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장(殉葬) – 왕국 2

(당신의 천국 – 열 여덟번 째 이야기) 

그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 날에 야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상 8 : 18, 공동번역) 

이스라엘 부족들이 왕을 세우게 해달고 조르자, 내키지 않았지만 그 청을 들어 주기로 한 야훼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부족들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시도를 해 봅니다. 

사무엘상 8장 10절에서 18절 사이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왕을 세우겠다면 그렇게 하기는 하겠다만, 너희가 세울 왕들이 도대체 어떤 일들을 할 것인지를 알기나 하느냐? 내가 미리 말해주마! 너희가 세운 왕들은 너희와 자손들에게 병역의 의무, 노역의 의무 등을 부과할 것이고, 비록 지금 네 소유인 것도 왕이나 주변 권력이 원하면 마음대로 빼앗아 가기도 할 것이고, 심지어 너희들을 종으로 삼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또한 이제껏 나 야훼가 만든 법률인 율법에 따라 거두어 들인 너희 소득의 십분의 일과는  아주 다른 십분의 일세가 부과될 것이고, 이제껏 레위족속과 너희 부족들의 평등한 복지에 쓰여졌던 그 돈들은 왕과 그 주변의 배속 채우는 일에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이 일 곧 왕을 세우는 일로 너희와 제 자손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지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마지막 충고였지요. 그러나 끝내 이스라엘 부족은 이런 야훼의 마지막 충고를 외면하고 고집을 피어 마침내 왕을 세우게 됩니다. 

자!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답니다. 

애굽에서 탈출했던 히브리족들의 기억 속에는 분명 애굽 곧 이집트의 왕들의 모습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고향 땅 우르에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왕들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가나안 땅에 먼저 뿌리 내리고 살던 부족들의 모습에서도 많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왕에 대한 모습입니다. 

우리로 치면 단군이나 일본, 몽골 등의 왕의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답니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전설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거의 맥락에 있어서는 같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고대의 왕들은 곧 신(神)과 동일한 위치에 있거나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답니다. 

‘단군’이라는 말의 어원을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당골’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지요. 바로 무당 곧 신과 사람과의 중개자라는 뜻이지요. 

고대의 왕들은 신 또는 신을 대행하는 사람이었답니다. 이게 뭔 말이냐하면 “왕 마음대로 자기 지경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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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언론에 등장한 말 가운데 하나가 “순장(殉葬)”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제가 언제부터인지는 따져 보지는 않았지만 얼추 노무현 아니면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서 부터 퇴임 대통령 이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이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순장조”라는 말로 말입니다. 

저는 전두환 치세 말기에 이민을 와서 솔직히 잘 모릅니다만, 특히나 인터넷이라는 희대의 물건이 뜨기 전까지, 아니 제게 생활화되기까지 전두환 말기부터 김대중 대통령 퇴임 무렵까지 한국 신문을 거의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 기간에 대해서는 어둡답니다. 뭐 그 때 그랬다는 말이지요. 이제는 알고자 노력만 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이즈음 제가 보고 있는 신문 또는 잡지를 들면 조선, 동아, 중앙, 경향, 한겨레, 오마이, 뉴스타파, 국민 TV 등등의 한국 매체에서 부터, Washington Post, New York Times, The Times를 비롯한 미국내 지역 신문들까지마음 먹고 시간 나면 아무데나 수시로 들어가 볼 수가 있답니다. 

그런데 2013년 현재 한국 언론은 정말 문제라는 생각이랍니다.  두 가지입니다. 

참 똑똑한 젊은 이들이 취재를 할 것이고, 오랜 경험이 있는 데스크가 판단들을 하겠지만, 돈에 너무 매어 있다는 것이 첫 번 째이고, 그러다보니 쓰는 언어나 보도 태도들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점입니다. ‘순장’이라는 말의 사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 오지요. ‘순장’이란 왕이나 그 주변의 권력자가 죽었을 때 그 죽은 이의 재산인 사람이나 동물들을 산 채로 또는 죽여서 함께 묻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부족들이 왕을 세울 무렵 왕권국가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일어났던 일이고, 세계사로 보자면 약 오 륙 백년 전까지 남아 있던 풍습이랍니다. 왕의 절대 권력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부족에게 경고했던 것보다 훨씬 사나웠다는 사실입니다. 

탈애굽 40년과 사사(판관)시대 약 200년 동안 이스라엘 부족 동맹은 신정체제 곧 신이 직접 다스리는 시대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등함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꾸어 왔고, 그것이 가나안 세상이라는 자기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오랜 동안 겼었던 노예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 두어 세대를 지나면서 야훼에 대한 믿음과 조상들의 경험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런 징조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서 17절의 기록에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무엘의 스승 엘리사제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그 권력을 마구 사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사무엘상 8장 1절 이하에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돈을 받고 재판을 하거나 행정을 보는 뇌물수수죄를 범하고 있다거나 사무엘상 22장 1, 2 절에 다윗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면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 밖의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평등한 가나안의 꿈은 사라진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첫 징후이자 모습이라고 제가 말씀드렸던 평등한 세상으로써의 하나님 나라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인 사울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한가지는 짚어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운 역사적 사실, 고백들과 다른 민족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아주 큰 차이 두가지입니다. 

첫째 고대 왕국 시조왕들은 대부분이 왕이 내려와 백성을 다스리거나 백성들이 원하는 것들을 먼저 알아서 해 주었기에 왕이 되었다(중국의 예)는 설화들을 지닌 반면 이스라엘은 백성들이 원해서 그리 되었다는 점이고요. 

