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스물 다섯 번 째 이야기)
“다윗은 몹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나단에게 소리쳤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양 한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그 때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 중략 –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 다윗이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자 나단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분명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 사무엘하 12 : 5 – 13, 공동번역
다윗이 아내 바쎄바를 위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니 바쎄바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솔로몬이라 히였다. 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 사무엘상 12 : 24, 공동번역
예루살렘 정복은 다윗 이야기에 있어 정점이었습니다. 다윗 개인에게 있어서는 수많은 고초를 헤쳐 온 길이었지만 결과는 늘 풍족했습니다. 승승장구의 인생길을 구축해 온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나단을 통해 이미 예고된 일들이지만 다윗은 가혹한 심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식들 사이의 일어난 근친상간, 형제간의 살육, 아들의 반역, 피난 등등 이미 이전의 다윗이 아닌 일들이 연속됩니다.
다윗의 끝없는 상승 곡선의 인생길을 내리막길로 꺽어 놓은 사건이 바로 유부녀와의 간통사건입니다.
다윗 개인에게는 인생을 뒤바꾼 일이지만, 성서 전체의 이야기를 놓고 본다면 이 사건은 실로 야훼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유대족들 곧 이스라엘 민족이 고백하는 야훼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기다리는 메시아의 원형,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그려 보이는 사건이라고 저는 해석한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던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복음 1: 15, 표준 새번역 개정판)라는 첫번 째 선언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선포하는 예수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선포를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그리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차이를 알게 되는 열쇠라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가 전장에 나가있던 어느 날 저녁에 낮잠을 잤으매 틀림없던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누군지 먼저 확인해서 자신의 부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궁으로 불러 들여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안 이 두 불륜남녀는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처음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계략을 꾸미고 실패하자, 멀쩡한 사내 그것도 다윗 개인에게나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사내를 전쟁터에서 맞아 죽게 일을 꾸밉니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합니다. 사무엘하 11장의 요약입니다.
이 이야기를 당신이 다윗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밧세바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개죽음을 당한 우리아가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이 모사에 권력쪽에 붙어 함께한 모압이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일을 두고 다윗 앞에 서서 왕의 잘못을 드러내야 하는 나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십시요.
아마 처한 위치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느낌이 아주 달라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왕인데…”, 밧세바의 입장에서는 “왕이 부르는데 어찌….” 아니면 “아무리 내가 꼬실 마음이 좀 있었기로서니 왕이….” , 우리아의 입장이라면 “이런 천하의 처 죽일 년놈들….”, 모압의 입장이라면 “아무렴 나도 살 길 찾아야지. 왕한테 붙어야…”, 그리고 이제 왕앞에 나가야 할 나단의 입장이라면 “젠장, 내가 왜 이렇게 모가지 걸 일에 나가야 하지?”라는 생각들도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다윗의 숨겨진, 아주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품이 드러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유혹, 현혹, 저지름, 숨김, 할 수 있는 능력 때론 위법적일지라도 모든 힘을 다해 드러나는 것을 막음, 성공하면 안도와 함께 쉽게 잊어 버림, 끝내 드러나면 후회.
이런 공식이 당신의 일생에서는 몇 번이나 일어났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처럼 이름없이 사는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나 단지 크기의 차이는 좀 있겠지만 이런 공식이 통하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수시로 일어날 수 밖에 없지요.
다윗과 밧세바의 이 불륜사건을 사람이면 누구나 빠질 수도 있는 일로 전제한다는 고백이 바로 사무엘하 11장의 기록입니다.
나아가 누구나 우리아가 될 수도 있고, 모압이 될 수도 있고, 나단의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는 전제입니다.
이 사건 전체를 야훼는 눈에 거슬려했습니다.
그래 나단을 내세웁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새끼양 한마리까지 빼앗는 예를 들어 다윗의 죄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나단은 야훼의 눈에 거슬린 불륜의 댓가로 받게 될 심판들을 나열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말입니다. “너는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했지만, 나는 이 일을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리라.”고요.
그 나단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윗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혹시 이 장면에서 다윗의 속죄와 회개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장면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 먼저 소개드립니다. 참여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우기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시 “죄와 벌”입니다.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은/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어떠신지요? 술에 취한 시인이 길거리에서 자신의 아내를 우산으로 때리고 돌아 온 날 밤 그의 마음속 생각이랍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보지는 않았을까하는 부끄러움,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두고 온 우산이라는 마지막 행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말입니다.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생사권조차 틀어 쥐고 있었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아를 깜쪽같이 없앴듯이 나단 정도도 우습게 처리할 수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나단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다윗이 직접들은 말도 아닙니다. 설혹 나단의 말이 야훼의 말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이미 받을 심판으로 결정된 일입니다. 이제껏 숨겨왔듯이 한 입 정도 더 막으면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인 것입니다.
설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 세계사를 다시 훑어 보시거나, 아주 멀리 갈 것없이 당신의 주변을, 더욱 가까이는 바로 당신의 지나간 삶을, 만일 그게 부담이 되신다면 지금 대한민국과 미국, 아니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의 국가가 하는 일들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시인 김수영이 하는 후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 것이 모두 내 손 안에 있는 왕이 단 한 순간의 충고로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유대인들이 다윗을 통해 야훼를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는 한정적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회개는 용서라는 은총으로 되돌아 온다. 다만 그 죄에 대한 댓가는 일정 수준 받을 수 밖에 없을지라도.
또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곧 다윗을 원형으로 하는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가나안을 통일한 다윗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지도자이지만 야훼 앞에서는 늘 무릎꿇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권력의 소유자가 바로 그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비록 다윗 개인에게는 걸림이었지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고백이 출애굽 이후로 아주 강력해진 사건이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