조차 그리스 이름인 안티오키아라고 바꾸려하는 움직임까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의 전통들과 신앙은 모두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철저히 헬라문화를 받아드리는 것만이 팔레스타인과 유다가 선진화 되는 길이라는 강요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헬라문명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고 유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자에게는 죽음이 대가로 따르는 강요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이하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시대의 물결을 맞이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결치는대로, 세월이 흐르는대로 그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 또는 평생 노예가 되는 길이라도 하더라도 생각없이 묻혀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지요. 

또한 그 변화에 대해 목숨 걸고 항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을 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보았지만 그 세가지도 강도의 세기와 그 길을 선택한 까닭에 따라 수많은 작은 종파들로 또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뭐 멀리 갈 것 없지요. 다가오는 새해는 갑오년(甲午年)입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갑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딱 120년되는 해입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한반도의 수많은 종파들이 있답니다. 친로, 친청, 친일, 친미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친일파 등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공산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등 다양하게 시대에 대응하는 무리들이 일어났듯이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세류커스왕조의 헬라화 정책의 전면에 나서서 유다의 전통인 야훼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완장을 찬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유대의 전통과 야훼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건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였고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아들 다섯을 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 양반이 바로 새롭게 세워지는 유다왕국의 시조가 되는 셈입니다. 

헬라신전에 머리를 조아린 동족을 때려 죽이고, 헬라 신전에 예배를 강요한 왕의 사신까지 때려 죽인 마따디아는 다섯 아들들과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함께 광야로 피신을 합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에서 게릴라전으로 항쟁을 합니다. 셀류커스의 군대를 피해 다니면서 틈을 보아가며 적군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게릴라 전술로  이름을 떨치게 되고, 그의 휘하에는 날이 갈수록  항거하는 유대인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그러데 이 무렵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이 지켜내려 했던 신앙과 전통에 대한 신념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때의 일이 마카베오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 광야로 피해 가서 숨어 살고 있다는 보고가 다윗의 성 예루살렘에 있던 (셀류커스)왕의 부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 왔다.  그래서 큰 군대가 그들을 쫓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에 다다라 맞은편에 진을 치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 이젠 그만두고 나와서 왕명에 복종하여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왕명에 굴복해서 안식일을 더럽힐 수는 없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돌을 던지거나 자기들의 피신처에 방벽을 쌓거나 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없는 우리를 죽였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적군이 안식일을 택해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처자와 가축과 함께 고스란히 죽어 갔고, 죽은 사람은 천 명이나 되었다.” – 마카베오상 2 : 31 – 38 

적군의 공격 앞에서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혀 대항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따디아는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는 맞아 싸운다는 계율을 내린답니다. 그리고 이 무렵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의 전통을 경건히 받들어 지키는 무리들이 마따디아 무리와 합세를 하게 됩니다.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무리가 바로 바리새파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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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아들 가운데 유다 마카베오(마카비)가 그를 계승하여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마카베오 역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셀류커스의 왕 에피파네스는 처음에는 이들 세력을 우습게 보고 소수의 병력들을 보냈지만 연전연패하자 자신이 제일 신임한  최강의 군대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야간기습 전략으로 이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때는 기원전 165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이 날로 부터 여드레동안 유대인들의 축제가 연이어 벌여지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바로 하누카(Hanukkah) 축제입니다.

안녕을 묻는 당신에게

오늘은 유다인들이 세운 마지막 왕국 하스몬왕조 이야기와 그 당시에 생긴 유다의 각 종파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산헤드린과 예수 시대의 젤롯당에 대한 연원과 그들의 특징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중간사를 마무리하려고 하였답니다. 

글을 쓰려 컴퓨터 앞에 앉아 먼저 열어 본 제  이메일함 에 쌓여 있는 메일 하나가 오늘 저녁 제 시간 계획을 엉크러 놓았답니다.  한동안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오늘 연재 글은 좀 쉬고, 예수 시대 이야기를 짧게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제 저녁 시간 계획을 흩으려 놓은 이메일은 이제 쉰 중반으로  들어서는 후배가 이즈음 심경을 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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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한국사회의 화두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이 이 친구의 맘을 흔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묻는 의도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후배  아버님의 갑작스런 병원 출입과 2013년 한 해를 돌아보며 힘들었던 시간들을 되뇌어보니 안녕치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모양입니다. 

쉰 중반, 자신이 그려왔던 그 나이의 모습과는 다른 지금의 모습에 대한 회한이 묻어 있는 편지였답니다. 

이쯤, 제가 이즈음 거의 매일 이어가고 있는 “당신의 천국”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바로 그런 회한에 대한 위로의 작업입니다. 물론 그 후배가 아닌 제 자신에 대한 위안으로 시작한 일이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그가 온 때에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헤롯대왕, 빌라도 총독,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사두개파, 바리새인, 에세네파, 젤롯당, 예수의 제자들 등등 말입니다. 

