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山堂)이 산당(産黨)? –예언자 14

(당신의 천국 – 마흔 세 번 째 이야기) 

오늘은 주일(일요일)입니다. 

이 날에 대한 의미와 뜻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일요일로 표시되는 날짜 색이 평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자신들의 전통적 달력이나 일력을 사용하는 민족 이외에는 21세기에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일요일이라고 표시된 달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않아도, 오늘날 대부분 국가들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천지창조니 유대교니 기독교니 그런 것을 따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오늘날 지키는 일요일 관습을 따져 올라가 보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만나게 되고 더 올라가면 창조신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하고 이어 나가더라도 “일요일 하루는 쉬는 날”이라는 현실을 맞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일요일조차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지구상에는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요일은 쉬는날”이라는 생각과 실현은 분명 넓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라고 제가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사야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뚱딴지인가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당신은 분명 저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이야기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이야기를 바로 이어가려다, 오늘은 주일 곧 일요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한번 짚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읽고 생각해 보는 이사야 시대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무엘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계속 들을 수 있었던 말 가운데 산당(山堂)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도대체 이 산당이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의 설명은 산에 있는 제사단, 높은 곳에 있는 제사단입니다. 이건 예루살렘 성전이 마련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열 두지파가 각자 편하게 야훼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던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는 이방신과는 관계없는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후 유일신이신 야훼 하나님은 오직 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는 선언과 함께 모든 제사를 일원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성전도 이전 모습인 산당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그 산당에는 이교적 요소들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자! 산당(山堂)이란 본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단이었는데 중앙집권에 힘을 빼는 요인이 되었고 이방신들과 쉽게 결합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없앤 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일했던 히스기야왕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촛점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제가 오래 알고있는 어느 장로님께서 하셨던 이야기가 자꾸 머리 속에 생각난다는 말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정말 사람도 좋은 분이시고, 이제는 은퇴하셨지만 교회를 세우고 섬기고 하는데 정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좋은 신앙을 지닌 분이시랍니다. 대학은 자그마치 서울대학교 출신이시고, 여기 미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종으로도 오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으신 분이시랍니다. 

참 본받을 것이 많은 분이시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엔가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했답니다. “성서에 산당을 없애라고 했어요. 그거 안 없애서 심판 받았지요. 그거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공산당을 없애지 않아 우리 민족이 힘들다.” 

그 순간 저는 정말 놀랬었답니다. 정말 황망한 순간이었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이 장로님과 같은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깊히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각자 믿는 삶에 프리즘으로 보는 세상은 때론 정말 황망한 것을 믿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엉뚱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서야 후회하는…. 

이사야서를 바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를 읽는 일이고, 당신과 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은 일요일, 바로 주일입니다. 성경 한 장 같이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읽고보고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지요. 

이사야서 53장입니다. 

23HolySepulchre12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 이사야서 53장, 표준새번역 

 

기본 정신 – 예언자 13

(당신의 천국 – 마흔 두번 째 이야기) 

그(아하스 왕)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아 벤힌놈 골짜기에서 친자식들을 불살라 제물을 바쳤으며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아래서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 역대기하 28 : 3-4 

그(히스기야 왕)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 자기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마음을 다 쏟았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었다. – 역대기하 31 : 21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 중략 – 두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중략 –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이사야 1 : 11 – 17 

20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약성서 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제 일장 ‘예수의 설교(The Message of Jesus)’에서 제 일과인 ‘종말론적 설교(The Eschatological  Message)’를 시작하는 첫 문장입니다. “예수 설교의 주요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The dominant concept of Jesus’ message is the Reign of God.)”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비단 불트만의 예가 아니더라도 신약성서 복음서에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는 말이 백번도 넘게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예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오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단호하고 확실한 신앙 고백을 나누기 위해서 저는 지금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이야기 순례길에 동행하며 같은 신앙 고백을 나눌 수만 있게 된다고 하여도 이 순례길은 제게 아주 의미있고, 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믿는답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사야가 주로 활동했던 당시의 왕들 곧 아하스왕(주전 736년 – 주전 716년)과 히스기야왕(주전715년 – 주전 686년) 때의 역사적 사실들과 예언자 이사야의 당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잠시 언급했듯이 아하스왕 시절은 북쪽에서 강력한 군대를 밀고 남하하는 아시리아 세력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아하스왕의 행위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왕이 아시리아 왕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 때였다.(역대기하 28 : 16)”, “아하스는 야훼의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들을 털어 아시리아 왕들에게 바쳤으니 헛된 일이었다.(열왕기하 28 : 21) 

강국 아시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치고 사대(事大)의 길을 택했던 아하스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외세(外勢)에 대해 굴복하는 일은 정권 또는 왕조의 역사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오직 하나 뿐인 신(神)  야훼만을 모셔야하는 유다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아하스왕 당시의 야훼 신앙을 망가뜨리는 종교적 타락에 대한 성서의 기록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구들을 거두어 부수고 야훼의 성전 문들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예루살렘 모퉁이마다에 제단을 만들어 섬겼다. 또 유다의 성읍마다 산당을 세우고 남의 나라 신들에게 분향하게 하여 선조의 하나님 야휘를 진노케 하였다.(역대기하 28 : 24-25)” 

심지어 아하스왕은 이방 종교 풍습에 따라 친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역대기하 28 :3)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고 부름에 응답한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이 아하스왕 앞에 선 일입니다.(이사야서 7장) 

이사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두 번에 걸쳐 아하스왕 앞에 서서 야훼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시리아 등의 침략이나 외세에 대해 두려워 말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 믿으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시리아에게 의지합니다. 결국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해 남왕국 유다도 침공을 받아 유린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아하스왕 앞에서 전하는 두번 째 경고에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이 행해집니다.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 : 14)라는 예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어질 메시아왕국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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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승계한 사람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의로운 왕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왕의 외교노선이었던 사대노선을 버리고 독립노선을 천명합니다. 그가 반 아시리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주변 강국 사이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남하하는 아시리아를 일시 저지하는데는 당시의 남쪽 강대국인 이집트의 힘이 컷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했던 히스기야왕은  외교정치는 독립노선을 구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다시 강화합니다. 

그는 성전을 재건, 정화 시킵니다. 이교도적인 이방신들을 모두 제거, 배척하고 유일신 야훼신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복원하고 유월절 등의 전통적 절기를 복원함으로써 유다와 이스라엘 선조들과 함께 했던 야훼 신앙을 되찾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의식을 복원한 일입니다. 지방에 산재했던 산당들을 부수어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복원한 일입니다. 바로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복원시킨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히스기야왕이 야훼 하나님께 복받는 위업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 다윗 못지 않게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역대기하 29 : 2) 

그러나 히스기야왕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제사의식과 의례, 전통 등은 야훼 하나님과 선조들이 맺었던 계약에 맞게 개혁하고 복원하고 실행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예배의 정신, 제사의 본래적 목적 곧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의 기본 정신을 되찾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함께 가야하는 정신을 잃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드리는 제사는 가짜라는 예언들(이사야서 1 장, 10장 1-4절 등)입니다. 

이사야가 심판의 예언을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사야 5 : 7)” 

그리고 그런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 “지혜있는 이들이라 자처하는 자들,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 독한 술에 빠진 자들, 뇌물에 눈이 어두어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있다 하는 자들(이사야 5 : 20 -23)”이라고 선언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성전 정화와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왕국이 맞게 될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예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끝은 파국이 아닙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야서 9 : 2) 

이제 우리들이 만나 볼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