두번 째는 고대 왕국의 왕들은 대개 신의 반열과 동일시 되거나 중개자의 모습이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철저히 야훼 신 앞에서는 백성들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신의 양보 – 왕국 1

(당신의 천국 – 열 일곱 번 째 이야기) 

요담의 우화(寓話) – 판관(사사)기 9장 8-15절에 있는 – 는, 임금 곧 왕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업적도 이루지 못하는 직업으로써,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런 자리를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의 체제 곧 왕정은 항상 폭군적 성격을 띤다고 가시덤불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한다.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의 구약성서의 인간학에서) 

한민족의 첫 임금은 단군입니다. 잘 알다시피 단군은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곰에서 처녀가 된 웅녀 사이에서 나온 임금입니다. 이름하여 단군신화입니다. 

이런 첫 임금 설화는 한민족에게만 전해 지는 것은 아니지요. 고대 국가의 첫 임금들은 대부분 하늘, 태양, 달, 별 등 자연과 연계된 신화들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은 시작을 왕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좀 다르지요. 

성서는 왕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 이야기(제가 글을 시작하면서 창세기부터 하지 않았답니다. 창세기는 나중에 요한 계시록 이야기 할 때 함께 하려고 합니다.)부터 시작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모세 이야기를 풀어 내고, 가나안 정복 후, 그것도 약 이백년이 지나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왕국을 이루던 그 시기에는 주변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왕권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요. 

마침내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 왕국으로 들어서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책이 바로 사무엘서입니다. 

사무엘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판관(사사)기의 두 곳 기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답니다. 

한 곳은 사사(판관)기의 마지막인 21장 25절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저 위에서 소개드린  9장 8-15절에 있는 요담의 우화입니다. 우화의 내용입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 보시길) 

나무들이 모여서 왕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나무들은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 들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청을 합니다. 이 나무들은 모두 다른 나무들이 왕이 되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나무같은 나무들에게 청을 거절 당한 나머지 나무들이 정말 나무같지 않은  가시나무에게 청을했더니 그 가시나무가 덥썩 그 청을 받아드리면서 공갈 협박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왕이란 이런 것이라는 왕에 대한 히브리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왕은 야훼 하나님일 뿐이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마지막 절에는 왕이 없어서 제멋대로 하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이제 왕을 세우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 위안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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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사무엘상 1장에서 12장 까지를 보시면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왕이 즉위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답니다.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읽어 보시기를 권하면서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천국을 찾기 위한 핵심이라는 제 생각이랍니다. 

첫째는 사무엘상 8장 7절에서 9절의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내리는 계시입니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려 내 온 이후 이 날 이 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 주어라.” 

이렇게 마지못해 내리는 야훼 하나님의 양보에 의해 사울왕이라는 첫 임금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사무엘서 4장에서 7장까지로 이어지는 블레셋이라는 외부의 적 이야기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일반적인 합리적 사고로 따지더라도 이 블레셋이라는 외부 세력의 침략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게 된 직접적 동인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열 두 부족 동맹국이었으니 말입니다. 동맹국이라는 게 다 그런거 아니겠어요. 서로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관계 말이지요. 

강력한 적 앞에서 강력하게 뭉칠 힘이 필요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부족들이 느끼는 절실한 현실적 요구에 야훼 하나님이 응답은 하시되 정말 마뜩지 않은 응답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 니들이 왕을 세울려면 세워라. 할 수 없다. 다만 이 것만은 명심해라.”라는 조건과 함께 말입니다. 

그  명심해야만 하는 조건들이란 사실 인간들이 지키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랍니다. 구약 야훼의 역사관인 신명기적 역사관으로 본다면 인류 역사란 바로 그 감당하기 어려운 신과의 약속을 더 많이 이루려 애쓰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시작은 야훼 하나님께서 그리 마뜩찮게 생각한 역사의 시작이랍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은 그렇게 시작된 약 사백년의 왕국 역사 가운데 통일 왕국이었던 약 백년 동안의 이야기 곧  사울, 다윗, 솔로몬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과연 이들 시대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천국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입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2 – 니가 뭔데?

“네깐 놈이 뭔데?” 또는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받아 보셨거나, 스스로에게 던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거나, 누군가 당신의 등 뒤에서 한 말을 듣지 못했을 뿐이라는 강변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보통 일반적 수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니가 뭔데?”, “내가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일 수도 있고, 어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나 손해를 입게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피하려 할 때 사용하기도 하지요. 

누군가가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질문한 사람의 생각에 비추어 제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럴 경우 대처하는 방법들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성격과 그 상황에 따라 아주 여러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있겠고, 다툼이 일 수도 있겠거니와 제 삼자를 끌어 들일 수도 있을겝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 겪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조금 크기를 넓혀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이 말은 내가 속한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헌법과 법률 및 자연법 곧 사람답게 살 권리 보장법 아래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다른사람과 똑같이 법과 제도 아래서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또한 국가라는 시민의 합의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에게  “니가 뭔데?”라는 질문이 마구 돌아다니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도 있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루고자하는 평등의 의미지요.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백성이 아니라, 법과 제도 아래서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시민들이 모인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겠지요. 

그런데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민보다는 백성이 훨씬 편한 일이고, 다스림을 받는 게 편한 사람들 역시 늘 있게 마련이고요. 그냥 그렇게 나누어져서 살면 좋겠지만 또 시민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지요. 그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들과 시민이고자 하는 자들의 다툼이 있게되는 것이고 그런 일들이 연속되면서 역사가 이루어 진 것이지요. 

당연히 역사는 백성에서 시민들이 늘어가는 쪽으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가겠지요. 

그런데 점점 돈의 권력이라는 힘이 세어지고, 시민으로서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거나 단기간에 백성에서 시민으로 바뀐 곳에서는 그 시민 앞에 수식어가 붙게 되는 것이지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말입니다. 물론 불행한 사회이지요. 

이제 “니가 뭔데?”의 크기를 조금 더 넓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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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바로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는 제 이야기 앞에 던져진  “니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간단 명료한 답이랍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 말을 “성서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로 대체 하면서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계속되는 제 이야기 속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Layman 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뜻은 “이제 막 시작한” , “아주 초보적이어서 잘 모르는”의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아마츄어 곧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고요. 