이렇게 무리를 지어 사람들을 나누다보면 그 그룹안에 속한 이들은 저마다의 특징들이 있거니와 나름 뜻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일테면 왕과 왕족, 총독, 사두개파는 있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바리새파나 에세네파 하면 종교적 자부심으로 사는 사람들 이라는 특징이 있는 것이지요. 젤롯당하면 자신들의 사명에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자부심이 있는 것이고요. 예수의 제자들은 한 때 헛 꿈들을 꾸었지만 그 꿈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다 간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실제 예수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갈릴리 주변에 살던 쉰 중반, 예순 아니 마흔, 서른, 스무살 나이에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사람들, 자신들이 꿈꾸었던 그 나이의 자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 그러나 무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기다림을 안고 살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렇다고 예수가 헤롯대왕, 빌라도 총독,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사두개파, 바리새인, 에세네파, 젤롯당, 예수의 제자들 등등 그룹을 이룬 이들을 외면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떤 모습을 누리고 살던 그가 놓인 처지나 환경이나, 높고 낮음이나, 갖고 못가짐이나, 생각이 좌이거나 우이거나 그런 잣대들을 몽창 허무러뜨린 맨 사람 하나 하나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가치가 있는 삶을 누릴 권한이 있고, 그 길은 늘 열려 있다는 선포를 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불공정하고, 불완전하고,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고 끝내 내가 꿈꾸었던 내 모습이 아닌 세상에서 살더라도 “가라, 거기서 살라”고 명하시는 이가 예수였습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그 끝에 기쁨과 희망, 마침내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까닭입니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곳에서 “사람임을 아는”일이 우선입니다. 

사람끼리 견줄 일이 아니라 사람임을 깨달았느냐를 견줄 일입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이 우리 모두에게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 물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후배를 위하여! 또한 나를 위하여!

임계점(臨界點) – 중간사 5

(당신의 천국 – 일흔 번 째 이야기) 

몹씨 추운 겨울날입니다. “춥다”의 반대말은 “덥다”입니다.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일에는 반대되는 말이나 개념들이 있습니다. 크다와 작다, 잘한다와 못한다, 참이다와 거짓이다 등등 말입니다. 

그럼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전제주의나 독재주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종종 그 반대 개념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분들을 만날 수가 있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반대 개념은 자본주의겠지요. 

오늘날 한반도 남북이 겪고 있는 가장 큰 혼란과 슬픔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일겝니다. 전혀 엉뚱하게 제 멋대로 자신과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이런 개념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북쪽은 아무리 자신들의 이름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넣고 외쳐 불러보아도 그들이 민주주의 공화국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드물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한, 남쪽 사람들 99.99999…%는 북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북은 그저 전제주의 독재국가일 뿐입니다.(남쪽 법으로는 국가라고 인정을 안하지만 국제법으로는 분명 국가임으로) 

남쪽 역시 아무리 민주주의 체제라고 말하여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랍니다. 도대체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른 생각과 사상들을 서로 인정하고 토론하고, 그 과정을 통해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도 하고, 잘못되면 다시 그 잘못을 인정하고 토론하고 다시 묻고 하는 과정을 용인하는 것 아닐까요? 나와 다르면 무조건 종북인 나라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아이고 제 이야기가 왜 이쪽으로 흘렀을까요? 

복지 이야기 하려다 이렇게 되었답니다. 구약성서 전체를 일관하는 야훼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평등한 복지”라는 신앙이 있답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빈부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부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반드시 돌보아야만 한다는 “복지”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신앙고백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 반드시 오고 가는 것은 “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 문제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갈리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국가권력이 이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하는 잣대에 따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로 갈리면서 그 성패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경험해 온 결과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한 것이고요, 자본주의 역시 아직은 시험중이고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합된 형태의 국가들이 새로운 문제 해결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인 것 같지요. 

성서의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에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으시는지요? 

바로 성서가 던지는 이 질문 앞에 우리들이 서 있기 때문이랍니다. 

팔레스타인과 유다의 새 주인이 된 셀류커스왕조는 이전 왕조였던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뜻으로 조세 감면 정책을 폈답니다. 

세금을 거두어 드리지 않는 정책으로 과연 식민지를 지배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저 식민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거짓이었을 뿐이었답니다. 일시적으로 시행했던 이 정책으로 셀류커스왕조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더더군다나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었던 로마의 도전 앞에 봉착한 셀류커스왕조는 급격한 정책의 변화를 꾀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식민지의 재산을 강탈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에피파네스라고 불리우는 안티쿠오스 4세가 등극하면서 이러한 정책이 강력하게 진행됩니다. 

이 지점에서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셀류큐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 세력이 배포가 맞는 일이 벌어집니다. “돈이 최고다.”, “우리끼리 잘 살아 보자”라는 정신에서 서로 배포가 맞은 것입니다. 

