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 중간사 6

(당신의 천국 – 일흔 한 번 째 이야기) 

셀류코스가 죽고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가 그 왕위를 계승했을 때에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수단으로 대사제직을 손에 넣었다.   야손은 왕을 알현하고 은 삼백 육십 달란트와 또 다른 수입원에서 팔십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왕이 자기에게 경기장을 건축할 권한과 청년훈련소를 세울 권한과 예루살렘에 안티오쿠스 청년단을 결성할 권한을 준다면 백 오십 달란트를 더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왕은 이것을 승낙하였다. 야손은 왕의 승낙을 받아 직권을 쥐자마자 자기 동족들의 생활을 그리이스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 마케베오 하 4 : 7 – 11, 공동번역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식민지배가 이어오는 동안 유대인들이 식민지배를 참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정통치권을 인정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 의식과 전통을 인정한 식민지배 제국과 적절한 타협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셀류커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신앙과 전통이 깡그리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리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자리로 변하였고,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은 그리스 제우스 신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조차 그리스 이름인 안티오키아라고 바꾸려하는 움직임까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의 전통들과 신앙은 모두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철저히 헬라문화를 받아드리는 것만이 팔레스타인과 유다가 선진화 되는 길이라는 강요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헬라문명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고 유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자에게는 죽음이 대가로 따르는 강요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이하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시대의 물결을 맞이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결치는대로, 세월이 흐르는대로 그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 또는 평생 노예가 되는 길이라도 하더라도 생각없이 묻혀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지요. 

또한 그 변화에 대해 목숨 걸고 항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을 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보았지만 그 세가지도 강도의 세기와 그 길을 선택한 까닭에 따라 수많은 작은 종파들로 또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뭐 멀리 갈 것 없지요. 다가오는 새해는 갑오년(甲午年)입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갑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딱 120년되는 해입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한반도의 수많은 종파들이 있답니다. 친로, 친청, 친일, 친미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친일파 등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공산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등 다양하게 시대에 대응하는 무리들이 일어났듯이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세류커스왕조의 헬라화 정책의 전면에 나서서 유다의 전통인 야훼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완장을 찬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유대의 전통과 야훼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건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였고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아들 다섯을 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 양반이 바로 새롭게 세워지는 유다왕국의 시조가 되는 셈입니다. 

헬라신전에 머리를 조아린 동족을 때려 죽이고, 헬라 신전에 예배를 강요한 왕의 사신까지 때려 죽인 마따디아는 다섯 아들들과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함께 광야로 피신을 합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에서 게릴라전으로 항쟁을 합니다. 셀류커스의 군대를 피해 다니면서 틈을 보아가며 적군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게릴라 전술로  이름을 떨치게 되고, 그의 휘하에는 날이 갈수록  항거하는 유대인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그러데 이 무렵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이 지켜내려 했던 신앙과 전통에 대한 신념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때의 일이 마카베오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 광야로 피해 가서 숨어 살고 있다는 보고가 다윗의 성 예루살렘에 있던 (셀류커스)왕의 부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 왔다.  그래서 큰 군대가 그들을 쫓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에 다다라 맞은편에 진을 치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 이젠 그만두고 나와서 왕명에 복종하여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왕명에 굴복해서 안식일을 더럽힐 수는 없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돌을 던지거나 자기들의 피신처에 방벽을 쌓거나 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없는 우리를 죽였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적군이 안식일을 택해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처자와 가축과 함께 고스란히 죽어 갔고, 죽은 사람은 천 명이나 되었다.” – 마카베오상 2 : 31 – 38 

적군의 공격 앞에서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혀 대항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따디아는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는 맞아 싸운다는 계율을 내린답니다. 그리고 이 무렵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의 전통을 경건히 받들어 지키는 무리들이 마따디아 무리와 합세를 하게 됩니다.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무리가 바로 바리새파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Hanukkah-Dinner-1

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아들 가운데 유다 마카베오(마카비)가 그를 계승하여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마카베오 역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셀류커스의 왕 에피파네스는 처음에는 이들 세력을 우습게 보고 소수의 병력들을 보냈지만 연전연패하자 자신이 제일 신임한  최강의 군대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야간기습 전략으로 이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때는 기원전 165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이 날로 부터 여드레동안 유대인들의 축제가 연이어 벌여지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바로 하누카(Hanukkah) 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