성서연구방법론으로 유명한 한스 베버(Hans R Weber)의 말입니다. “종종 성직자들은 자기들만의 교회의 목회를 수행하려고 한다. 또한 평신도들은 그들의 목회를 한 사람 –성직자-에게 맡겨 버린다. 이 한 사람의 독무대(one man show)는 철저히 비성서적이다.”(‘Salty Christians-소금 노릇하는 기독인들’에서) 

교회안에서나, 신심이 돈독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목회자나 성직자는 말씀을 먹여 주는 사람이고, 평신도는 먹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주 잘못된 일이랍니다.

이제 연재되는 제 이야기로 돌아가려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왕조 시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혹시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나 새롭게 성서를 알려고 다시 읽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저 나름대로의 성서 읽기 방법을 소개 드립니다. 그냥 제 경험과  아주 오래 전에 성서 스타디 그룹들을 이끌 때 유용했던 방법이기에 소개 드립니다. 

우선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죽 읽는 것입니다.  그냥 창세기 첫 글자인 “태”에서 계시록 마지막 “멘”까지 죽 읽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역본을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성서 한글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런 선입관도 갖지 마시고 자신이 읽게에 편한 번역본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야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한글 세대들에게 읽기 적합한 번역본은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번역 개정판일 것입니다. 그렇게 성서를 새롭게 읽는 기회가 되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제 이 글쓰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냥 죽 쓰고 올리기 때문에 때때로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들도 있고, 맞춤법에 틀린 말들도 있어 읽기에 좀 불편하실 때도 있습니다. 일단 전체 이야기를 다 마친 후 교정을 보도록 할 것입니다. (현재 생각으로는 백 번 째 이야기 정도에서 마치려 합니다.) 

자! 이제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한 수 접고 이스라엘 왕을 세우게 되는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1

사사시대 이야기를 마치고 이스라엘이 국가가 되고 왕을 세우는 왕권시대와  예언자 시대 이야기로 넘어가려다 잠시 쉬다 가려고 합니다. 

성서 사사(판관)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끼어 있는 룻기 역시 쉬어가는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뭐 성서 그러면 신구약 합본책을 말하고 어디에서나 보려고만 한다면 쉽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만, 옛날 한 세기 이전에 한국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성서라야 중국 성서를 번역한 마태, 마가 등의 신약성서 낱권이었답니다. 번역 출간된 순서대로지요. 

딱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소형 책으로 편집된 신약성서로 처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첫 페이지를 넘겨서 읽는 마태복음은 아주 낯설게 다가 온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답니다. 족보 이야기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되는 족보 이야기 말입니다. 

룻기는 바로 그 족보 이야기 가운데 하나랍니다. 누구의 족보냐하면 이제 왕권시대의 주인공이자 유태인들의 메시아 원형이 되는 다윗의 것이지요.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랍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바로 예수와 다윗 그 윗대로 아브라함과 연계되는 핏줄을 밝히는 것이랍니다. 

이건 단지 제 생각일런지 모르지만 그 족보 이야기 별로 중요하진 않고요, 그게 사실 이건 아니건 그건 더더구나 중요하지 않고요. 왜 그렇게 연결이 되어져야만 했을까하는 물음은 아주 타당하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한답니다. 

자!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마태복음 이야기할 때 드리기로 하고요. 오늘은 저도 좀 쉬어가려고 한답니다. 

제 이야기의 주제인 당신의 천국 –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잠시 쉬고요. 도대체 제가 왜 이런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제 정신의 족보 이야기를 좀 드리려고 한답니다. 

그러므로 제 연재 글을 읽다가 지치신 분들도 잠시 쉬어 간다는 생각으로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좋답니다. 

벌써 오륙년 전 쯤의 일이 되었습니다만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뜬 후 그녀가 남긴 기록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가 오랜  기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었다는 뉴스들이 Time지를 비롯해 회자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사는 인근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는 어느  한인 일간지에 지역에서 제법 이름난 규모있는 교회 목사의 컬럼이 실렸답니다. 내용인즉은 마더 테레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까닭은 그녀가 성서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답니다. 

화장실에 앉아서 볼 일보다 그 컬럼을 읽고는 “쯔쯔쯔”하는 생각에 그 컬럼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게제시킨 적이 있답니다.(제가 시켰다고 표현한 것은 당시 그 신문에 조금 관여를 했었기에)  

Mother-Teresa-1981.07.09

제가 쓴 글의 내용인즉은 “테레사 수녀가 성경을 안 읽었다기보다  목사인 당신이 성경을 안 읽은 것 같다. 성경은 신을 의심하고 배반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사랑으로 신의 존재를 알게하고 인도하려는 것이 성서이다. 심지어 인간이 된 신 곧 예수도 신에 대한 물음을  던졌었다. 십자가 상의 칠언을 생각해 보라. ‘어찌하여 나를 바리시나이까’하는 처절한 물음을 테레사는 안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삶을 보라. 두툼하게 살찐 당신의 사진 얼굴로 보아 아마 당신은 그 경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성서를 열심히 좀 읽어라.”라는 아주 도발적인 글이었답니다. 

참 저도 할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저만큼 할 일 없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제 글을 읽고  전화를 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요. 크게 두 부류였답니다. “네 깟 놈이 뭘 안다고  감히 목사님께…”하던 사람들과 “참 시원했다. 참 목사들이 문제다.”라는 사람이었답니다. 물론 후자는 딱 한 분, 직업이 목사였구요. 전자는 글을 쓴 목사가 당당하는 교회 교인들이었답니다. 

그 일 이후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나 목사들을 향한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답니다. 먹고 살기 바빳던 이유도 한 몫 했고요.

그러다 한 두 해전에 고등학교 후배가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듯 하니 선배가 좀 장례예식 좀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그 이유가 아주 걸작이었답니다. 