이들이 첫번째로 벌인 일이 그리스 올림푸스산의 제우스신과 예루살렘의 야훼 하나님은 하나라는 신앙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었습니다. 기원전 174년에 야손이라는 사람이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산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대인들의 신앙과 제사의식을 무너뜨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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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일을 성서 외경인 마카베오(마카비)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안티오쿠스왕은 온 왕국에 영을 내려 모든 사람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방인들은 모두 왕의 명령에 순종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왕의 종교를 받아 들여 안식일을 더럽히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본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왕은 그의 온 왕국에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고 국민을 감시할 감독관들을 임명하고 유다의 여러 도시에 명령을 내려서 각 도시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게 했다.   많은 유다인들이 율법을 버리고 그들에게 가담하여 방방곡곡에서 나쁜 짓이 마구 저질러졌다.  그 밖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아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 마카베오상 1 : 41 – 53, 공동번역에서 

철저한 자기부정의 길을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견디어낼 수 있는 인내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사백년 가까운 식민지배를 벗어나 종교적 신앙 전통을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독립을 부르짖고 싸우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일의 계기였답니다. 

이제 새로운 유대왕국이 그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예수시대의 파당들이 만들어진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교회에 속한 작은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송년회를 겸한 모임이었습니다. 제 엉덩이가 좀 가벼운 탓에 어느 모임에 가던 진득히 앉아있는 편이 못됩니다. 제 아내의 한결같은 불만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오늘은 거의 다섯시간 넘는 시간을, 그것도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도 않고 쏟아내며 앉아있었답니다. 편하고 즐거웠다는 말씀입지요. 

집으로 돌아와 이즈음 일상 가운데 하나인 “당신의 천국” 이야기를 쓰려다 접고,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대자보

이즈음 한국 대학가에 나붙은 대자보 하나가 뉴스의 촛점이 된 소식을 듣고 보고 있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대자보입니다. 늦게 본 제 딸 아이가 대학 졸업반이랍니다. 아이들 말에 귀 솔깃할 나이는 이미 지났답니다. 제가 그 뉴스를 보고 대자보의 내용을 찾아 읽으며 든 생각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사실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은 우리 세대에겐 아주 낯익고 입에 배인 인사말이랍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자란 세대랍니다. 저도 어느새 육십줄에 걸친 세대가 되었습니다만,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땐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는 6.25 전쟁 때 생긴 인사법입니다. 남쪽 군대, 북쪽 군대가 오르락 내리락 밀고 밀리던 일들이 계속 되는 전쟁을 치루면서 밤새 목숨을 잃는 일들이 다반사였던 일상 속에서 사람들 입에 배이게 된 인사말이랍니다. 

50년대 말, 60대 초까지 제가 어릴 때 입에 붙어있던 한국인들의 인사말이었답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또 다른 입에 달고 살던 이삿말이 “진지 잡수셨어요?”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세월에 생긴 인삿말입니다. 끼니를 때우는 일이 모든 일에 최우선이던 시절에 생긴 말이었겠지요. 

적어도 우리 아이들 입에서는 이런 인삿말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살아왔겠지요. 너나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젠 그런 인삿말들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살고 있지 않으니 잘은 모릅니다만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든지, “진지 잡수셨어요?”라는 인사는 거의 하지 않거니와 설혹 하더라도 옛날과는 그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세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던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물음이 공감을 얻는 사회를 바라보며, 그 물음에 답을 할 사람들은 젊은이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인사법을 없애려고 애써온 우리 세대들 곧  1950년대생들이 대답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제 블로그의 이름이 “1950대생들을 위하여”랍니다. 

2013년 겨울, 성탄절 즈음에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던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의 핵심은 “당신은 이웃의 아픔에 저려오는 맘 하나 가지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이랍니다. 

그걸 아이들, 바로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 우리 세대들을 향한 물음이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들어 줄 수 있었던 제가 속한 교회의 작은 모임에게도 감사하며…

권력 – 중간사 4

(당신의 천국 – 예순 아홉 번 째 이야기)

권력 특히 정치권력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로 먼저 있었던 권력에 대한 거부나  완전 부정이라는 면을 들 수 있습니다.  일테면 미국의 부시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Clinton이라는 말은 그런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Roh,  곧 모든 일은 노무현 전대통령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일이 있었지요. 비단 이명박 전대통령만의 일은 아니였지요.  그의 도가 넘는 반노(反盧)정책을 전적으로 이명박이라는 개인 탓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랍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랍니다. 

아무튼 정권이 바뀌면 일단 전임 정권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습니다. 전임 정권에서 쌓여 온 악화된 민심(民心)들을 푸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새 정권의 힘(동력動力)을 얻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지요. 박정희는 제껴놓고, 이후 권력승계가 선거에 따라 이어져 온 역사만 본다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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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고요, 김영삼은 전과 노 두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고요, 김대중은 워낙 다들 적이였거니와 전임이었던 김영삼은 이미 정리하지 않아도, 아니면 그걸 다 밟으면 제 목 날아갈까보아 두리뭉실, 노무현도 김대중을 정리했지요. 남북관계의 돈문제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신기한 게 박근혜랍니다. 통상 오년 임기 중 첫 일년 안에 이런 전임에 대한 거부 또는 부정의 정책들이 쏟아지는 게 정상인데, 제가 보기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권 변화사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녀의 인물 됨됨이가 아주 크거나 아니면 이제껏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민족들이 보아 온 정권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이해 못하는…그게 되어야 민주주의인데…)

