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일흔 세 번 째 이야기)
곤경에 빠져서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내 소리를 들어 주셨사옵니다. 야훼여, 나를 건져 주소서. 거짓된 입술과 사악한 혀로부터 건져 주소서. 너, 사악한 혀야, 너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 너 무엇을 더 받으려 하느냐? 네가 받을 것은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노가주나무 숯불뿐이라. 오! 메섹인들에게 얹혀 사는 나의 신세, 케달인들 천막에서의 더부살이, 이 괴로움이여. 평화를 지겨워하는 자들, 그들 틈에 너무나도 오래 끼어 살았구나. 내 소망은 화평이다, 한 마디만 하여도, 그들에겐 싸움거리가 되는구나. – 시편 120장, 공동번역
쎄시봉 열풍이 불었던 것이 지난 해 일이었나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의 이야기와 노래가 제법 방송 시청율을 올렸던 때가 있었지요. 저 역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영시의 다이알’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출연자였던 그들이 전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과 노래를 들으며 공부했던 세대이므로, 늙으막에 들어선 그들의 이야기를 흥미있게본 기억이 있답니다.
그런데 시간을 돌려서 그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네들 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던 가수들의 있었답니다. 남자로써는 배호, 남진, 나훈아요, 여자가수로는 단연 이미자였답니다. 쎄시봉으로 표현되는 통기타그룹들의 쑈는 기껏해야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시민회관이나 대학교 강당에서 있었을 뿐이지만, 남진 나훈아 이미자쑈 등은 동네 곧곧 삼류영화관에 이르기까지 휩쓸고 다녔답니다. 물론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만당사례(滿堂謝禮)” 깃발이 나부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답니다.
나훈아의 고향역과 남진의 님과 함께에 자지러지던 시대였답니다. 유행은 변하게 마련이고, 기억도 자기 좋을대로 생각해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이지요.
이즈음 오십대 후반에서 칠십대에 이르는 세대를 제대로 알려면 지나간 세월을 자기식으로 기억할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로 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유행가로는 그렇고요, 교회 찬송가도 마찬가지랍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기타 반주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는 일은 매우 불경한 일로 치부되곤 하였답니다. 하물며 전자악기를 교회에서 본다는 일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이 점은 최근세사 한국교회에만 가진 경험이 아니랍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에서 피아노가 허락된 것이 고작 200여년이 지났을 뿐이랍니다. 피아노는 경망스럽다고 올갠만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찬송 역시 유행은 세월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나훈아를 좋아하든 남진을 좋아하든 쎄시봉 가수들을 좋아하든 그 모두를 좋아하든 다 개인의 취향에 따른 일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다름과 취향의 차이에 대고 시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들를 종종 볼 수가 있답니다.
교회 찬송도 마찬가지랍니다. 전자악기 반주에 손뼉치고 목청높여 할렐루야를 외쳐야 좋은 사람들도 있거니와 그저 조용히 흥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맘 한구석이 아려오거나 평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인 것이지요. 강요하며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은 이천 여년 전에 이미 바울이 결론을 낸 일이기도 하답니다. 다음은 바울이 한 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읍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읍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읍니다.”(고린도 전서 14:15),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에베소서 5:19)
모든 장르 다 좋고, 악을 써도 좋고 조용히 음미해도 좋고 어떻게든 찬양하는 것은 다 좋은데 “진정한 마음’으로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유행가는 진정한 마음조차 변한답니다. 세월따라 진정함을 느끼는 대상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나훈아의 고향역, 남진의 님과 함께, 트윈폴리오의 하얀손수건을 들었던 제 이십대와 지금의 느낌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 고백으로써 올리는 찬양의 진정성은 변함없이 한결같다, 아니 한결 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책이 바로 성서의 시편입니다.
우리말로는 중국어 번역을 따라 시모음집이라는 내용으로 시편이 되었지만, 영어 Psalms와 원래적 의미는 찬양 모음집이라는 게 더욱 가까울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찾아 가면서 읽고 생각해 본 성서들은 주로 율법, 역사, 예언서들이었던 것에 반해 시편은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는 개인 또는 공동체가 겪는 삶을 통해 느낀 감정들을 찬양으로 만든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복되게 잘 사는 일, 공동체적으로는 더불어 함께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분명한 목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현실적인 삶에서 개인적으로는 고통, 아픔, 실패, 좌절 등이 끊이지 않고 공동체적으로는 불의와 불공평과 불안이 결코 그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 연속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나은 삶,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매진해 나가는 모습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찬양들입니다.
시편에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노래, 예배 의식을 위한 노래, 축복의 노래, 교훈과 명상의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탄식과 탄원을 올리는 노래들이 제일 많은 까닭은 바로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올리는 찬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질병, 마음의 아픔, 정치 사회적으로 받는 각종 차별과 억압 등의 고통들이 결코 그치지 않는 “오늘”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읽는 개인이나 묵상하는 공동체나 어떤 정형을 찾기보다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나 공동체를 대입시켜 읽고 묵상하는 방법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다만 시편의 편집 과정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편집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시편 역시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다윗과 그의 시대에 살았던 성전 예배 집례자들(성가대)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믿었답니다. 19세기 들어 시편은 포로기 이후부터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서야 완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옵니다. 20세기 들어서 많은 학문적 업적들이 이루어졌는데 이즈음의 학문적 대세는 다윗시대의 노래를 포함하여 주로 포로기 전후시대에 이루어진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형태의 시편이 만들어진 것은 마케베오 시대 이전인 기원전 약 200여년 경으로 추정을 하고 있고요.
시편 전체는 5권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는 토라 곧 모세오경의 다섯이라는 숫자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1권(1-41편)은 인간의 행복, 타락, 및 회복에 대한 내용이고, 제2권(42-72편)은 이스라엘의 파멸과 구속(救贖)에 대한 내용이고, 제3권(73-89편)은 성전 중심의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4권(90-106편)은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5권(107-150편)은 말씀 중심의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주제와 내용에 맞추어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로는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1862 – 1932)과 그의 제자인 모빙켈 (S. Mowinckel, 1884 -1965)을 꼽는답니다.
궁켈은 시편을 찬송시, 대관식의 시, 민족 탄식시, 제왕의 시, 개인의 탄식시, 개인의 감사시 이렇게 여섯가지 주제로 나눈답니다.
그는 개인적인 성격의 탄식과 애원이 들어있는 유형의 시가 시편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속하는 시들을 다음과 같이 꼽고 있습니다.
제1권 3,5, 6, 7, ,13, 17, 22, 25, 26, 27:1-14, 28, 31, 35,38,39
제2권 42, 43, 51, 54, 55, 57, 59. 61, 63, 64, 69, 70, 71
제3권 86, 88
제4권 102
제5권 109, 120, 130, 140, 141
모두 40편에 달하는 이 시들은 모두 어떤 절박한 상황 아래 놓인 자신의 처지와 아픔들을 토로하며 구원을 기다리는데, 그 기다림은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으며 반드시 감사가 뒤따르는 것들입니다.
시편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접고, 지혜운동의 결과물들인 지혜문학서들(잠언, 전도서, 욥기, 아가 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