후배의 선친께서는 독실한 천도교인이셨고, 본인의 마지막 길을 천도교 예식으로 마치길 원하셨답니다. 그런데 여기는 미국,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촌구석, 천도교 교령이나 선도사커녕 교도들도 찾아보기 힘든데 누가 그 일을… 후배가 생각하기에 가짜라도 만들어야겠는데 그 가짜로 선배인 제가 적격이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래 그 일을 맡게 되었답니다. 그 때 천도교에서 고백하는 죽음에 대한 자세도 배우게 되었고요, 고인이 되신 후배의 선친께서 남기신 기록들을 보면서 죽음이란 안고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과 봄 사이 심하게 병원 신세를 지시면서 마치 곧 돌아가실 것 같던 어머님과 장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삶의 과정으로써의 죽음에 대해 깊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초여름이 지날 무렵 잘 나가지도 않던 교회 소모임에서의 경험은 제가 이 연재글을 쓰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답니다. 

죽음, 천당, 다른 종교 라는 물음입니다. 이거 하나 하고 가자하는 생각이 확 밀려 왔답니다. 

그 누군가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성서가 인도하는 계시의 세계, 구원의 세상, 죽음조차 과정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하는 생각이었답니다. 

쉬어가는 이야기조차  1, 2로 나누어 연재해야겠습니다. 하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지는 탓입니다. 

혹시 사기꾼 신드롬이나 가면(mask) 신드롬이란 말 들어 보셨나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말할 때 쓰는 말이지요. 

올 여름 내내 제가 빠져있었던 신드럼 현상이라는 생각으로 이 연재글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네깐 놈이 뭔데…”라는 질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두번 째 이야기로 넘깁니다.

드러냄 – 새 부족 5

(당신의 천국 – 열 여섯 번 재 이야기)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22: 15-16, 공동번역) 

“ 그 사람은 내가 잘 알지!”, “축구라면 내가 한 수 한다니까!”, “그 교회라면 내가 훤하지?” 등등의 말들 많이 들어 보시지 않으셨나요? 혹시 당신이나 제가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 축에 속하지는 않을까요? 

누군가를 안다거나 어떤 사실이나 정황을  알고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아는 정도와 크기를 어떻게 계량 또는 계측하고  다른 이들의 앎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그런 비교들이 필요한 것인지,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런 이야기 좀 골아프지요? 

자!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삼천년 전의 가나안으로 말입니다. 

탈애굽과 가나안 정복이야기(성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까지)와 이스라엘 왕국 건설 이야기 사이에 끼어 있는 책이 사사(士師)기 입니다. 공동번역은 판관기로 번역되어 있지요. 영어 성경으로는Judges라고 하고요. 재판관이라는 뜻으로 보자면 판관기가 적합한 것도 같고요. 히브리어 본래의 뜻은  재판한다, 또는 다스린다는 뜻 이외에도 구원한다는 뜻도 있답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는 사사라는 말도 적합한 것 같고요. 

아무튼 사사기 2장 16절에 보면 “야훼께서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였다.(공동번역)”라는 있는데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컷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사기에는 열 두 사사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왕권시대 직전의 사무엘도 사사라고 했고 그 두 아들도 사사라고 했으니 성서에 나오는 사사들의 수는 열 다섯으로 볼 수도 있고요. 바락장군 까지 넣어서 16명 이라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들이 한 일들 또는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한 일들은 사사기를 한번 읽어 보시길 바라고요. 

제가 사사기를 이야기하면서 전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두가지랍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족들을 위해 사사(판관)들을 세우신 까닭이랍니다. 이스라엘족들의 고백이기도 하지요. 바로 툭하면 야훼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바알신 등 다른 신을 섬기거나 조상들보다 더 나쁜 짓들을(사사기 2장 19절) 일삼는 이스라엘족속에 대한 경고와 함께 구원을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의 끊임없는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계약 상대인 을의 구원, 곧 이스라엘 족속의 구원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두번 째는 성서 전체 이야기 중에서 “앎”에 대한 뚜렷한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앎” 곧 아는 일이고, 신의 입장에서 보면 “드러냄” 곧 계시입니다. 

드러냄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이 찾아가고 있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이르는 첫 번 째 핵심 열쇠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의 드러남과 나나 우리가 그를 만나고 아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나나 당신에게 나타셨는가?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모세는 직접 사람의 말을 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모세에 후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들에게 나타났던 신 야훼는 스스로 드러내셨던 분입니다. 비록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무리들이 때론 의심하고, 불신을 드러내긴 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가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을 보냈습니다. 그런 고백들을 쉬지 않기도 했습니다. 

사사시대 이후의 야훼 하나님의 드러남 곧 계시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직접 신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꿈이나 어떤 징후로 사람과 만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세나 여호수아시대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와 사사시대 이후의 태도 사이에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드러남 곧 계시에 대해 모세나 여호수아시대의 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보고 만났던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보낸 신뢰의 크기보다 사사시대 이후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 곧 사사들이나 예언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크기는 현저하게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크기의 차이 곧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크기가 더는 작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이 택한 드러남의 방식이 바로 직접 계시였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첫 번째 전환점이 바로 사사기의 기록이라는 제 생각입니다. 

얼핏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기 쉬은 사사기의 중요함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유다왕 여호야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22: 15-16, 공동번역)” 

신학자 본 훼퍼는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안에서 그 피안(彼岸)에 있다.”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위에서, 아니면 저 쪽 다른 세상 어딘가나 죽음 저 편 어딘가에서 불쑥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나타나는 신이 아니라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인 사람에게 조차 늘 일상적으로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 전능자와 구원자로서 드러나는 시대로 바뀌는 첫 번 째 시점이 바로 사사시대라는 말씀이랍니다. 

계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과 이야기로 계속될 것입니다. 