다만 제 생각을 덧붙인다면 지금 권력의 중추인 김기춘이라는 이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 말이었다지요. “그럼 우리는?” – 이 질문을 던진 이가 권력에 중추에 있다는 말은 자기 식으로 정리해 보겠다는 뜻? 그 정도는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북의 장성택과 김정은 뉴스는 이번 주 미국 뉴스 가운데도 손꼽히는 메뉴 가운데 하나였지요. 마치 미개 문명 세상 소식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아직 멀었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자면 여기까지 온 것도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하나님 나라를 한 곳에서 만남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나라를 먼저 찾아갈 일이기에 이만 접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유다 땅의 모습도 똑 같았답니다.  Anything But Ptolemaios 였답니다. 왕조가 바꾸자 전임 왕조의 반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의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계 헬레니즘 왕국인 세류커스왕조는 전임 권력이었던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당근을 던집니다. 전임 왕조는 세금을 많이 매겼지만 우리는 아니다라는 정책을 폅니다. 셀류커스 왕조의 주인인 안티쿠오스 3세는 예루살렘의 전 주민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하고 성전과 성전관리를 하는 사제들의 세금은 영구 면제한다는 칙령을 발표한답니다. 

유다 및 예루살렘이 쌍수를 들어 새로운 식민 지배자인 안티오쿠스 3세의 셀리큐스왕조를 반겼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 돈 더 안내도 된다는데 말입니다. 

이게 사단의 빌미가 된답니다. 당연히 얻게 되리라는 당근 대신 채찍을 유대인들이 맞게 되는 것이지요. 

뭐 그 때나 지금이나…. 

또 쌓인 눈을 치우고나니… 내일 잇지요.

대왕 – 중간사 3

(당신의 천국 – 예순 여덟 번 째 이야기) 

기띰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립보의 아들인 알렉산더는 페르샤와 메대의 왕 다리우스를 쳐부수고 그 왕권을 차지하여 그리이스 왕국을 손에 넣은 다음, 수없이 전쟁을 하여 숱한 성을 점령하고 세상의 많은 왕을 죽였다. 알렉산더는 땅 끝까지 진격하여 여러 나라에서 많은 재물을 약탈하였다. 온 세상은 그 앞에 굴복하였고 그는 우쭐하여 오만해졌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고을과 나라와 왕국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 후 알렉산더는 앓아 눕게 되었는데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어릴 적부터 자기와 함께 자라난 장교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왕국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더는 십이 년 동안 통치하고 죽은 것이다. 그 장교들은 제각기 자기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알렉산더가 죽자 모두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도 뒤를 이어 오랜 세월을 두고 집권하였다.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온 세상은 그들의 학정에 몹시 시달렸다. – 마카베오상 1 : 1- 9, 공동번역에서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당시 도시국가들로 형성되어 있던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에게 사절들을 보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라는 친서와 함께 말이지요.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대제국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 요구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아테네는 사절을 죽여 버렸답니다. 

이 일로 인해 벌어진 것이 마라톤전투로 잘 알려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제1차 전쟁이랍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6,4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그리스는 단지 192명의 전사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다리우스 1세의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260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격해 왔다고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그의 책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후세의 사가들은 이 숫자는 허풍이고 대략 3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반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영웅적 싸움을 전하는 테르모필레 전투로 알려진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 역시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그리스 연합군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국인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기 동맹을 형성하고 약 30년간에 이르는 오랜 전쟁을 치릅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이라고 불리우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멸망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되고 반도의 주인은 스파르타가 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기원전 400년에 주인은 테베로 바뀝니다. 

그 무렵 그리스 반도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왕국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으며 그리스 반도 안에 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그 세력이 미약하였습니다. 그 마케도니아에 필립 2세(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359년의 일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기원전 336년 암살당할 때 까지 그리스 반도는 마케도니아 수중에 놓이게 됩니다. 

필립 2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이 나이 스무살 때의 일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와 왕위 승계를 다투던 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약관 스무 살 어린 왕을 우습게 본 그리스내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약 일년에 걸친 싸움에 모두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alexandria

그의 나이 23살 때 잇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24살 때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잽싸게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26살 때 페르시아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동으로 동으로 전진하여 인도 접경까지 이릅니다. 이 때 동으로 전진하면서 많은 신도시들을 세우고 도시의 이름을 하나같이 알렉산드리아라고 명합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갈 곳은 이집트 북쪽에 있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더는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군대와 함께 수많은 비전투원들을 거느리고 다녔습니다.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운동선수, 배우, 심지어 매춘부들 까지 거느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점령하는 곳 마다 그 곳 문화를 받아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민족간의 결혼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기도 하면서 융합되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무서운 기세로 넓은 땅을 점령해 나가던 알렉산더의 나이 34살 때 그는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복지 바벨론에서 급서한 그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는 여러 설들이 있습니다. 암살설, 지나친 음주 탓 설, 너무 빠른 성공으로 인한 의욕상실설 등이 있지만 대세는 말라리아 감염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답니다. 

