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 귀환 4

(당신의 천국 – 예순 한 번 째 이야기)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 사무엘하 24 : 9 

병적조사한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했다.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백 십만이 있었고 유다에는 사십 칠만이 있었다.  – 역대상 21 : 5, 공동번역에서 

“하나님이 살아있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가 성서를 바르게 읽을 때는 거짓된 겸손,주저 , 냉정한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읽을 때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성서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The Strange New World within the Bible)에서 

어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신명기 역사가들과 역대기 역사가들의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다윗왕이 시행했던 병적(인구)조사를 시킨 주체에 대한 생각입니다. 

먼저 신명기 역사가의 기록을 보지요.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 사무엘하 24 : 1 

다음은 역대기 사가의 기록입니다.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였다. – 역대기상 21 : 1 

야훼 하나님께서 시킨 일이라는 고백과 사탄이 시킨 일이라는 고백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또한 인구조사를 하고 난 뒤의 결과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사가들은 남, 북 합쳐서 130만 명이라고 했고, 역대기 사가들은 남, 북 합쳐 157만으로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 이미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내 놓았고, 오늘날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동네 목사님들이 나름대로의 해석과 설명을 이어가고 있지요.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이나, 신앙의 경전인 성서를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이것 봐라! 한 가지 사실 가지고도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이란 헛된 것이다.”라는 주장의 도구로도 사용되고는 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옆길로 돌립니다.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창조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창조경제라는 게 뭔지 잘 모른답니다. 이따금 설명하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아도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 이 친구도 모르고 있구나”하는 생각 뿐이랍니다. 더더군다나 이걸 대통령이 심심치 않게 사용을 하시던데, 이 말을 만든 친구가 누군지 몰라도 참 불경하기가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랍니다. 이왕 만들고 알려 주려면 제대로 잘 알려주어서 사용하시는 나랏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할 일이거늘, 그 말을 쓰실 때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참 딱하네”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이지요. 

아무튼 그 창조경제라는 소리에 창조과학이라는 말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이란 한마디로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부터 모든 이야기들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거니와 과학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생긴 신흥종교 가운데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이 만든 제7일 안식교의 교인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라는 이가 쓴 책(새로운 지질학 The New Geology)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답니다. 

제가 여기 미국에서 사반세기 넘게 살아봐서 잘 아는데요, 이 땅에 또라이(乭아이)들 정말 많답니다. 1960대에는 이 창조과학에 빠진 사람들이 꽤 많았고요, 한 때는 창조과학이론으로 학교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운동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미국 국립 과학원(United State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이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Creation science is in fact not science.”라고 규정하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바꾸어가며 이 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지금도 많답니다. 

그런데 또라이들이 여기만 있겠어요. 혹시라도 “미국서 한다더라…”라는 소리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에서도 자칭 과학자, 목사라는 양반들이 한국창조과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뭘 한다나하는 소리도 듣는답니다. 

저는 또라이라고 했지만 그 분들이야 그 분들 나름대로 다 신앙적 결단으로 하는 일일 터이니 그 이들 쪽에서 본다면 제가 또라이거나 사탄이겠지요. 

설혹 그네들 말마따나 지구의 나이가 성경의 역사대로 약 팔 천년 전후이고, 천지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다 기독교인들이 될까요? 종종 신앙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이들을 보면, 모든 것을 “믿씁니까? 아멘”으로 끝내고마는 단순 복종형 무조건적인 신앙과 서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른바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인들)을 제가 비난하거나 비판을 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아니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사회인데요. 물론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곳들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거나 오늘날 세상을 돌아보아도 수많은 다툼과 전쟁을 유발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무조건적이거나 편협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종교집단”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연재글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바로 성서를 하나님 뜻에 맞게 제대로 읽고 이해하자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임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일이며,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이런 서로 다른 고백에 대한 설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 일들을 통해 얻은 사람들의 생각을 기록한 책입니다. 다만 성서가 성서인 까닭은 그 기록에 관여한 사람들과 사용하는 말과 일어난 일들과 그를 통해 얻은 생각들 모두가 야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 안의 일부라는 믿음의 고백을 전재하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고 쓰여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을 말하는 사람이나 “무조건 믿씁니다. 아멘”하는 사람과 저같이 고백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고백

바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들었거나 본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떤 것이었느냐를 찾아보는 일입니다. 나아가 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런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을까? 왜 야훼 하나님은 그 때 그들에게 그렇게 일하고 계셨을까?라는 물음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해답을 찾는 일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성서는 사람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다만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기록된 것이지요. 그 신앙의 기초는 “절대”라는 말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절대로 “절대”일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서로 다른 기록이란 바로 그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지점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한계에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답니다. 우리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 사실을 볼 수가 있답니다. 

성서 기록의 다름을 그대로 보면서 다르게 기록한 당시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은 이야기가 좀 돌았습니다. 다시 역대기 사가들의 핵심 인물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및 예루살렘성 개축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