계시, 구원, 하나님 나라 – 이 세 개의 단어는  제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이제  왕국과 예언자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염치(廉恥) – 새 부족 4

(당신의 천국 – 열 다섯 번 째 이야기)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 십 세에 죽었다. –중략-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는 그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 간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야훼를 모르는 새 세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는지 모르는 새 세대가 비록되었다. (판관기(사사기) 2 : 8, 10, 공동번역) 

모세의 후계자로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잘 수행한 여호수아도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출애굽의 경험과 가나안 정복의 첫 경험들을 쌓은 세대들이 모두 죽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겪었던 탈애굽과 가나안 정복 과정의 일들과 그 일들 위에 함께 하셨던 야훼에 대해  겨우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경험들과 해방, 6.25 등의 경험이 없이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들이 주인이 된 한국을 생각하신다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다만 보는 이에 따라 생각들이 다 다를 일이지만, 제 생각으로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경우는 지난 역사의 경험이 없는 새 세대의문제가 아니라, 마지막 옛 세대들과 그들이 남긴 부(정치, 경제, 언론, 문화, 교육, 군사 등등 모든 면에서 가진 富)를 이어 받고자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특정 그룹의 후예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비단 성서의 잣대가 아니더라도 염치(廉恥)없는 짓을 너무 대놓고 하니 참 볼성 사납기만 할 뿐입니다. 

적어도 오,육, 칠십년대 이승만, 박정희 정권 아래서도 친일이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양심은 통했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본인 자신들의 친일 행각이나 부모 세대의 친일에 대해 숨기거나 우린 그런 일과는 무관한 척 행동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문명의 21세기에 이르러 일제 통치의 부끄러운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저 뻔뻔스러움이 활개치는 것을 보면서,  제가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때가 꽉 차 오르고 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랍니다. 

“때가 이르렀다.” – 이즈음 한반도 남북을 바라보는 제 심정이랍니다. 어쩌면 기도일 수도 있겠고요. 

자! 이쯤, 우리들의 이야기인  천국 곧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약 60년에서 백년 정도가 흐르니 세대가 싹 바뀌게 된 것이지요. 세겜에서의 새로운 계약으로야훼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믿고 의지하고 칭송할 것을 선언하며 새 출발한 이스라엘 부족 동맹은 세대가 바뀌자마자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맙니다. 

세 새대들이 들어서면서 일어난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십계명의 제 일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들을 하였다.” 

판관(사사)시대(왜 판관 또는 사사로 불리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하기로 하고요) 약 200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새 세대들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택한 바알신들은 어떤 신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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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만신전(萬神殿)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오만 잡신들이 다 모인 신들의 전당을 일컫지요.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이 글을 읽고 읽는 당신에게나 우리 조상들이 섬겨 왔던 오만 잡신들에 대한 믿음과 생각들의 어떤 인자들을 조금씩은 다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랍니다. 한국인이라는 사고체계, 한글을 쓰는 사고 체계에서만 느끼는 신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말씀인데, 이런 문제들은 나중에 바울을 이야기하면서 좀 상세히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튼 가나안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은 농사를 짓는 지역이었고, 농사는 계절에 영향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사란 반복되는 일입니다. 씨뿌리고 거두는 일이 반복딘다는 말입니다. 올해는 이런 결과를보았지만 내년에는 다른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이지요. 또한 농사는 땅과 하늘이 잘 도와 주어야 되는 일입니다. 토질도 좋아야 하고 물의 관리도 쉬어야 하지요. 그러러면 또 하늘이 도와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족을 이룬 첫 세대들 곧 광야세대와 가나안 정복세대들의 꿈과 목적은 노예에서의 해방과 내 땅을 가진 자유인이었습니다.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야훼신은 그 시작과 끝을 만드신 신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있었던 신들은 야훼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유혹이 가는 신들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농사를 짓는 가나안인들이 믿는 많은 신들 가운데 으뜸되는 신의 이름은 엘(EL)이었고 그의 아내되는 신의 이름은 아세라입니다.(열왕기상 18:19)  그 둘 사이에서 나은 아들 신이 바로 바알인데 이 바알신이 주관하는 일은 비와 식물들이었답니다. 곡식들을 자라게 하는 신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알신의 부인은 아나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사랑과 전쟁을 주관하는 신이었답니다. 

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스라엘족들이 범한 야훼에 대한 배신 행위들이 시작된답니다. 

크게 두가지입니다. 부(富)에 대한 욕심과 성욕(性慾)으로 지배된 사회로 변모되어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공평과 평등으로 자유하는족속들을 위한 신이었는데 말입니다. 서로 크게 부딛힌 것이지요. 

가나안인들이 믿었던 바알신앙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서 부를 쌓는 것이 최고의 복인데, 그 농사가 잘 되는 일은 바알신과 아나스가 성적관계를 즐겁게 잘 맺어서 하늘과 땅의 조건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로 성의 자유화를 맘껏 구가하는 사회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지요. 또한 가나안 사람들은 해마다 죽음의 신(Mot 신)이 바알을 죽이고, 바로 그 바알의 죽음 때문에 각종 자연 재해들이 생겨 농사를 망치는데, 아나스가 모트를 죽임으로 바알이 다시 살아나고 바알과 아나스의 성관계를 통해 다시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족의 선조들이 가졌던 야훼라는 드높은 이상(理想)에 비해 참으로 감각적인 현실 만족을 추구하는 바알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바알이 훨씬 가까운 신이었던 셈입니다. 

기원전 약 1200여년 전, 지금으로부터 3300여년 전,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족의 모습이 그럤다는 것인데요. 뭐 오늘날과 그리 다를 게 있나요? 

그렇게 시작한 판관(사사) 시대 이야기는 또 내일로.

새 계약 – 새 부족(部族) 3

(당신의 천국 – 열 네번 째 이야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종교 공동체를 가르킬 뿐만 아니라 생존과 건강한 삶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주권적인 재부족화(再部族化) 사회를 가르킨다. – 노만 갓월드의 ‘히브리 성서”에서 

제가 사는 미국 동부의 아주 작은 주인 델라웨어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낚시터들이 제법있답니다.  주 남단에 있는 Indian River도 그 중 한 곳입니다. 특히 대서양과  만나는  강 하구는 주변 해변가와 함께 아주 잘 알려진 낚시터입니다. 흑돔을 비롯한 다양한 어족들이 낚시꾼들을 부르는 곳입니다. 