기원전 323년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알렉산더 이후의 이 신흥 제국은 급격한 분열을 맞게됩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 사이에 극심한 권력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들을 ‘디아도치(diadochi)’라고 하는데 후계자라는 뜻이랍니다. 서로 서로 알렉산더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약 20년 넘게 투쟁을 벌인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05-30 BC, 주로 이집트지역), 셀류커스 제국(312-63 BC,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의 시리아지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왕조(306-168 BC)로 나누어집니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셀류커스 제국입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하자 페르시아 식민지 유다는 이 신흥제국에 항복을 합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에서 그리스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 사마리아에서 신흥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알렉산더의 강력한 보복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 대량학살 당한 사마리아인들의 유골이 발굴되어 그 때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답니다. 여타의 다른 유다지역에서는 알렉산더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 드렸답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나누어진 세 개의 왕국들이 치열하게 세 다툼 전쟁을 벌일 때 팔레스타인의 유다는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여러 피해를 입게 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북부 지방이 이들 세 왕조의 세력이 맞붙은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은 이집트를 근거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습니다. 이집트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였을 때는 유대계 총독과 성전의 대사제가 다스리는 체제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사제를 명목상 유대의 수반으로 하고 이집트계의 민정관리인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 시절보다 가혹한 공물과 조세부담에 시달리는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물이나 세금 징수를 맡는 관리들은 거의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같은 민족 안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일어난 주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유대 디아스포라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유대인의 정체성 찾기 운동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살며 이미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인 히브리어를 버리고 헬라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들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을 융합시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특히 이들은 정통 유대교가 형성되면서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 랍비 유대교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고, 후에 바울의 기독교 선교 운동의 첨병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항거들이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기원전 198년까지 이어집니다. 

시리아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유지해 온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쿠오스 3세가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기원전 198년이고, 이 시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유대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징후는 성전 권력의 썩을대로 썩은 부패로 부터 나타납니다. 이 무렵(기원전 174년경)부터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만남 – 중간사 2

(당신의 천국  -예순 일곱번 째 이야기)

성서의 외경 또는 제2경전으로 부르는 책들을 빼놓고,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받아 드리고 있는 구약의 마지막책 말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시대까지를 일컬어 신구약 중간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연대로 따져보면 대략 기원전 430년경부터 예수 탄생시기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시대의 변화를 바로 보려면 바벨론 포로 귀환기(기원전 538년)부터 예수 탄생까지의 시기를 보아야합니다. 

유다의 역사로 보자면 이 시기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식민지시대(페르시아, 그리스)와 유다왕국시대,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 시대로 말입니다. 

인류사 또는 세계사로 본다면 이 시기 곧 기원전 2,500년에서 예수 탄생 시기 까지 약 오백년은 그 이후로 부터 오늘날까지 약 이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을 지배해 온 큰 생각들 곧 사상과 종교가 탄생한 시기입니다. 

유대교가 오늘날의 유대교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이고,  싯다르타 고타마 또는 고타마 붓다라고  불리우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불교를 탄생시킨 것도 이 무렵(기원전 500년- 600년 경)이거니와 유교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가 살았던 때도 바로 이무렵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헬레니즘의 대명사이기도 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가 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먼저 용어 설명을 드립니다. 희랍, 헬라 , 그리스는 다 똑같은 이름입니다. 희랍(希臘)은 중국인들이 그리스의 발음을 제 나라식으로 적은 것이고요.  영어권에서 South Korea로 부르는 나라 대한민국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Korea이고, North Korea로 부르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듯이 그리스(Greece)라고 불리우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Hellenic Republic이랍니다. 그리스어인Hellas라는 말은 반도라는 뜻이랍니다. 한반도처럼 반도(半島)라는 말입니다. 한자어’희랍(希臘)’은 바로 Hellas를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랍니다. 

헬라, 희랍, 그리스 다 똑같은 말이라는 것이고요. 그리스 정신과 문화를 일컬어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하고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히브리즘 또는 헤브라이즘 hebraism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서양의 생각과 사상, 철학, 종교를 따져보면 이 두가지 기둥이 서로 엉기거나 분리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들 하지요. 

그 두 개의 정신이 만나는 때가 바로 이 신구약 중간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변화와 성문서(시편, 잠언 등)들이 이루어진 배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시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간략한 당시의 유다역사를 정리하고 넘어가야만 하겠습니다. 

페르시아시대의 유다는 페르시아가 내세운 유다인 총독이 정치, 군사적 권력을 관할하고, 유다인 대제사장 및 제사장 그리고 레위 그룹들이 제사 권한 곧 종교적 권력을 쥔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체제가 왕정시대(다윗, 솔로몬과 남왕국 유다시대)를 이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체제에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전체제 관리자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 군사적 체제에 순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미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디아스포라란 민들레 씨앗처럼 마구 퍼트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자의든 타의든 자기가 살던 고향땅을 떠나 살게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 외국 땅으로 떠나가서 정착한 유다인촌들이 생겨난 시대라는 것입니다. 

