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 예언자 15

(당신의 천국 – 마흔 네 번 째 이야기)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뽑아 놓고 버리겠느냐?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너에게 서슬이 푸르게 달려들던 자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게되고,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 중략 –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 준다. –이사야 41 : 9 -13, 공동번역 

신약은 구약을 전제로 하고 복음을 율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구약에 구현되어 있는 이 율법은 결코 구체적인 구약성서일 필요는 없다. 복음을 위한 선이해(先理解)가 구약에서 자라났지만, 신적 율법이 역사적으로 달리 구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이해가 자라날 수 있다.  – 루돒프 불트만의 ‘신앙과 이해’에서 

종종 쓰거나 듣게 되는 말 가운데 “생각이 바뀌면 달라진다’는 말이 있지요. 똑같은 하루인데도 바라보는 생각을 바꾸어 보면 아주 다른 일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일컬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 ‘발상의 전환’의 상징인 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기원후 1473  – 1543)랍니다. 획기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지요. 바로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로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주장한 사람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기원후 1564 – 1642)입니다.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정작 이 말은 그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랍니다. 

갈릴레오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었지요.  그의 주장, 곧 “지구가 돈다”는 주장으로 교황청의 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 재판정에서 그는 그의 주장을 꺾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을 나오다 한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라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의 교황청만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을 정죄 했을까요? 개신교의 시조로 알려진 루터 역시 갈릴레오를 정죄하였답니다. 그가 갈릴레오를 정죄한 까닭은 교황청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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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갈릴레오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된다고 말한 근거는 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에 있는 “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어 섰다.  – 중략 –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 성서는 일점 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 –이 그 정죄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지동설 곧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교황청 및 교회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었고, 중세 유럽을 무너뜨리고 르네쌍스 시대를  여는 인류사의 일대 전환의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세상을 주도해 오던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의 실세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근간을 흔드는 “이단”이었던 셈입니다. 

이쯤 우리들이 살고있는 2013년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지동설은 과학적 진리이지요. 그렇다고 중세의 교회가 걱정했던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사라지기는 커녕 야훼(여호와) 하나님의 세상은 더욱 넓어졌지요.  – 제가 오늘 처음으로 야훼(여호와)라는 표기를 했습니다. 요것도 기억해 두시기를- 

사람들의 생각이 커갈수록 더 큰 야훼 하나님 곧 본래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쯤해서 제가 하고싶은 질문을 드립니다. 이사야서는 누가 썻을까요? 

혹시 제1이사야서, 제2 이사야서, 제3 이사야서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들어보셨다면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갈릴레오 이후로 성서의 무오설에 대해 마구 도전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서 300년 전의 일이랍니다. 

이사야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랍니다.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그것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거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답니다. 18세기 말엽에 이사야서는 최소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쓴 책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 개의 다른 저자 그룹들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서 66장 가운데 1장에서 39장까지를 제1 이사야, 40장에서 55장을 제2 이사야,  56장에서 66장까지를 제 3 이사야로 부르는 까닭입니다. 

그 이후로 이사야서 뿐만 아니라 성서의 모든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18세기 이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또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성서무오설이 무너지고 다양한 성서 연구 방법론들이 나오고, 19세기 이후부터는 고고학의 자료들이 마구 발굴되면서 이제껏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 오던 믿음들이 무너지거나 오히려 확고히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답니다. 

수년천 사람들이 믿어왔던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야훼 하나님의 역사와 그가 일하시는 지경이 넓혀졌듯이,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고 여러 연구 방법들로 인해 성서가 해부될수록 야훼 하나님으 역사와 그 지경이 또한 넓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시작으로하여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연구하고, 허와 실을 가려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히 그리 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성서를 믿음의 눈으로 읽고자 하는 이들도 이런 흐름 또는 사조, 연구에 대해 귀를 활짝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렇게 열린 시각으로 야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 더 큰 야훼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 그걸 의심하면 믿는 게 아니다.”라는 18세기 이전의 옛날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씀이고요, 저 위에서 제가 인용한 불트만의 말처럼 그 어떤 사람들의 경험들을 예로 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 구원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메시아왕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이런 이해는 먼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곧 나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그걸 깨우치기 위해 신이 내리는 기적들 역시 신이신 야훼 입장에서 보면 필요없는 일이지만 나나 당신의 입장 곧 사람에 입장에서는 때론 절실한 것이지요. 

성서를 합리적인 사고와 믿는 마음이라는 크게 열린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랍니다. 

이제 이사야의 메시아 복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