그 곳에 가면 주립공원 낚시터와 계절에 따라 잡히는 어족들과 낚시 규율 등을 담은 안내판이 있답니다. 안내문은  3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한국어입니다.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떤 언어권에 속한 사람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답니다. 

요즈음 국립공원에서 일하시는 분들 놀고 있지요. 아직도 미국 정부의 shutdown이 풀리지 않은 탓입니다. 그랜드 캐년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라지요. 그랜드 캐년의 관광 포인트에는 많은 안내문들이 중국어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답니다. 심지어 어떤 곳엔 영어 표기없이 중국어로만 만들어진 표시판도 볼 수 있답니다. 중국 관광객들이 대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중국  –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의 한 축으로 일컬어지는 대국이지요. 그런데 중국이 대국이었던 것은 21세기 뿐만 아니지요. 유사 이래 그들은 중화(中華) 곧 세계의 중심이요, 한족(漢族)이 제일 잘난 종족이라는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진 나라지요. 

오늘은 잠시 중국 역사를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역대 수많은 왕국들이 있었지요. 혹시 진나라, 한나라, 남위,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라는 이름들 기억하시나요.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 이름이지요. 그러면 북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는요? 마찬가지로 중국에 있었던 나라들 이름이지요. 

그런데 차이가 좀 있답니다. 먼저 이야기한 진, 한, 남위, 수, 당, 송, 명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들이고요. 나머지 북위, 요, 금, 원, 청나라는 다른 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해서 세운 나라들이랍니다. 

북위는 선비족이, 요나라는 거란족이. 금나라는 여진족이, 원나라는 몽골족이,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들이지요. 

그런데 중국을 정복했던 이민족(異民族)들은 지구상에서 없어졌거나 지금은 세력이 아주 미미하지요. 중국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중화(中華) 안에는 그 모든 민족들의 것들이 섞어서 하나가 된 것이지요. 

자! 이쯤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때로 돌아가 보는 것이지요. 

가나안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다른 종족들을 멸하시고 그 땅을 너희들에게 주마고 히브리족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의 일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니 그가 죽고 난 후,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 들어서기까지 가나안의 원주민들 다 정복하지는 못했답니다. 

성서는 그리된 까닭을 야훼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먼저 깬 이스라엘의 탓과 또한 그들을 경고하고 교훈을 주노라고 야훼께서 택하신 방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 이후 기독교인들 믿음의 근간이 되는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보자면 나중에 삼손이야기나 다윗이야기에 막강한 적수로 등장하는 블레셋족 같은 경우는(그들의 이름 블레셋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까닭은 나중에 다윗 이야기 때 하도록 하고요.) 이미 그 당시 철기문화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히브리족들은 아직 청동기 수준의 무기를 쓰고 있었을 때이니까요. 

아무튼 가나안의 서쪽으로부터 동쪽까지 많은 땅을 정복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그도 이제 기가 쇠할떄로 쇠해져서 땅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었답니다. 

세겜2

여호수아는 말년에 세겜이라고 하는 땅에서 민족 총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12지파로 알려진 부족 총회를 연 것이지요. 

이미 그 당시에는 애굽으로부터 탈출해 온 무리들과 가나안 정복 과정을 통해 히브리족과 함께 한 가나안 원주민들, 타지에서 이들 새로운 세력들과 합친 무리들 등등이 그 민족 총회의 구성원들이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자! 여기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것이 있답니다. 

모세가 이끌어던 광야시대의 히브리족과 야훼와의 약속을 되새겨 보는 것이지요. 십계명 말입니다. “나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약속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야훼 말고 다른 신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이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러지 말라는 계약이 성립된 것 아니겠어요. 

바로 이것이랍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중국인들의 버팀목이듯 당시 히브리족들의 버팀목은 유일한 야훼만이 신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시절 히브리족들을 제외한 모든 족속들의 주된 신들은 자연신 일테면 해, 달, 별, 바람이나 먹고 사는 음식이나 하루살이에 절대 불가결한 소, 말, 곡식 들이 바로 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우상화했고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우상, 야훼가 가장 싫어했던 우상은 바로 사람이라는 우상이었답니다. 바로 왕으로 대변되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체제였습니다. 

모세가 이끌었던 광야 사십년 동안의 히브리족들은 주로 종족안에서 일어난 불만, 불평이나 갈등으로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곤 했지만, 가나안 정복 이후로는 다른 종족들이 믿고 있는 신들과 생활 양식과 문화 등등에 눈을 돌리고 유혹 당하면서 야훼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들이 생긴 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부족 총회를 열고 새로운 계약을 맺은 까닭입니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여러분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 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여호수아 24: 15, 공동번역)> 

새로운 부족 이스라엘은 그렇게 새로운 다짐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짐도 잠시, 세대가 바뀌면 또 달라지는 법이지요. 그 이야기도 성경은 우리에게 잘 전해 주고 있답니다. 그 이야기는 내일로.

섞임 – 새 부족(部族) 2

(당신의 천국 – 열 세번 째 이야기) 

이것이 온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속에 들어 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 누구든지 실수로 살인을 했을 경우에 피신하도록 지정된 성읍들이다. 그들은 회중 앞에 출두하기까지 피살자의 앙갚음을 할 근친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 20: 9, 공동번역)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의 일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버스를 타고 좌석에 앉았다가 체포되는 일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흑인 해방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타는 버스를 탈 수 없다는 당시의 몽고메리시 법안에 대해 항거하는 일에서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지금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있는 시대에서 보자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처럼 느껴지지만 고작 오십년 전의 일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함흥냉면

제가 냉면이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 본 것은 대학을 막 입학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학교 앞 식당에서였습니다. 