유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뭉친 유다인들과 디아스포라가 되어 외국에서 정착촌을 이룬 유다인들 사이에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야훼 하나님 신앙으로 뭉친 예루살렘 중심 정신과 “그 날이 오면”이라는 종말론적 정신입니다. 

이런 유다 정신 곧 헤브라이즘 또는 히브리즘을 상승시키면서 대립하는 헬레니즘이 서로 만나게 된답니다. 

기원전 333년에 시리아 북쪽에 위치한 잇소스라는 곳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오 3세와 그리스의 떠오른 별 알렉산더가 제국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렸습니다. 알렉산더의 완승으로 끝난 이 싸움으로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정말 간단히 먼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를 말씀드리면 히브리즘은 이제껏 우리들이 유다인들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확인한  “오직 하나님만(Mono-Yahwism)”이라는 정신과 신앙아래 생긴 것이랍니다. 신은 오직 하나이고, 신이 선택한 민족도 하나이고, 세계의 중심은 바로 그 신에게 있고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헬레니즘은 세계의 모든 것은 다 품는다는 정신이 우선한 것이지요. 더 쉽게 말씀드리면 좋은 게 다 좋은 것이랍니다.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말이지요. 

또한 히브리즘은 신 중심 그것도 오직 하나 뿐인 신 중심적인 세상과 감성과 영적인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헬레니즘은 인간중심, 사람중심, 이성과 지성 중심의 세상을 말하고 있답니다. 

이 두 개의 큰 생각이 만나게 되는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한국말을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생각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고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들 있거니와 그렇게 가르치는 교계 지도자들이나 목사 또는 지도층 평신도들이 있답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거니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우리들의 발걸음에 훼방을 놓는 일이랍니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서로 만나는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은 야훼 하나님의 일터를 보다 넓게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상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 시대 빠른 역사 이야기 한번 더 해야 마쳐질 것 같고요. 

이쯤 한번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답니다. “예수, 예수”하는 사람들, “교회, 교회”하는 사람들 정말 많지요. 

크게 무리를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지금 지구 어느 땅에 살더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한국말을 제일 언어로 사용하면서 한국말로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바로 크게 한무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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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엄청나게 다른 것 같을 때가 있답니다. 개신교, 카톨릭에서 부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등에서 또 그 안에서의 계파로 나뉘이고, 나아가 보수니 진보니, 자유주의니 다원주의니 정통이니 운운들 하지만 크게보면 다 똑같은 한 무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히브리즘, 헬레니즘, 불교, 유교, 선교 등 오늘 우리들이 선택한 믿음과 조상대대로 이어 온 알 수없는 종교적 인자들이 하나가 된 똑 같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믿습니다”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오늘의 나에게 참된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골 아프지만 역사 이야기를 짚고 넘어 가야한다는 말씀이랍니다.

 

내일 잇겠습니다.

경전 – 중간사 1

(당신의 천국 – 예순 여섯 번 째 이야기) 

경전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상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해도, 경전을 경전으로 확정하고 경전을 그렇게 표시하며 제한하는 일은 교회의 행위요, 교회신앙의 행위이며, 교회적 인식과 교회적 고백의 행위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이 책들을 신성한 교리들이 담긴 책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항상 거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 책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바칠 자세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문’ 제1권 8장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인 1954년 6월 1일Wall Street Journal에 이런 광고가 하나 실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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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사본 두루마리 4개 : 기원전 200여년 경의 성서 필사본 팝니다.  (The Four Dead Sea Scrolls: Biblical manuscripts dating back to at least 200 BC are for sale. ) 

1947년 팔레스타인 사해 서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 또는 쿰란문서라고 불리우는 두루마리 성서 사본이 어찌어찌 돌고 돌아 미국 신문에 판매 광고로 등장한 것입니다. 자그마치 이천년이 넘는 고고학적 자료이자, 성서에 대한 수많은 궁금증을 풀어주게되는 이 사본들은 당시 미화 25만 불에 팔립니다. 

실제 구매자는 이스라엘 정부였고, 판매액의 대부분은 미국정부에 귀속되었습니다. 광고를 냈던 사무엘이라는 시리아 정교회 소속 감독은 손에 쥔게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00년 경과 그 이후 약 300년 사이에 쓰여진 히브리 성서 필사본과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서기 1947년에 발견된 일은 성서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읽고 보고 있는 성서의 원본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원 전 200여년 즈음에  헬라(그리스어)어로 번역된 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된 성서의 원본은 없다는 것입니다. 쿰란문서가 발견되기 전에는 히브리로 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기원후 약 700년 경에 펴낸 마소라 사본이라는 책이 있답니다.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히브리어 성서의 원본에 가까운 시대를 약 900년 앞으로 당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알아보려는 시대는 바로 이렇게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기원전 450여년 무렵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이 활동하던 구약성서의 마지막 기록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까지입니다. 

