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마흔 일곱 번 재 이야기)
왕은 또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베델에 세웠던 산당과 제단도 허물고 돌들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으며 아세라 목상은 태워 버렸다. – 열왕기하 23 : 15
야훼께서 오실 무서운 날이 다가 왔다. 득달같이 다가 왔다. 야훼께서 오실 날, 역마보다 날쌔게 오는구나. 군인보다도 잽싸게 닥치는구나. 그 날은 야훼의 분노가 터지는 날, 모두들 죽도록 고생하는 날, 폭풍에 휩쓸려 가는 날, 먹구름이 뒤덮이는 어두운 날, 나팔소리 울리며 함성이 터지는 날이다. – 스바냐 1 : 14 –16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읍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읍니다.” – 하박국 1 : 2 – 4, 이상 공동번역
스물 네 살에 비명횡사를 한 아버지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요시야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습니다. 혹시 여덟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 없으신지요?
조선시대 제 6대왕이었던 단종이 왕세손에 오른 나이가 여덟 살 때 였답니다. 아버지 문종이 임금노릇 한 지 이년이 조금 넘어 병으로 죽자 당시 왕세자였던 단종이 임금이 됩니다. 그의 나이 열 두살 때의 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 단종은 아주 영민하고 똑똑하여 할아버지 세종 임금의 사랑을 둠뿍 받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삼촌인 수양대군의 권력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열 일곱 살에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이른바 단종애사 이야기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덟 살에 즉위했을 당시의 일이 성서 열왕기하 2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몬왕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궁에서 죽였다. 그러나 지방민들이 반란자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왕자 요시아를 왕으로 모셔 대를 잇게 하였다.”
역대기에서는 “맞아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상황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방민들이 그 반란자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요시야를 왕위에 올렸다는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과연 “지방민들”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번역본들에는 “땅의 백성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답니다. 영어번역본 중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에는 “the people of Judah” 곧 유다의 백성들이라고 번역해 놓았답니다.
여기서 사용한 “땅의 백성들” – 히브리말로 “암하렛츠(‛am ha·’a´rets)”라는 말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요시야왕은 지방민들 또는 땅의 백성들(암하렛츠)이라고 부르는 지원 세력에 의해 임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단종애사처럼 쉽게 왕위를 내주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이 성군이었던데 반해, 요시야왕은 그의 증조 할아버지 히스기야왕이 다윗에 버금가는 임금이었습니다. 증조 할아버지를 빼닮은 요시야 역시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듬북 받은 임금이 됩니다.
솔로몬 이후 남북 왕국으로 갈린 뒤 남, 북 왕국에 많은 임금들이 있었지만 단 두 사람만을 성서는 제대로 된 왕노릇을 한 임금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와 그의 증손인 요시야입니다.
요시야왕이 막 왕위에 오르고 아직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 모를 때 예언을 했던 사람은 스바냐입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요시야왕이 아직 자신의 꿈을 펼치기 전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바냐의 족보를 보면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히스기야였습니다. 요시야왕과는 한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유다는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고, 정치 지도자들은 강대국들을 등에 업고 속임수로 백성들을 쥐어 짜고 있었으며, 거짓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야훼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고, 판사들은 늑대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다의 운명은 벌을 받는 일만 남았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스바냐의 예언이 이어지던 때 요시야가 성년이 되어 그의 꿈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요시야는 대대적인 성전 정화 작업과 이방 신앙과 우상들을 척결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이 작업 과정에서 성전 안에 있던 야훼 하나님의 법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와 야훼 하나님과 맺었던 계약법전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법전의 발견으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은 강한 힘을 얻어 박차를 가합니다.
그가 실행했던 종교개혁의 상세한 내용들은 열왕기하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이방신들과 미신, 가짜 사제들이 판을 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성적 문란 등의 사회상도 잘 알 수가 있답니다.
요시야왕이 이런 강력한 종교개혁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국제적 상황이 크게 한 몫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가 내분에 휩싸여 멸망의 길로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고, 강국들인 바벨론과 이집트, 그리고 훗날 페르시아가 되는 메데 등등 주변 강국들은 아직 아시리아의 정황을 살피며 움추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강력한 외부의 적들의 힘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요시야의 국내 종교개혁 정책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미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한 옛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 지경까지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손길이 뻗쳤다는 것입니다.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가장 큰 세력 형성을 한 임금이 바로 요시야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는 요시야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훼의 눈에 들게 바른 정치를 폈다. 모든 일에 태조 다윗을 본받아 한 발짝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
그러나 요시야왕의 불꽃같던 위대한 업적은 단명(短命)하였습니다. 국제 정세가 급격히 바뀌어 갔기 때문입니다. 아시리아의 세가 위축되면서 남쪽의 이집트 세력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요시야가 이집트 왕 느고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활에 맞아 죽으면서 유다의 몰락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성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나쎄가 저지른 죄 때문에 정해진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하바국의 예언처럼 이미 정의가 짓밟혀진 나라의 죄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나훔, 스바냐, 하박국 예언자들의 예언서들을 읽으시면서 우리들의 머리 속에 꼭 담아 두고 가야할 것이 있답니다.
성서가 누누히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이런 예언자들 말고 숱한 예언자들이 있었고, 대다수의 가짜 예언자들은 당시 유다왕국은 잘 나가고 있고 잘 나갈 것이라는 예언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성서에 기록을 남긴 예언자들은 “곧 다가올 심판”이 “가까웠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당대나 그 다음 대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비단 야훼의 심판 뿐만이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 역시 당대, 또는 다음 세대들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현실적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에 대한 역사적 또는 신앙적 경험이 그대로 후대들에게 넘겨져 전해지는 그 연장선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 두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레미아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