그 때까지 저희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냉면이라는 국수를 만들어 주신 적이 없었답니다. 한남동 토박이 경기도 사람이었던 어머니에겐 냉면은 타지의 음식이었을 뿐입니다. 어쩜 그 당시까지 어머니는 냉면을 전혀 모르시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냉면은 이북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토속 지방 음식의 벽이 허물어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6.25 전쟁입니다.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마구 섞이게 되면서 지방 토속 음식 문화 역시 한정된 지역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찌보면 지역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역사의 흐름이 바뀌거나 전쟁이나 천재지변이라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경험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흑인 해방 운동이나 제가 처음 먹었던 냉면의 경험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처음 이야기들을 보노라면 바로 이러한 바뀌는 경험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섞임입니다. 

히브리족이 들어간 가나안에는 이미 그 땅을 차지하며 살았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야훼라는 신의 깃발 아래 뭉쳐져 침략(? – 원주민의 관점으로 보자면)한 히브리족 보다 먼저 그 땅을 차지하며 살았던 그 땅의 본래 주인인 셈입니다. 가나안족, 모압족, 미디안족, 블레셋 등등 숱한 그 땅의 먼저 주인들이 도시국가나 부족국가 또는 왕권국가로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히브리족을 기다리며 “어서오십쇼”하고 반기는 아무도 없는 땅이 아니라 이미 살던 주인이 있는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족이 그 땅에 있던 원주인들을 밀어내고 새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는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이름으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하는 히브리족은 가나안 도시와 성을 하나 하나 점령해 나갔던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히브리족에서 이스라엘족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답니다.  바로 도피성을 기록한 저 위에 인용한 여호수아서 기록에서 그 단면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속에 들어 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을 점령해 나가는 무리들과 원래 그 땅 가나안에 살았거나 다른 지방에서 유입된 무리들이 섞인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여호수아와 판관(사사기)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 부족 동맹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들은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 계약의 중심엔 역시 야훼 하나님이 있는 것이고요. 애굽으로 부터 온 노예 무리인 히브리족과 본래 가나안 땅에 살았던 종족, 그리고 타지에서 흘러 들러 온 종족들이 야훼 이름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며 이스라엘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로…

다름(Difference) – 새 부족(部族) 1

(당신의 천국 – 열 두번 째 이야기) 

야훼의 종 모세가 죽은 다음이었다. 야훼께서 눈의 아들이자 모세의 부관인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 종 모세가 죽었다. 그러나 너는 이제 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떠나 이 요르단강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 가거라. 너희 발바닥이 닿기만 하면 어디든지 그 곳을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여호수아 1: 1-3, 공동번역)  

이제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뒤로 하고 여호수아와 사사기(판관기)를 중심으로 한 주간 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광야 시대를 접고 야훼 신이 탈출 무리들인 히브리족들에게 주마고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십 년 광야 생활을 끝내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한 달에서 한달반 사이면 충분히 들어 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삼십 년 한 세대보다 더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세를 비롯한 탈출 1세대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성서는 카데스 땅에서 있었던 히브리족들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리 되었다는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민수기 20장, 신명기 1장을 읽어 보시길) 

그리고 이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성서 여호수아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정복한 땅을 부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한마디 여담을 드립니다. 얼마 전 제 가게 손님과 아내가 나눈 대화입니다. 

아내 : 많이 피곤해 보여요.

손님 : 어제 밤에 잠이 안 와서 혼났다구. 거의 잠을 못잔 거 같애. 그래서인지 아주 피곤해.

아내 : 아, 그럴 땐 저는 성경을 읽으면 그냥 잠이 오던데요.

손님 : 아이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해지. 다음엔 나도 꼭 그래야겠네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읽기에 좀 졸린 부분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 이르면 흥미진진이랍니다.  마치 삼국지를 보는 것 처럼 땅따먹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삼국지 이야기 좀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삼국지 몇 번이나 읽어 보셨는지요?  제가 어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이상 읽었던 책들을 꼽자면 성서, 삼국지, 수학 1의 정석 등이 생각난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중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었다는 말은 100% 거짓말이랍니다. 제가 삼국지를 네 다섯번 읽은 것은 사실이랍니다. 그런데 진짜 제가 읽은 것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소설책일 뿐 삼국지(三國志)라는 역사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은 전혀 없답니다. 

역사서 삼국지는 중국 서진 나라의 진수라는 이가 쓴 서기 184년의 후한 시대부터 280년 진나라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96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 이렇게 총 65권으로 된 책이랍니다. 

특히 삼국지 위서(魏書) 마지막 책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부여, 고구려 등의 한반도 나라들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당연히 이 역사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위나라이고, 위나라를 세운 조조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으니까요. 

거기에 비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한참 뒤인 1522년 명나라 때 나관중이라는 소설가가 쓴 소설이랍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유비와 제갈 공명이지요.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니까 당연히 역사적으로 있지 않았던 사실이나 사람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그런데 저만해도 역사책 삼국지는 한 번도 다 읽어 보지 못했지만 삼국지연의는 몇 번이나 읽었던 고로 제 머리 속에 실제 상황인 것처럼 남아있는 사실은 소설 속 이야기들인 셈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돌아가 보는 히브리 족의 가나안 땅 정복 이야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실제적 사실과 고백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 일이란 실제적 사실과 고백이 반드시 똑 같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더더우기 신앙의 세계, 믿음의 세계에서는 실제적 사실과 고백의 차이를 따지는 일은 실로 무의미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족의 가나안 땅 정착과 그들이 왕을 세워서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모습을 돌아보는 여호수아와 사사(판관)기의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 읽으며 마치 야훼 하나님의 약속처럼 여호수아가 앞장 선 무리들이 거의 일거에 가나안을 점령하고 12부족이 그 땅을 나누어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꼼꼼이 다시 들여다보면 매 순간 순간, 매 장면마다 우리들이 한번 곱씹어야만 할 장치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답니다. 

바로 사실과 고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백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을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기록자들의 노력을 읽게 된답니다. 