특히 말라기 이후부터 유대왕국인 하스몬왕조가 들어서기까지 약 300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성서의 틀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서가 형성되고 헬라어 성서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또한 인류 역사에 있어 신기원을 형성하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이 만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누어지는 토대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에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기의 변화와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예습은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이 시대는 성서의 완성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성서(구약)를 읽는 시각의 차이로 인해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가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례요한과 예수와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답니다. 

제2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식민지였습니다.  왕이 없는 식민지에서 사는 유대인들과 인근 각지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절실하게 찾아 헤매던 자기 정체성을 묻는  물음에 대한  결실이 바로 구약성서입니다. 

그리고 그  성서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유대교와 기독교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과 동방박사와 헤롯왕과 빌라도총독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세리와 열혈당원과 십자가 그리고 바울을 준비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제 그 시대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문서들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제 아버님께서 작은 책을 하나 엮어 내시는데,  오늘 최종 인쇄 승인을 해서 보내는 날입니다. 그거 좀 꼼꼼히 들여다 보느랴 시간을 내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저 신구약 중간사로 들어가는 글로 오늘의 글을 대신합니다.

권력 – 귀환 8

(당신의 천국 – 예순 다섯 번 째 이야기)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을 공평 무사하게 다스렸다. 군 총사령관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 공보대신에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  사제 일은 아히툽의 아들 사독과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 비서 일은 스라야,  그렛 외인부대와 벨렛 외인부대의 지휘관에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다윗의 아들들도 사제 일을 보았다. –사무엘하 8 : 15 – 18 

(솔로몬)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에비아달의 자리에 사제 사독을 앉혔다. – 열왕기상 2 : 35 

레위인은 예수아의 일가, 곧 카드미엘과 빈누이와 호다야의 일가 칠십 사 명이었다. – 에스라 2 : 40, 이상 공동번역에서 

그들은 그 동안 경비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렸으며 바사(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율법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이들은 하나님께 넘치는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이들은 귀족정치(aristocracy)에 과두 정치(oligarchy)가 가미된 정부 형태를 취했다. 과두 정치가 가미 되었다는 말은 대제사장이 정부의 수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 11권 4장에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심을 바로 알고 이해하려면 예수가 일하고 말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일테면 백 이삼 년 전에 한반도에서 ’양천주(養天主) 곧 우리 안의 하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다 목이 잘린 해월 최시형을 바로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거니와, 똑같이 ‘아간의 범죄’ 행위를 인용하였지만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촉발시켰던 길선주목사의 “내가 아간입니다.”라는 고백과 2013년 그 규모로는 세계적 순위로 꼽히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가 “나는 아간이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것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와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들과 형편을  잘 이해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약 2,500년 전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다보면 열 두지파, 대제사장, 제사장, 사제 , 레위 등등의 말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이스라엘의 12 부족을 나타내는 12지파 중 레위 지파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담당하는 지파였는데 왕국이 망하기 전에 남쪽에 속했을까요? 북쪽에 속했을까요?  남왕국은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둘이었으까 당연히 북쪽에 속했겠지요. 

남왕국 유다의 전통을 잇는 포로 귀환 후에 역대기 사가들이 생각했을 때 이 레위지파의 위상은 어떠했을까요? 

highpriest

또 한가지 혹시 “사독”이라는 이름 기억나시나요?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정권의 요직 개편을 하지요. 사무엘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왕 밑에 최고 권력자는 군 사령관 요압, 공보대신에 여호사밧, 두 명의 사제장에 사독과 에비아달이라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권력 순위 3 – 4위에 사독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다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에비아달이 숙청되고 사독이 단독으로 사제장 곧 대제사장 자리를 꿰어찹니다. 

그로부터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사독의 후손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 자리들을 독차지합니다. 이 말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곧 신권을 대행하는 권력이 사독 가문에 집중되었다는 말입니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주된 사람들 역시 이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가문과 이들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을까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던 레위 가문들 가운데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으로 내려 온 많은 레위 가문 사람들이 있었고요. 주로 이들은 산당이라고 하는 지방에 산재된 야훼 하나님을 기리는 예배처소를 담당했을 것이라고들 추정한답니다.

사독가문의 제사장 그룹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를 주창한 것이고, 레위 가문은 후예들은 지방 예배처를 관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런데 유다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모두 왕 아래에 놓인 계급이었습니다. 

바벨론포로기 이후로부터 하스몬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에는 약 400년 이상 왕이 없다고 헀습니다. 

왕이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이었답니다. 신권정치를 움켜 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권정치를 내세우고 권력을 잡은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철저히 친 페르시아 입장에 서서 그들의 정치 군사적 권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지요. 

솔로몬 제 2성전의 건축은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독가문인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 비록 위축된 형편이었지만 명맥을 유지해 오던 레위지파가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신권정치를 이어간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신앙고백은 성전 중심인 예루살렘의 새 날에 대한 기대였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그 고백을 축약한 것이고요. 

그로부터 약 오백 년이 흐른 뒤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 역사를 송두리채 뒤집어 엎어 버린답니다. 

