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 – 예언자 4

(당신의 천국 – 서른 세 번 째 이야기)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 에제키엘(에스겔서) 18 :23 

예후가 소리쳤다. “그 계집을 떨어뜨려라.”  내시들이 그 여자를 떨어뜨리자 피가 담벽과 말에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몸을 짓밟았다. –  열왕기하 9 : 33, 이상 공동번역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신(神)은  이 세상의 삶의 조건적인 관계들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또 그것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 John Robinson 의 책,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에서 

엘리야 이야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여자가 한 명있습니다.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입니다. 이 여자는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입니다. 아합왕이 “선대의 어느 이스라엘 왕들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속을 썩”(열왕기상 16 : 33)힌 배경에는 바로 이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북으로 왕국이 갈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된 여로보암의 죄는 성소에 야훼 제단을 쌓고 거기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일에서 시작됩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왕국 유대와 달라야 한다는 신생국가로써 내세워야 할 국가적 모델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야훼를 섬기지만 남왕국 예루살렘과 다른 형태의 제사 방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죄를 쌓게 된 배경입니다. 

여로보암 이후의 왕들인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에서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아합왕 때에 이르러 야훼는 철저히 버려지고  이세벨의 신인 바알이 나라의 신으로 섬겨지게 됩니다.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사당이 들어선 것입니다. 또한 아세라신의 목상도 만들어 세워 섬겼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이고, 갈멜산에서 일 대 850 싸움까지 겪게되고 바알신을 섬기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는 일대 숙청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뒷심은 바로 야훼만이 하나님이라는 백성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 이후 목숨줄 연명하고자 도망친 쪽은 아합왕이 아니고 엘리야였습니다. 

여전히 권력은 이세벨과 아합의 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죽이고야 말리라”는 이세벨의 다짐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 : 2) 

엘리야가 느닷없이 아합왕 앞에 나타나 몇 년 동안 비는커녕 이슬 한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며 뚱단지 같은 소리를 전할 때 아합왕 입장에서는 “이런 미친 놈!”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삼년 이상 비 한방울, 이슬 한방울도 내리지 않는 가뭄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내기를 받아주고 내기에서 졌습니다. 그 내기가 끝난 후 기적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백성들의 환호속에 바알신을 섬기던 예언자들의 일대 숙청도 일어났습니다. 

보통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쯤 엘리야가 맞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세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하여 엘리야를 죽이려 나섭니다. 

이쯤 두가지를생각하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세벨의 생각과 엘리야의 행동입니다. 

첫째는 이세벨이 정말로 비정상적이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물론 성서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상적으로 야훼 하나님께 도전을 한 것입니다. 아니 야훼 하나님과 엘리야를 따로 떼어 놓고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세벨의 생각과 행동이야말로 권력이나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오늘이라는 현실속에서 이세벨의 생각과 행동이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닐까? 

두번 째는 엘리야가 느낀 두려움과 그가 선택한 도망질입니다. 그가 이제껏 보여 준 자신감과 야훼의 대변자로서 보여준 준엄함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 이긴 싸움인데 무엇이 그리 겁이 나 도망을 쳤을까? 그러나… 

혹시 엘리야의 생각이나 행동이야말로 진실과 현실적 힘 앞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참 모습은 아닐까?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구태여 목숨까지 걸 이유가 있을까? 

갈멜산에서의 싸움과 달리 바로 이 싯점에서의 승리자는 이세벨이었고 도망자는 엘리야였습니다. 

이세벨은 그 뒤로 거침없는 행보를 합니다. 나봇이라는 평민의 포도원을 뺏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도원의 주인 나봇을 돌로 쳐 죽입니다. 갈 때까지 나아가는 권력과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도망길에서 두려워 떨다가 야훼(천사)의 도움으로 호렙산에 들어가고 그 곳에서 야훼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야훼에게 “돌아가라 ”명령을 받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5절에 나오는 야훼의 명령인 “돌아가라”는 명령형 동사의 뜻에는 “회개하라”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야훼의 예언과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를 점지받고, 아합왕 이후의 일들에 대한 예언을 박습니다. 이세벨의 죽음에 대한 예언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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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에 대한 예언은 이렇습니다.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자리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세월이 흘러 아합왕은 죽고, 그를 이어 아하지야, 여호람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 때 까지도 이세벨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바알신도 여전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엘리야는 자신이 떠날 시점을 알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후 그를 이은 엘리사가  일으킨 많은 기적 이야기들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성서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 중 예수 다음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켜낸 사사(판관)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명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 장군이 이즈음 말로 하면 구테타를 일으켜 성공을 합니다. 군사혁명을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조가 바뀌는 것입니다. 

북왕국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많은 피를 흘려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예후왕입니다. 예후는 바알신을 모셨던 이들을 모두 죽여 없앴습니다. 왕 여호람을 비롯하여, 바알사당을 사마리아에 세웠던 아합왕의 후손들 모두를 죽여 없앴습니다. 이세벨도 이 때 죽음을 면치 못했고, 그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개밥이 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에제키엘)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회개하는 인간을 기다리시는 모습”입니다.  엘리야와 이세벨의 모습을 통해 “회개하는 인간을 기다리는” 야훼 앞에서 응답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와 엘리사의 뒤를 따르는 예언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가려 합니다. 이른바 4대선지자와 12소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시대별 순서로 다루려고 합니다.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 그리고 우리들의 천국의 모습들을 알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