가나안 정복 이야기인 여호수아와 사사(판관)기를 통해 그 이전(광야 시대)과 그 이후(가나안 정착 시대)의 완벽한 다름 곧 차이는 민족의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히브리족에서 12지파 부족 공동체인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잇겠습니다.

뿌리– 약속 6

 (당신의 천국 – 열 한번 째 이야기)

위서(魏書)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서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불렀는데 요(堯)나라와 같은 때였다고 한다. – 중략 –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1908살이었다고 한다. – 삼국유사에서

오늘은 역사 이야기 좀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제 이야기의 방향을 좀 알고 계시는 것이 이 연재 글을 계속 읽기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한 까닭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두 가지의 확실한 믿음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첫째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오늘이라는 ‘시간’과 각자가 발딛고 있는 현장인 ‘여기’에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이요, 두번째는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 반드시 꼭 들어가기 때문에 죽음이란 단지  삶의 한 과정이다라는 믿음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런 제 글쓰기는 제 자신이 누가  뭐라하던 예수쟁이라는 확실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하는 작업입니다. 나아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제 신앙적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 오늘의 글로 돌아가지요. 역사이야기입니다.

먼저 한국 역사 조금 둘러 볼까요.

단군1

단군신화가 있지요. 기원전 2333년의 일이라고 이야기하지요. 학교에서 배웠던 인류역사에서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의 일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기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중국의 ‘관자’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실제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은 기원전 700 – 800년이 아닐까 하는 추정들을 한답니다.

그리고 부여라는 나라가 세워진 시기는 대략 기원전 5세기경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전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았던 삼한이 있습니다. 세개의 한나라 곧 마한, 진한, 변한이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4세기 정도로 본답니다.

그러면 실제 역사 기록에 나와있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기원전 18년, 신라는 서라벌, 계림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다가 신라라는 나라 이름을 쓴게 기원 후 307년이랍니다.

자! 이쯤 생각해 봅니다. 기원이라는 말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했다는 것 아시지요.

예수가 이 땅에서 살았던 시기는 우리나라 삼국시대가 막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습들이 좀 다르잖아요? 어떻게 다른가요? 머리 속에 다른 상상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당신의 출생지에 따라 그 모습들이 달리 그려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일테면 경상도 출신인 당신이 그리는 백제나 신라의 모습, 또는 전라도 출신인 당신이 그리는 신라나 백제의 모습, 그도 아님 서울(신촌이지만 엄밀하게 경기도) 출신인 제가 그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습 – 아마 조금씩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통일신라가 되고 다시 후삼국 시대로 이어지다가 불교의 전성시대였던 고려시대가 약 500년, 이조시대가 뒤를 이어 약 600년입니다.  그리고 일제를 거쳐 해방,  남의 역사, 북의 역사가 따로 있지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거의 남일터이니, 6.25, 4.19, 5.16, 유신, 5.18, 3당 합당,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의 대통령 시대로 이어져 온 것이지요.

또 이즈음엔 다문화 가족이 많아서 배우자가 자란 환경이 또 다를 것이고요.

한민족이라고 불리우는 한반도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또 만일 내가 삼국시대나 이조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모습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요?

이쯤 중동으로 넘어가서 이스라엘 역사를 한번 쭉 훑어 보지요.

창조설화가 있고 아브라함 등의 족장 설화에 이어져서 모세가 나옵니다. 기원전 1500- 1300년 사이에 일어난 일로 알려져 있답니다.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때입니다.

히브리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이라는 12부족 중심의 신정체제 공동체가 사사시대라는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 사울 시대는 기원전 1000년쯤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울, 다윗, 솔로몬 단지 세 왕의 시대를 지나자마자 남북으로 갈라집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남쪽 유대는 568년 바벨론에게 침공을 받고 무너집니다.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랍니다.)

약 30년간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는데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돌아와봤자 그 유명한 알렉산더대왕에게 다시 망하고 뒤이어 로마의 속국이 되었지요.

그리고 예수가 그 땅에 임하고, 기원후 66년 로마에 의해 멸망한 후 세계 각처로 떠도는 민족이 됩니다. 그렇게 나라없이 살다가 1948년 지금의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이 건국합니다.

이제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거두고 오늘의 이야기 핵심을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이든 한국이든 역사적 경험에 따라 그 시대의 생각들이 달랐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모습이 달랐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싯점인 모세의 광야시대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그들을 인도하는 오늘이라는 시점과 가나안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 숨쉬며 사는 하루 하루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연장을 맞는 것은 자신들의 아들 딸이었습니다. 삼대, 사대에 걸친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 후의 천당의 모습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일컬어 히브리적 사고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이해입니다.

구약의 상당부분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나중에 이어지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를 설명하는 바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모세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나아가 모세 이야기가 주된 신앙의 조건인 유태교와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한국계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며 한가지 아주 중요한 모세와 그 시대 히브리족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와 비교해도 모자랄게 없는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바로왕과는 뛰어난 협상가였고, 지팡이 하나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으며, 백만 명이 넘는 무리를 사십년 동안 광야를 인도한 지도자였으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약 중재자였고, 율법을 제정한 법률가였으며, 전투에서는 최고의 지휘관이었고, 제사장을 임명하는 절대 종교 권위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관인 동시에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실로 거의 신의 반열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 주변의 대다수 나라들이 왕을 세우고 있었지만 모세는 결코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야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족의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가나안에 들어가 다윗왕권이 세워질 떄까지 이어진답니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시대인 셈입니다.

저는 이 시대를 우리들이 누리고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첫번째 모형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절대 복지가 이루어지는 사회,  공평이 정의가 되는 사회, 사회적 약자가 이해되고 거두어지는 사회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믿음입니다.

이제 가나안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제 이야기는 앞으로 가나안의 이스라엘 부족동맹, 왕국시대 또는 예언자시대, 포로시대, 귀환시대, 신구약 중간시대, 예수시대, 성령시대 – 바울, 초기 교회, 교회시대, 한국교회, 우리들 그리고 나와 천국의 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