이제 구약의 성문서(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에스더..) 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짧게 살피고 신구약 중간시대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적통(嫡統) – 귀환 7

(당신의 천국 – 예순 네 번 째 이야기)

그 해 칠월 이십 일일, 주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와, 그 밖에 살아 남은 모든 백성에게 일러라. ‘이 성전이 예전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더냐? 너희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더러 남아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성전은 어떠하냐? 너희의 눈에도 이 따위는 있으나 마나 하지 않으냐? 그러나 즈루빠벨아, 힘을 내어라. 나 야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야, 힘을 내어라. 이 땅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그리고 일을 시작하여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학개 2 : 1 – 4 

오후 늦게 일인치 정도의 눈이 내릴 것이라던 일기예보는 빗나갔습니다. 오전부터 펑펑 쏟아지던 눈발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밤 늦게까지 약 6인치 이상의 눈이 내린다는 수정 예보가 나왔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전에 교회에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눈길이었습니다. 모처럼 사람의 말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말씀에 기쁨을 맛보고 돌아 온 주일이었습니다. 

집 앞 드라이브웨이 눈을 치우고  난 뒤 나무가지에 내려 앉은 눈 사진 몇 장 찍어보았답니다. 잦아들던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있답니다. 

DSC01575

DSC01574쌓이는 눈위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해오던 이야기를 이어가야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뒤돌아 보려고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바벨론에 살다가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 온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살았던 유다인들이 모두 돌아 온 것은 아니라는것 쯤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겠거니와 당시의 유적들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는 사실이랍니다. 

아무리 주변 상황이 바뀌었더라도 거기(바벨론) 남아 사는 게 훨씬 나았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돌아 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뚜렷한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답니다. 한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나가는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외골수 믿음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최고의 우선 순위는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고 유지하고 이어나갈 증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 재건축이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야훼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고, 스스로들이 생각하는 민족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달랐습니다. 같은 조상의 자손들이고, 야훼 하나님을 똑같이  말하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삶의 모습들을 보면 자신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는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호히 이를 거부합니다. 사마리아인들과 70년 사이 바뀐, 그 땅의 주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입니다. 고로 “성전 건축은 우리의 일이지 너희의 일이 아니다.”였습니다. 

이제 사마리아인들과 그 땅에서 여호수아(이 여호수아와 예수아로 불리는 귀환 시대 제사장 여호수아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점 기억하시고요.)이래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이어 그 땅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70년 동안 세월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근근히 또는 잘 살면서 그 땅에서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느닷없이 70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돌아와서 옛 전통을 잇는다며 성전을 세운다는 소리에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우리도 함께 하지”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매몰차게 내민 손을 내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뿔 날 일이지요. 더더군다나 땅, 그 가운데 값나가는 땅은 예나 지금이나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70여년을 누리던 땅도 나누어야 하는 처지에서 본다면 열받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감정 꾹꾹 숨기고, 같은 핏줄이니까하며 손을 내밀었더니 그 손을 내치다니! 돌이킬수록 분이 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땅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이 택한 방법이 정치, 군사적으로 그 땅의 주인인 페르시아 황제에게 “내 편 좀 들어 달라”는 장계를 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  이런 이야기들을 이어가는 당시의 주인공들, 당시의 영웅들이 바로 페르시아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이었습니다. 

빠르게 성전터와 토대를 세웠지만 사마리아와 그 땅에 살던 이방인들 및 이방 종교에 물든 이들의 방해 공작 앞에 머뭇거리게 되는 스룹바벨과 예수아 그리고 그들을 향해 “너희야말로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할 영웅이다. 성전 건축에 온 맘과 힘을 다해라.”라는 부추김을 하던 사람들이 학개와 스가랴였습니다. 

이제 당시 그 땅의 정치, 군사적 주인이었던 페르시아 입장이 되어서 그 시대를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보지못한 엄창난 땅을 지배하게된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점령지를 지속적으로 잘 다스리기 위한 정책으로 점령지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이어가도록 허용합니다. 이러한 정책의 혜택을 받은 족속 가운데 하나가 유다족입니다. 그런데 그 고레스황제가 죽고난 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캄비세스는 고작  7년 동안 황제위에 있다가 후사(후계자)가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기원전 522년에서 기원전 521년 사이 약 일년 동안 페르시아는 극심한  왕위 쟁탈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혼란한 권력 다툼의 정세를 뚫고 이겨내 권력을 쟁취한 사람이 바로 다리우스 1세입니다. 

다리우스1세는 왕국의 시조인 고레스의 정책을 이어받는 동시에 지방 변방의 소국들을 이웃한 큰 나라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는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정책을 편답니다. 

이런 세가지 서로 다른 상황들이 맞물려 제 2 성전의 건축은 터를 세웠다가 잠시 중단되고  결국은 다시 이어져 완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 당시의 상황을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고백한 기록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서 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이 완성되면서 새로운 전통이 하나 세워집니다. 바로 대제사장의 적통이 예수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왕이 없는 시대, 총독과 대제사장이라는 이원 체제가 자리잡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이어지면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대망이 깊어지고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